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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불교 첫 순교지 모례의 집

고구려 스님 목숨 건 전법터엔 세월 거스른 우물만 남아

한국불교 첫 순교는 고구려 스님
불법 전하고자 신라로 국경 넘어

신라 최초 불교신자인 모례의 집
묵호자·아도화상 지낸 흔적 남아
최초 순교자 정방 스님 기록도

모례의 집서 시작된 불법 홍포
토착신앙 무장된 신라 전역으로
100년만에 연뿌리처럼 퍼져나

​​​​​​​현재 모례의 집 지역명 ‘도개’는
‘불도 열린다’는 역사 사실 보여줘

구미시는 신라불교가 시작된 성지로서 구미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2017년 10월, 국·도비와 시비 등 400억원을 들여 도개리 일대 약 3만6000㎡ 부지에 ‘신라불교초전지마을’을 개관했다.

한국불교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교자는 고구려 스님이다. 삼국이 창칼을 겨누고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절, 특히 고구려와 신라의 대립은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국경을 넘다 붙잡히면 곧바로 죽음을 맞아야 했던 무참한 시대에 목숨을 내던져 불법을 전하고자 몰래 신라로 향한 스님들이 있었다. 역사서에는 정방, 멸구자, 묵호자, 순도 스님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타국에서 전법의 이슬로 사라진 고구려 스님들은 더욱 많았을 것이다. 신라가 이차돈 성사의 순교로 불교를 받아들이기 이전 이렇게 고구려 스님들은 몸을 내던지고 피를 뿌려가며 신라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차곡차곡 새기고 있었다.    

경북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마을 중앙에는 오래된 우물이 하나 있다. 우물의 한자말이 왜 ‘정(井)’자인지를 단번에 이해할 수있는 그런 우물이다. 거칠게 다듬은 직사각형의 우물은 전형적인 정(井)자의 모습이다. 현재 경북문화재자료 제296호로 ‘모례’가 사용한 것으로 전해져 전모례가정(傳毛禮家井)이라 불리는데 모례장자샘, 모례가정(毛禮家井), 모례정 등으로 불렸다.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왔지만 공통점이 있다. 바로 ‘모례’다. 그 우물에 신라 최초 사찰로 전해지는 도리사의 창건과 창건주 아도화상의 설화가 담겨있다. 나아가 신라불교의 첫걸음에 뿌리가 닿는 일화와 역사의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있다.

신라 최초 불교신자로 알려진 모례는 구미시에 해당하는 일선군(一善郡)에 살았던 지역유지였다. 농토가 많고 가축을 많이 길러서 모례의 집은 늘 사람들이 북적였다. 그는 일찍이 고구려를 자주 왕래해 스님들을 자주 보아온 터라 불심이 깊었다. 그런 모례의 집은 한국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모례는 눌지왕 때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 위해 온 고구려 스님 묵호자(墨胡子)가 전법을 할 수 없게 됐을 때 집안에 굴을 파 그를 3년간 머무를 수 있게 해줬다. 이후 아도화상이 시자(侍者) 3인을 데리고 왔을 때도 신라에서 오로지 모례의 집만 문이 열려있었다. 당시 신라는 토착신앙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아도화상을 죽이려는 이들이 많았다. 아도화상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모례의 집에 5년간 머무르며 낮에는 양과 소를 길렀고 밤에는 사람들을 모아 몰래 불법을 강론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구려에서 넘어온 스님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모례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전모례가정(경북문화재자료 제296호)

전쟁으로 반고구려 정서가 강한 신라에서의 포교는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고구려에 있었다면 복전(福田)으로 존경받으며 제대로 된 승려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허름한 옷을 입고 가축을 기르며 오로지 신라에 불법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가난한 이들과 들판을 뒹굴며 울고 웃었다. 이후 아도화상의 덕화에 모례는 신라 최초 사찰인 도리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아도화상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끝까지 고구려로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서 입적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부처님도 입적하실 때 고향을 바라보며 누웠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도화상의 전법 의지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도화상이 머물렀던 모례의 집은 스님들의 은신처였다.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하려다 목숨을 잃은 고구려 스님의 순교도 모례의 집에서 시작됐다.

‘해동고승전’권1 아도조에 아도화상이 일선군에 들어와 모례의 집에 들렀을 때의 이야기가 나온다.

“양나라 대통 원년(527) 3월11일에 아도가 일선군에 들어오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신사(信士) 모례의 집에 찾아오니, 모례가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지난날에 고(구)려의 승려 정방(正方)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군신(君臣)들이 괴상히 여기고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그를 죽였고, 또 후에 멸구자(滅垢玼)라는 이가 다시 왔을 때도 죽였는데, 당신은 지금 무엇을 구하려고 여기에 왔습니까? 어서 문 안으로 들어와 이웃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면서 밀실에 모시고 공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법흥왕 이전, 이차돈이 참형을 당하기에 앞서 이미 정방과 멸구자 등 고구려 스님들이 모례의 집에서 불법을 홍포하다 순교한 일은 이렇게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물론 기록에 남지 않은 스님들의 순교는 더욱더 많았을 것이다. 역사의 기록은 극히 일부분에 그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라의 불교전래는 다수의 고구려 무명 스님들의 목숨이 켜켜이 쌓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구려 스님들이 목숨을 걸고 신라로 들어와 불교를 전하려 했던 이유는 순수한 종교적 염원이었다. 끝없이 계속된 고구려 스님들의 전법에 신라는 점차 불교에 젖어 들기 시작했고 이후 한반도 전역에 연뿌리처럼 불교가 퍼져나갔다.

지방에서 조금씩 탄력을 받은 불교는 결국 왕의 최측근인 이차돈의 순교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국교로 인정받게 된다. 고구려 스님들이 순교로서 전법의 씨앗을 뿌린 지 꼭 100년만이었다. 불교가 지방이 아닌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마침내 화려하게 꽃 피울수 있게 됐다.

그런데 신라 불교의 시작이 왜 경주가 아닌 변방인 구미였을까? 당시 모례의 집이 있던 일선군은 지리적으로 고구려에서 문경새재를 넘어 왕경이었던 경주(서라벌)로 가는 길목이었다. 당시 신라에 들어가려던 고구려 스님들은 상당수가 국경 근처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스님들은 변방에 숨어 조금씩 불교를 포교했다. 목숨을 건 전법의 길이었으니 불법홍포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케 한다.

모례의 시주로 창건된 도리사에 있는 아도화상 좌선대.

토착신앙으로 무장된 귀족들이 득세하던 경주에 비해 교통과 군사적 요충지였던 일선군은 어쩌면 조용히 불교를 포교하기에는 최적의 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현재 지역명으로 사용되고 있는 도개(道開)는 ‘불도가 열린다’는 의미로 모례의 집을 중심으로 신라 땅에 불교가 전해진 역사적인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구미시는 신라불교가 시작된 성지로서 구미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2017년 10월, 국·도비와 시비 등 400억원을 들여 도개리 일대 약 3만6000㎡ 부지에 기념관, 전통한옥체험관, 전시가옥 등으로 구성된 ‘신라불교초전지마을’을 개관했다. 초전지는 ‘처음으로 전해진 땅’이라는 뜻으로 기념관에는 신라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한 아도화상의 일대기와 도리사 창건 과정, 구미 지역 불교문화유산 등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마을은 지난해 3만여명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러나 신라불교 수용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모례와 순교자에 대한 흔적이나 설명은 많지 않다. 모례에 대한 흔적은 앞서 말한 전모례가정과 마을 어귀에 석비 하나가 전부일 뿐이다.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 위해 순교했던 정방과 멸구자, 그리고 역사의 기록에 뚜렷이 남아있는 아도화상의 흔적도 사라진지 오래다. 다행인 것은 아도화상이 길렀다는 소와 양이 도개면 내 양천골과 소천골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전모례가정 밑바닥에는 두꺼운 나무판자가 깔려있는데 신기한 것은 1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나무판자가 썩지 않고 그대로라고 전한다. 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최근 몇 해 전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전모례가정에서 물을 길어다 먹고 1년에 두 번씩 물을 뺐다. 그런데 바닥까지 긁어 청소해도 어느새 금세 물이 가득 차 올랐다고 한다. 고구려 스님들이 순교와 목숨을 건 전법의 역사를 끊임없이 샘솟는 샘물이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구미=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482호 / 2019년 3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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