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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불경의 동화적 상상력

기자명 김정빈

수행은 우리를 소유·생존욕 넘어 드넓은 공의 마음으로 넓혀준다

베나레스에 농사 짓던 형제 
벽지불에 사탕수수 공양 공덕
형은 다음생에 출가해 아라한
동생은 재물 덧없음 경험하고
한 생 더 지나서 아라한 성취

돈은 생존·게임 위한 것 구분
생존 위한 돈은 탐심만 키워
수행 할 때 ‘물질 족쇄’ 탈피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은 세가지 위격으로 분별된다. 첫번째 부처님은 무상정등각자, 두번째 부처님은 벽지불, 세번째 부처님은 아라한이다. 세 부처님은 똑같은 내용의 깨달음을 성취하지만 법을 펴실 때의 범주와 기간이 다르다. 그것은 그분들이 지은 전생 공덕에 따라 결정된다.

무상정등각자로서의 부처님은 까마득한 과거 전생부터 어마어마한 공덕을 지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은 오랜 시간에 걸쳐 전인류에게 전파된다. 그러나 벽지불의 가르침은 짧은 기간 동안 작은 지역에서만 전파되는데,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 사성제와 연기법을 깨달으셨다는 점은 무상정등각자 부처님과 같다.

아라한은 앞의 두 분 부처님이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음을 성취한 것과는 달리 무상정등각자 부처님의 지도를 받아 깨달음을 성취한 성자이다. 부처님이라는 말 자체가 ‘깨달음을 성취한 분’을 뜻하므로 아라한 또한 부처님이다

아주 오래전 베나레스에 두 형제가 사탕수수를 경작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동생은 사탕수수 밭에 나가 사탕수수를 베어 집으로 오다가 벽지불을 뵙게 되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사탕수수 물을 벽지불의 발우에 흘려 드려 공양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형 몫으로 벤 사탕수수까지 공양했다. 공양을 올리면서 동생은 이 공덕으로 천상세계와 인간세계에서 영광을 누린 다음 벽지불이 깨달으신 경지를 성취하게 되기를 기원했다. 그러자 벽지불은 “그렇게 되기를!”하며 축원해 주셨다. 동생은 벽지불이 공양을 마치기를 기다려 형의 몫으로 벤 사탕수수 물을 공양올렸다.

그 공덕으로 그들 형제는 다음 생에 천상에 났다. 긴 시간이 흘러 위파시 부처님 때, 그들은 천상에서 죽어 한 도시의 귀족 가문에서 형과 동생으로 태어났다. 부모들은 형에게 세나, 동생에게는 아파라지타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두 사람이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들은 부처님이 출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먼저 형 세나가 부처님께 나아가 법문을 들은 다음 크게 감동하여 출가하여 비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동생에게 “이 집에 있는 재산은 이제부터 모두 네 것이다”라고 말한 다음 출가하였고 머지않아 아라한과를 성취했다.

동생 아파라지타는 가정에 머물며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에 만족하며 살았다. 신심이 대단했던 그는 부처님을 위해 정사를 지어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집안에 보석이 너무 많아 간수할 창고가 부족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정사를 지을 때 온갖 보석을 진흙이나 모래처럼 이용했다. 그는 그 보석을 이용하여 찬란하기 그지없는 정사를 지었다.

그가 지은 정사의 바닥에는 온갖 보석들이 흩어져 있었다. 부처님께서 그 정사에 머물러 설법을 하실 때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뉘었다. 부처님의 법문에 집중하느라 보석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런 이들은 소수였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다면서 보석들을 집어 주머니에 넣어 집으로 가져갔다.

부처님께 정사를 지어 올린 공덕으로 그는 다음 생에 코살라 국의 수도 사왓티에서 왕을 돕는 재정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온 도시가 환한 불빛에 휩싸였는데, 그 때문에 그의 이름은 빛, 즉 조티카라고 지어졌다.

조티카는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그가 큰 부자가 된 것은 그가 지은 전생 공덕의 힘으로 무엇을 하든 일이 술술 풀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집이 갖가지 보석으로 덮여 있는 것을 안 아자타삿투 왕이 그의 집을 탐냈다. 하지만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조티카의 집에 들어갔지만 왕은 조티카의 재산에 손도 대지 못했다. 천신들이 그의 재산을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재산이 왕의 탐심을 일으키는 것을 본 조티카는 삶에 염증을 느꼈다. 그는 부처님께 출가하여 비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고, 부처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셨다. 조티카 비구는 얼마 안 있어 높은 경지를 성취했다. 어느 때 비구들이 조티카 비구에게 전에 갖고 있던 보석으로 된 집과 거느리던 여러 명의 아내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지 않은지를 물었다. 

이에 조티카 비구는 전혀 미련이 남아 있지 않다고 대답했는데, 이는 자신이 아라한과를 성취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비구들이 이 일을 부처님께 고하자 부처님께서 그의 깨달음을 인가하여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그는 세상에 대한 갈애를 버리고 / 가정을 떠나 출가수행자가 되었다. / 갈애와 존재욕을 모두 파괴한 사람, / 여래는 그를 아라한이라 부른다.”

재산에 대한 욕심이 비단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돈, 돈, 돈. 재물, 재물, 재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집중하고 또 집중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점이 있다. 이것이 아
니고서는 기본적인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생존, 생존, 생존. 생존은 생명체에게 제일차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이다.

문제는 생존의 필요에서 시작된 돈에 대한 추구에 관성이 붙는다는 데 있다. 돈은 ‘생존’을 위한 돈과 ‘게임’을 위한 돈으로 변별된다. 생명체로서의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서는 한 달에 2~300만 원이면 충분하다. 그 이상의 돈은 게임을 위한 돈이다. 게임은 해도 되지만 안 해도 된다. 하지만 돈을 추구하던 관성은 생존을 위한 돈에서 만족하지 않고 게임에 몰두하게 한다.

불교 경전에는 돈에 대한 비판, 욕심에 대한 경계, 탐욕에 대한 질타가 무수히 등장한다. 또 돈을 버린 이들, 재물을 희사한 이들, 탐욕을 파괴한 이들에 대한 찬양 또한 무수히 등장한다. 조티카 비구의 경우는 그 무수한 사례의 작은 단편에 불과하다.

우리 또한 조티카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수행이다. 수행의 힘으로써 게임을 위한 재물을 넘어설 때 비로소 물질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불제자는 거기에서도 더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는 생존을 위한 재물까지 넘어선다.

그것이 깨달음이며, 그 깨달음에 이른 이를 아라한이라 한다. 아라한이 되는 것, 게임을 위한 소유는 물론이고 생존욕이라는 소유까지도 파괴하는 것, 불교 수행은 그 지점에서 공(空), ‘하늘을 나는 새가 자취를 남기지 않는’(법구경) 드넓은 창공의 마음으로 확장되어 끝난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83호 / 2019년 4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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