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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의 판첸라마 고두례 거부 사건 진실은

김민호 한림대 중국학과 교수
티베트·서양기록 등 입체 조명
연암, 판첸라마에 부정적 묘사
황제 명에도 고두례 거부 서술

중국·서양·티베트 기록과 달라
열하일기 거짓일 가능성 높아
‘박명원 돕기 위한 의도’ 추정

연암, 양반들 허위 비판했지만
불교 관련해선 본인도 똑같아

연암 박지원
연암 박지원

1780년 8월, 박명원을 비롯한 조선 사신들은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했다. 청나라 황제 건륭제가 판첸라마 6세에게 가장 정중한 형태의 절인 고두례(叩頭禮)를 올릴 것을 명한 것이다. 황제의 명을 거스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판첸라마에게 고두례를 올리면 귀국한 뒤 ‘부처를 받들었다[奉佛之事]’는 유생들의 공격에 직면할 것이 뻔했다. 그러면 이들 조선 사신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김민호 한림대 중국학과 교수는 최근 ‘중국소설논총’(제55집)에서 ‘열하일기’를 비롯해 청 정부 공식문건, 판첸라마 수행원으로 왔던 인도 승려 프랑기르 고세인, 티베트 기록 등을 활용해 판첸라마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와 조선 사신들이 판첸라마에게 고두례를 올렸는지 여부를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연행단 총책임자였던 박명원을 따라 청에 다녀온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열하일기’에서 판첸라마 인물평과 고두례 사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연암은 판첸라마에 대해 “영민하거나 준걸스러운 기상이 없었다” “피부 색깔은 짙은 황색에 압도돼 황달병에 걸린 사람처럼 누렇게 떠 있었다” “흐리멍덩한 모습이 무슨 물귀신의 화상을 보는 것 같았다” 등 비하에 가깝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고는 청나라 무인 학성(郝成)과의 대화를 통해 중국인들이 그런 ‘흐리멍텅한 판첸라마’를 활불(活佛)로 보고 있으며, 물위를 걷거나 부모를 위해 옆구리에서 간을 빼낸 이의 병을 낫게 하는가 하면 호랑이도 온순하게 만들고 주문을 외워 머리 둘 달린 뱀을 죽게 만드는 신통력을 지닌 존재로 떠받는 등 은근히 중국인을 어리석은 듯 적고 있다.

또 고두례 시행 여부와 관련해 조선 사신이 청 예부(禮部)에 "천자를 공경하는 예법을 어떻게 서번의 승려에게 하란 말인가"라고 따져 물었다는 것, 판첸라마를 만났을 때 청의 군기대신이 조선 사신에게 판첸라마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하라고 신호를 보냈으나 사신은 뒷걸음질 치며 물러나 절을 않고 그냥 앉았다는 것, 군기대신이 당황했으나 사신이 이미 앉고 말았으니 그 역시 어찌할 수 없어 못 본 듯 행동했다는 것 등을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암은 예부에서 황제에게 올린 문건에 ‘조선국 사신들이 땅에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고 사례를 했으며, 판첸라마는 사신들에게 내린 구리 불상 등 물품 목록을 문자로 바쳐 올렸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그런 뒤 예부 문건 내용은 (자신들이 처벌 받지 않기 위해) 허황한 거짓말로 황제에게 그 일을 보고했으리라는 것과 조선 사신들이 고두례를 않은 것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일이라고 적고 있다.

김민호 교수는 이 사건의 진위여부를 ‘열하일기’에만 의존하지 않고 동일한 내용을 다루는 다른 기록들을 검토했다. 그 결과 연암의 기록과 전혀 다른 판첸라마 6세의 이미지와 고두례 사건 전말이 드러났다. 판첸라마를 수행했던 프랑기르 고세인은 건륭제의 거듭된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중국행을 결정한 뒤 추위와 질병 등 온갖 고생 끝에 열하에 도착한 판첸라마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티베트에서 판첸라마를 친견한 스코틀랜드인 조지 보글(1746~1781)은 “안색은 평균적인 티베트 사람보다 희고 그의 팔은 유럽 사람처럼 하얗다.…나는 그의 단점을 찾아보려 했으나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있어 실패했다”라는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

티베트의 판첸라마 6세
티베트의 판첸라마 6세

조선 사신들의 고두례 시행 여부와 관련해서도 청 공식문건 외에 판첸라마 전기를 중국어로 옮긴 문헌에 ‘두 명의 대신은 황제의 뜻을 받들어 사신들을 이끌고 판첸라마께 배례를 올렸고 판첸라마께서는 사신들에게 머리에 손을 올려 기도를 해주었다’고 나온다. 특히 이 기록의 원문인 티베트어 문헌에는 ‘만약 대신들이 강제로 조선 사신들을 교육시켜 황제의 명령대로 무릎 꿇고 절하지 않게 했다면 그들 본래의 생각으로는 이런 예절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등 조선 사신들이 어쩔 수 없이 예를 올렸음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결국 여러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열하일기’의 고두례 및 판첸라마에 대한 내용은 연암의 편견과 거짓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연암은 왜 이 같이 기록했던 걸까. 김 교수는 조선의 시대 상황과 친인척이었던 박명원을 보호하려는 의도일 것으로 추정했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기에 불교는 천시 받고 있었다. 비록 힘에 눌려 청을 사대하고 있었으나 한족이 아닌 만주족을 내심 멸시했던 조선 사신들에게 판첸라마는 만주족도 못되는 ‘오랑캐 중’에 불과했고 만날 가치도 없었다는 것. 더욱이 판첸라마에게 절을 올리면 조선으로 돌아가 난처할 상황에 직면할 것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박명원 일행이 판첸라마가 하사한 불상을 가지고 돌아오자 성균관 유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집단행동에 나섰다. 연행단이 ‘사악하고 더러운 물건[邪穢之物]’을 지니고 왔다며 “우리 국가에 치욕을 끼칠 뿐만 아니라 장차 천하 후세의 비웃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연암은 박명원을 보호하기 위해 판첸라마의 부정적인 모습을 의도적으로 드러냈으며, 조선 사신들이 고두례를 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했다. 특히 중국 예부의 기록이 어떤 방식으로든 조선에 알려질 것을 예상한 연암은 선수를 쳐서 그 기록을 밝힌 후 바로 뒤에 고두례 했다는 예부의 기록이 ‘허황한 거짓말’이라는 고도의 술책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판첸라마 고두례 사건은 조선의 집권층이 불교를 얼마나 멸시·탄압했는지, 반대로 동시대를 살아야했던 조선시대 불교인들의 참혹했을 현실을 가늠케 한다. 또한 양반들의 허위의식을 통렬히 비판했던 연암조차 불교에 있어선 거짓과 편견, 그리고 허위의식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482호 / 2019년 3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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