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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법성게’ 제19구 : 능입해인삼매중(能入海印三昧中)

기자명 해주 스님

보리심이 중생마음 다 담아도 일체는 그 자체로 정각 보리심

해인이란 바다에 도장 찍듯이
일체가 비치는 비유 따른 것

화엄경, 해인삼매로 이뤄지고
해인삼매 속에서 화엄경 설해 

해인은 보리심의 큰 바다로
무분별·무공용의 무심 돈현

바닷물에는 분별이 없으나
사물의 모양 따라 나타내듯

​​​​​​​부처님께서 보리심해인으로
삼세간 펼치는 것이 이타행

‘법성게’ 제19구인 “능입해인삼매중(能入海印三昧中)”은 그 다음 세 구절을 포함하여 이타행을 밝힌 것이다. 

능입(能入)은 능인(能仁 또는 能人)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능인(能仁)은 석가모니불의 의미이고, 능인(能人)은 ‘교화하시는 분(能化之人)’으로서 부처님을 뜻하니, 이 두 가지 경우는 다 “부처님의 해인삼매 가운데서”로 번역된다. 여기서는 능입을 택하여 “능히 해인삼매에 들어가서”로 번역한다. 해인삼매는 물론 부처님의 삼매이다. 

의상 스님은 이 해인삼매를 읊은 구절을 포함하여 ‘법성게’ 전체와 ‘법계도인’을 합한 ‘반시’ 자체를 해인삼매와 다음과 같이 연결시키고 있다.  

“도인(‘반시’)에 의거한 것은 석가여래의 가르침의 그물에 포섭되는 세 가지 세간이 해인삼매로부터 번다하게 나타난 것임을 표현하려고 한 까닭이다.” 

 ‘화엄경’ 교설 자체가 해인삼매에 의해 이루어졌고 지금도 비로자나불이 해인삼매 속에서 ‘화엄경’을 설하고 계신다고 한다. ‘약찬게’에서도 화엄의 전법륜이 해인삼매의 힘 때문이라고 한다.(根本華嚴轉法輪 海印三昧勢力故) 

의상 스님이 ‘반시’로 보이고 있는 화엄법계의 세 가지 세간도 해인삼매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반시’ 그림에 대한 설명에서 이미 해인삼매에 대해 언급한 바 있으나, 이제 이타행을 펼치는 자리에서 한 번 더 해인삼매의 경계를 상기해 보자. ‘법성게’에서 읊은 해인삼매에 대한 의상 스님의 설명을 다시 인용해본다.

“둘째는 이타행 중에 나아감이니, ‘해인(海印)’이란 비유를 들어서 이름 붙인 것이다. 무엇인가? 큰 바다는 매우 깊고 밝고 맑아 밑바닥까지 비치니, 천제(天帝)가 아수라와 싸울 때 모든 병사들과 모든 무기들이 그 가운데에 나타나 분명히 드러남이 마치 글자를 도장 찍은 것과 같기 때문에 ‘해인’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 능히 삼매에 들어가는 것 또한 이와 같다. 법성을 완전히 증득하여 밑바닥이 없어서 끝까지 청정하고 맑고 밝아서 세 가지 세간이 그 가운데 나타나므로 이름 하여 ‘해인’이라고 한다.”

해인이란 잔잔한 큰 바다에 도장을 찍은 듯 온갖 물상이 다 비치는 비유에 의한 이름이다. 해인삼매는 법성을 완전히 증득한 증분 불과의 삼매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니, ‘화엄경’에서 이타행은 ‘초발심시변정각’ 이후에 펼쳐지는 오후(悟後)의 정각행 임을 말해준다.

경주 석굴암 본존불상.

이러한 설명이 가능한 경증으로서 ‘화엄경’ 현수품과 여래출현품의 교설 또한 다시 주목해보자.   

“혹 어떤 찰토에 부처님이 안계시면 거기에 시현하여 정각을 이루며, 혹 어떤 국토에서 불법을 알지 못하면 거기서 묘한 법장을 연설한다. / 분별도 없고 공용도 없으나 한 생각 동안에 시방에 두루 하되, 달빛 그림자가 두루 하지 않음이 없는 것 같이 한량없는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한다. / 저 시방세계 가운데서 생각생각 시현하여 불도를 이루고, 바른 법륜을 굴리고 적멸에 들며 내지 사리를 널리 분포한다. / 혹 성문과 독각의 도를 나타내고 혹 성불하여 널리 장엄함을 나타내니, 이같이 삼승교를 열어서 널리 한량없는 겁 동안 중생을 제도한다. / 혹은 동남동녀의 모습과 천신과 용과 그리고 아수라와 내지 마후라가 등을 나타내어 그들이 즐기는 바를 따라서 다 보게 한다. / 중생의 형상이 각각 다르고 행업과 음성 또한 한량없는데, 이 같은 일체를 다 능히 나타내니 해인삼매의 위신력이다.”(‘현수품’)

“불자여! 비유하면 큰 바다가 널리 능히 사천하중 일체 중생의 색신과 형상을 도장 찍듯 나타내므로 한가지로 큰 바다라고 말한다. 제불 보리도 또한 이와 같아서 널리 일체 중생의 마음 생각과 근기와 성품과 욕락을 나타내되 나타나는 바가 없으므로 이름 하여 제불보리라 한다.” (‘여래출현품’)

“바다가 중생의 몸을 도장 찍듯 나타내니 이로써 큰 바다라고 말한다. 보리도 널리 모든 마음 움직임을 도장 찍듯 나타내니 이 까닭에 이름 하여 바른 깨달음이라고 한다.“(如海印現眾生身 以此說其為大海 菩提普印諸心行 是故說名為正覺) (‘여래출현품’)

혹 부처님이 안계시거나 법이 유통되지 않으면 그곳에 시현하여 정각 이루고 불법을 설하며, 중생들을 위하여 한량없는 방편으로 모든 몸을 나타내어 교화하는 일 등이 다 해인삼매의 힘에 의해서 임을 찬탄한 것이다. 

그리고 해인이 보리이고 정각인 그 바다는 부처님 정각의 보리심[佛正覺菩提心] 바다이며, 해인은 무분별·무공용의 무심 돈현(頓現)임을 알 수 있다. 

해인삼매에 의한 삼종세간 역시 기세간해인·중생해인·지정각해인으로서 모두 다 해인이다. 큰 바다가 일체를 다 도장 찍듯 나타내나 실은 바닷물뿐이듯이 보리심이 중생의 마음 움직임을 다 담아내나 일체가 부처님의 정각 보리심 자체이다. 

‘법계도주’에서 이타의 해인에 대해서 ‘염부의 바다 가운데 있는 염부의 일체가 오직 하나의 큰 바다일 따름’이라고 한 것도 이 경계에 다름 아니라 하겠다. 

“능입해인삼매중”을 이타행에 배대한 것에 대해서 삼대기에서는 다양하게 풀이한다. 즉 해인삼매는 자리와 이타를 구족한다. 그리고 증분과 교분에 다 통하며, 선정의 안이므로 모습이 숨어있고, 스스로 증득하여 말을 여읜 것인데, 어째서 이타행이라 설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법융기’에서는 해인 가운데 자리와 이타를 구족하였으니, 세 가지 세간의 법에 섭입하는 것이 자리이고 세 가지 세간의 법을 나타내는 것이 이타라고 한다. 그러나 일승 가운데는 이타가 없다고도 한다. 왜냐면 교화되는 중생이 바로 스스로의 안으로 증득한 오해(五海) 가운데 중생이기 때문에 근기에 응하여 일어나고, 교화하는 가르침도 스스로의 해인정(海印定)으로부터 일어난 바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기’에서는 해인삼매가 스스로의 증득[自證]이어서 말을 여읜 것인데 이타(利他)의 처음에서 밝히는 까닭은, 이타의 연기는 별도의 자체가 없이 다만 열 부처님의 안으로 증득하신 해인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기’에서는 해인이 증분과 교분에 다 통하기 때문에 교분에서 밝힐 뿐이며, 동교와 별교를 갖추고 있어서 여의의 가르침을 설하니, 한 줄의 붉은 도인을 기준으로 하면 별교이나 도인의 굴곡을 기준으로 하면 동교 중의 근기를 따른다고 한다.

의상 스님이 해인에 대해서 “구경에 청정하고 담연 명백하여 세 가지 세간이 그 가운데 나타난다”라고 하였으니, 해인삼매에 들어가 세 가지 세간을 번출하여 이타행을 펼치는 것이다. 

이러한 해인삼매를 삼대기는 또 다섯 가지 해인[五重海印]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앞에서 본 바처럼 ‘대기’에서는 일승법계도의 제목과 법성게 210자를 거듭 오중해인으로 설명하고, 법성게 가운데 이타행 4구를 또 다시 오중해인으로 설명하고 있다. 세 번 거듭 오중해인을 통해 해인의 일체를 상이 없는 망상해인(忘像海印)으로 포섭하고 있는 것이다.  

“능입해인삼매중”도 해인삼매가 일체 세간을 다 나타내 보이는데 실은 세간의 어떤 상도 다 여의어 없다고 해서, 그림자를 여읜 영리해인(影離海印)이라 명명하니 망상해인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은 해인삼매 역시 의상 스님이 천명한 법성의 도리와 상통함을 볼 수 있다. 의상 스님의 4세 법손인 숭업 스님은 해인거울에 나타나는 모습이 곧 ‘나’의 오척되는 몸으로서 이 몸이 삼세간을 갖추어 달리 머무는 곳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고[無住], 머무름이 없으니 움직임도 없다.[不動] 움직임이 없고 곁이 없는[無側] 나의 몸이 나타나는 모습이 바로 곧 해인 거울의 체이기 때문에, 해인 거울을 얻을 때 모습이 없어지지 않는다. 무주이고 부동인 법성신이 해인삼매에 의해 십불로 출현한다. ‘일승법계도’에서 ‘이법[理]에 의거하고 가르침[敎]에 근거하여 반시를 지었다’고 밝힌 그 이와 교를, ‘법융기’에서는 각각 망상해인과 현상해인으로 설명한다. 이법[理]은 부처님의 마음 가운데 삼세간을 증득하시지만 부처님의 증득하시는 마음은 하나로서 분별이 없기 때문에 망상해인이고, 가르침[敎]은 부처님이 증득하신 삼세간의 법이 각자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으며 성(性)이 중도에 있음을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현상해인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물은 분별이 없으나 모든 사물을 그 모양의 차별을 따라서 다 나타내듯이,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보리심해인의 그 마음으로 연 따라 자재하게 삼세간을 펼치는 것이 바로 이타행임을 알 수 있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82호 / 2019년 3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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