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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4대 총무원장 서리 혜정 스님-하

‘조계사‧개운사’ 분규 속에서도 승가대학 설립 원력 세워

서옹 스님, 종회 해산 명령으로
중앙종회 측과 강대강 대결 구도
종단재건회의 중재로 안정찾지만
서울고법 가처분결정에 다시 혼란
조계사·개운사 총무원으로 양분

1978년 7월 서옹 스님 사퇴로
총무원장 혜정 스님도 물러나

‘대한불교(1977년 11월20일자)’에 따르면 조계종 종정 서옹 스님은 11월11일 비상종령 37호를 공포하고 중앙종회 해산을 명령했다. “본분을 망각하고 권위를 상실한 종회를 그대로 두고서는 현 사태를 해결할 길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신 “종단원로 및 중진 15~21명으로 중흥종회를 구성해 종회의 기능을 대신하겠다”고 밝혔다. 중앙종회의 ‘종정불신임 결의’에 맞선 대응이었다. 

중앙종회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월주, 설조 스님 등 20여명의 종회의원들은 ‘서옹 종정 등 집행부 간부 직무집행정지 및 직무대행자 선임’을 구하는 가처분을 법원에 신청했다. 11월12일 통도사에서 제50차 정기종회도 열어 서옹 스님이 공포한 종령 37호가 무효임을 결의했다. 9인의 수권위원회를 구성해 종헌개정안을 성안하고, 11월13일 ‘총무원장 중심제’에 기초한 종헌개정을 추진했다.

이날 중앙종회에서 발의된 종헌개정안은 종정의 권한을 축소하고, 총무원장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 골자였다. 종정은 종단을 대표하지만, 그 대표권 행사는 총무원장이 하며 종무행정의 통리권도 총무원장에게 부여했다. 사실상 종정은 상징적인 위치에만 머무르도록 하겠다는 의미였다. 총무원장은 중앙종회에서 선출하고, 임기도 4년(중임 가능)으로 정해 안정적으로 종무행정을 펼칠 수 있도록 했다. 중앙종회의 견제권한도 강화했다. 종정이 직무상 중대한 과오가 있을 경우 재적 과반수의 동의로 추대를 취소할 수 있으며, 총무원장과 각 부장에 대한 불신임권을 갖도록 했다. 중앙종회는 이날 이 같은 종헌개정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그러나 총무원 집행부 측은 중앙종회의 결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양측의 날선 힘겨루기는 강대강으로 맞서 막다른 골목으로 향해 갔다. 

이런 가운데 서울중앙지법은 1977년 11월29일 중앙종회의원 20여명이 제기한 ‘종정 등 직무정지’ 가처분에 대해 “신청인의 정당한 이유가 없다”며 ‘기각’을 결정했다. 사법부의 판결은 종정스님을 비롯한 총무원 집행부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였다. 총무원장 혜정 스님은 12월3일 기자회견을 열고 “사법부의 결정은 무사 공평한 판결이었다”며 환영입장을 드러냈다. 스님은 “앞으로 화합단결로 불교중흥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소송을 제기한 측에 대해서도 “불교중흥을 위해 함께 일을 하겠다고 하면 언제나 환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중앙종회 측은 1심 결정에 불복해 서울고등법원에 항고하면서 법적 대응을 이어갔다. 

양측의 대립이 법적공방으로 이어지고, 그럴수록 세간의 비판도 커졌다. 언론은 조계종 상황을 분규로 규정했다. 그러자 이후락 전국신도회장(중앙신도회 전신)은 사태수습을 위해 중재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이후락 회장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박정희 정권의 실세로 평가됐다. 그랬기에 그의 중재선언은 사태해결의 실마리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이 회장은 12월9일 운허·고암·대의·월산·월하·구산·석주·탄허·경산·영암 스님 등 원로 10여명과 회동을 갖고, 원로 중심으로 종단 혼란 수습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 회장은 12월23일 원로들과 재차 만나 종단사태 해결을 위한 원로회의를 공식 결성했다. 총무원과 중앙종회 측과도 만나 중재안 마련을 위한 협의를 진행했다. 이런 노력 끝에 중앙종회의 타협안을 먼저 이끌어냈다. 가처분 패소로 궁지에 몰린 중앙종회로서는 이 회장과 원로스님들의 중재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원로회의를 통해 집행부 퇴진을 요구하는 것이 사태해결에 효과적이라는 판단이었을 수 있었다. 

중앙종회는 통도사에서 시작된 50차 정기종회의 회기를 연장해 12월23일 개운사에서 회의를 속개하고 ‘총무원 집행부 퇴진’ ‘중앙종회 권한 원로회의에 이양’ 등 종단수습을 위한 6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원로회의에 전달했다.

원로회의는 이를 종정스님에게 전달했다. 종정스님 측의 결단을 촉구하는 의미였다. 결국 서옹 스님은 1978년 1월6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원로회의에 “종정의 모든 권한을 원로회의에 위임함과 동시에 종정자리에서 물러나겠다”며 1월1일자로 작성된 사퇴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원로회의는 종정의 권한만 이양받기로 하고 종정사직서는 반려하기로 뜻을 모았다. 
종정과 중앙종회의 권한을 이양 받은 원로회의는 이날 ‘종단재건회의’를 구성하고 1개월 내에 종헌종법을 제정해 종단을 정상화시키기로 결의했다. 이를 위해 우선 총무원 집행부를 개편해 새 총무원장에 석주 스님을 선임하고, 총무원장 혜정 스님을 포교원장에 임명했다. 

종단재건회의는 종헌개정의 기본방향도 마련하고 △종명을 ‘대한불교’로 개편 △중앙종회에 재가불자 참여 △종단 집행부 기능 강화 등을 종헌개정안에 담기로 했다. 이는 조계종 운영에 있어 큰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계종을 해체하고 종명을 ‘대한불교’로 변경하는 것을 두고 거센 반발이 이어졌다. “군소종단의 흡수를 위해 종명개정이 필요하다”는 이후락 회장의 주장에 따라 제안된 내용이었지만 종단재건회의 내에서도 “조계종의 정체성을 훼손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결국 종명변경은 수용되지 않았다. 

혜정 스님은 평생 청빈한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후학들에게 지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법주사 금강계단보살계수계산림.

종단재건회의의 종헌개정 추진은 빠르게 진행됐다. 종단재건회의는 1월21일 종헌종법개정위가 마련한 127조의 새 종헌을 확정했다. 개정안은 총무원장 중심제로의 전환이었다. 종정은 상징적 존재로 교단을 대표하고, 대표권행사와 종무행정의 통리권은 총무원장이 갖도록 했다. 장로원을 개편한 원로회의도 신설하고, ‘종정추대·종헌개정·총무원장 불신임’에 대한 인준권을 갖도록 해 종단 최고의결기관으로서의 위상을 부여했다. 중앙종회의원은 25개 교구본사주지와 총무원 6부장을 당연직 의원, 재가불자 8명이 포함된 추천직 19명을 합쳐, 총 50인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종단재건회의는 이 같은 종헌을 바탕으로 2월15일까지 새 집행부와 중앙종회를 구성해 종단을 정상화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계종 혼란은 곧 수습국면을 맞는 듯 했다. 

그러나 1월21일 서울고등법원의 ‘종정 등 직무정지 가처분’에 대한 항고심 결정은 큰 반전을 가져왔다. ‘경향신문(1978년 1월26일자)’에 따르면 서울고법은 1심 판결과 달리 월주, 설조 스님 등 20여명의 종회의원들이 제기한 가처분 신청을 인용, 서옹 스님의 종정직무를 정지시켰다. 재판부는 “종헌종법에 명문규정이 없더라도 종정해임권은 선임기관인 중앙종회에 있다”면서 “중앙종회가 과반수 이상의 결의에 따라 종정추대를 취소한 이상 피신청인(서옹 스님)은 종정직에서 적법하게 해임된 것으로 봐야한다”고 밝혔다. 법원은 중앙종회의원들이 신청한 대로 벽암 스님을 종정직무대행자로 결정했다. 

안정을 되찾던 조계종은 다시 요동쳤다. 서옹 스님은 1월29일 법원 판결에 유감을 제기하면서 종단재건회의 측에 자신이 제출한 종정권한 위임각서를 되돌려 줄 것을 요구했다. 1월31일 담화를 발표해 “법통수호와 종단안정을 위해 종정직에 복귀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서옹 스님의 종정권한위임 번복으로 종단재건회의가 추진한 종단 수습 노력도 물거품이 됐다. 종단재건회의는 1월31일 종정과 중앙종회로부터 위임 받은 권한을 모두 되돌려주기로 결의하고 활동중단을 선언했다. 종단재건회의가 추진한 종헌개정도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서옹 스님의 종정직 복귀와 종단재건위의 활동 중단 선언은 분규로 가는 수순이었다. 중앙종회 측은 3월3일 서울 개운사에 총무원을 개설했다. 이어 3월10일 중앙종회를 열어 벽암 스님을 종정으로, 월하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했다. 이에 맞서 종정 서옹 스님은 4월10일 혜정 스님을 다시 총무원장에 임명했으며 부국장 인사도 단행했다. 이에 따라 조계종은 조계사와 개운사 총무원으로 나뉘는 분종사태를 맞았다.

양측의 갈등이 장기화되고 분종사태로까지 이어지자 원로스님들이 다시 나섰다. 영암, 석주 스님 등 원로스님들은 4월12일 문공부장관을 예방하고 종단분규 수습을 위해 정부의 개입을 요청했다. 이는 종단 내부문제에 정부가 개입하는 빌미가 됐다. 문공부 장관은 4월20일 기자회견을 열어 원로들의 제안에 따라 종단사태 해결을 위해 중재에 나서겠다고 공식 밝혔다. 문공부의 중재안은 “분종사태의 당사자인 종정과 종회가 동시퇴진하고 원로회의에 종권을 위임, 새 종헌을 통해 집행부를 구성”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원로회의는 5월6일 48명의 종회의원을 새로 선출했다. 48명의 종회의원들은 이날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모임을 열고 종정에 고암, 총무원장에 월하 스님을 선출했다. 이에 따라 조계종 분규는 봉합될 듯 보였다.

그러나 서옹 스님 측은 다시 반발했다. 양측 모두 퇴진하기로 했던 합의와 달리 새로 구성된 종회의원 48명 가운데 이두‧도문‧월남‧무진장 스님을 제외하고 모두 개운사 측 스님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서옹 스님은 5월10일 성명을 발표하고 “숭고한 법통을 수호하고 불교중흥의 새 역사를 이룩하고자 종정권한이 미치는 한 직접 행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공부의 중재를 거부하고 종정직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의미였다. 

개운사 측은 문공부 중재를 바탕으로 조계사 내 총무원 건물에 대한 명도소송을 진행하는 등 실력행사에 착수했다. 결국 양측은 7월27일 충돌했다. ‘경향신문(1978년 7월28일자)’에 따르면 7월27일 오후 개운사 측은 법원의 조계종 동산인도 가처분 결정에 따라 집달리 등을 동원해 강제집행에 착수했고, 이에 맞선 조계사 측과 물리적 충돌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투석전이 벌어졌고, 10여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조계종은 세간으로부터 따가운 비판을 받았다. 비판은 종정 서옹 스님을 비롯한 집행부에 집중됐다. 여론은 개운사 측으로 향하고 있었다. 결국 서옹 스님은 7월31일 고암 스님에게 종권을 이양하고 사퇴를 선언했다. 이에 따라 4월10일 다시 조계종 총무원장에 올랐던 혜정 스님도 3개월 만에 서옹 스님과 함께 물러났다. 마지막까지 종정 서옹 스님을 중심으로 화합종단을 이끌려했던 혜정 스님의 노력도 끝내 무산됐다. 그러나 훗날 개운사 측이 정통성을 얻으면서 혜정 스님의 두 번째 총무원장 기록은 조계종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혜정 스님은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6대, 7대, 8대 종회의원을 역임하며 숨 가쁜 조계종사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1988년 8대 중앙종회의원 끝으로 종단의 중심부에서 물러나 계율학 보급과 후학양성에 매진했다. 체계적인 승가교육체계를 마련하는 것은 스님의 평생 원력이었다. 조계사‧개운사파로 나뉘어 대립하는 과정에서도 스님이 승가대학 설립에 열정을 쏟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스님은 1992년 법주사에 총지선원을 세워 율주로서 율학보급에 앞장섰으며 법계위원장과 전계대화상을 맡아 후학들에게 지계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2003년 원로의원에 추대된 이후에도 홀로 바랑하나를 메고 대중교통을 타고 다녔던 스님의 일화는 스스로에게도 얼마나 엄격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랬던 스님은 2011년 2월22일 괴산 각연사에서 법납 59세, 세납 79세로 세연을 마감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83호 / 2019년 4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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