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⑳ 진흥왕의 순수비와 황룡사의 장육존상-중
50.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⑳ 진흥왕의 순수비와 황룡사의 장육존상-중
  • 최병헌
  • 승인 2019.04.02 13:32
  • 호수 148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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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육존상 조성, 인도 아육왕과 같은 전륜성왕이라는 자부심

불교연호인 ‘홍제’로 변경 뒤 
불교 관련 사실들만을 기록

신라 호국불교의 상징물인
장육존상도 이 시기에 조성

황룡사 완공된 지 5년 뒤에
장육존상 조성은 특이한 일

1탑1금당서 1탑3금당 변화
기존 불상도 옮겨 봉안 의미

​​​​​​​흥륜사에 미륵 조성됐다면
황룡사엔 석가불상이 맞아
황룡사 삼존불상 지대석.
황룡사 삼존불상 지대석.

제24대 진흥왕 29년(568)에 대창(大昌, 또는 太昌)으로 연호를 변경하고, 북쪽 국경지역을 순행하면서 북한산·황초령·마운령 등 3곳에 순수비를 세워서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표방하였다. 진흥왕은 순수비에서 정복군주로서의 정통성, 유교적인 왕도사상과 새로운 사회윤리관을 제시하였다. 앞선 시기인 개국(開國) 연간에 이룬 영역확장의 업적을 바탕으로 위대한 정복군주로서의 위상을 유교의 이상적 제왕상으로 포장하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대창 연호를 사용한 4년간의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의 기사 가운데 대내적인 사실은 대창 원년 10월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설치하고, 비열홀주를 폐하고 달홀주를 설치하여 북쪽 국경지역의 지방통치조직을 재정비했다는 것뿐이다. 그 외의 기사 3건은 모두 남조왕조인 진(陳)에 3차례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사실이 전부이다. 

그런데 진흥왕은 4년만인 즉위 33년(572)에 연호를 다시 홍제(鴻濟)로 바꾸었다. 홍제는 널리 제도한다는 불교적인 의미를 가진 것인데, 왜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추구하던 시기의 대창을 버리고 갑자기 불교적인 의미를 가진 홍제로 바꾸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3년조에는 3월에 왕태자 동륜(銅輪)이 사망하고, 10월20일에 전쟁에서 죽은 사졸을 위하여 지방의 사찰에서 팔관연회(八關筵會)를 열어 7일만에 마쳤다는 기사가 대내적인 사실의 전부이다. 팔관연회는 재가신도가 하루밤 하루낮 동안 8가지의 계율을 지키는 법회인데, 중국의 남북조에서 행해지던 것이며, 고구려에서 망명해온 혜량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년 뒤(574)에 황룡사의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조성하였으며, 다음해 장육존상이 눈물을 흘린지 1년만에 진흥왕이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적기하였다. 그 밖의 사실은 북제에의 사신 파견과 가뭄의 기상 변화, 그리고 화랑도의 설치 등 3건의 기사가 전부이다. 이로써 홍제로 연호를 바꾼 뒤 4년간의 내용은 불교 관련 사실이 거의 전부였음을 알 수 있는데, 불교 관련 기록이 전연 없던 대창 연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홍제로의 연호 변경은 이들 사실들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는데, 특히 장육존상의 조성은 이 기간의 불교 관련 사건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적인 것이었다. 진흥왕대의 장육존상은 선덕여왕대의 구층목탑과 아울러 신라 호국불교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황룡사의 장육존상은 오늘날까지 중금당지에 남아있는 거대한 대석을 통해 웅장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대석에는 불상의 두 발을 끼웠던 부분과 광배를 꽂았던 자리까지 남아있다. 장육존상은 일장육척(一丈六尺)이라는 의미로서 높이 16자의 입상을 말한다. 신라 당시 척도인 남조척(南朝尺, 일명 唐小尺 : 24.5cm)이나 당척(唐尺, 일명 唐大尺 : 30cm)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불상의 높이는 3.92m, 혹은 4.8m 전후로 추정된다. 그리고 무게는 구리 3만5700근, 황금 1만198푼으로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일치한다. 장육존상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형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었다. 첫째 중국 사천성 성도에서 전해오는 남북조시대 아육왕상들과 같이 인도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이국적인 불상, 둘째 6세기 북위 내지 동서위 양식의 불상, 셋째 인도식 아육왕상이 중국적으로 토착화된 형식의 불상 등의 여러 견해이다. 

원래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에 공사를 시작하여 27년(566)에 일단 공사를 마쳤고, 이어 30년(569)에 주위의 담장 공사까지 마침으로써 완성하였다. 그런데 준공된 지 5년 뒤인 35년(574)에 주불인 장육존상을 새로 조성하고, 진평왕 5년(584)에 금당도 다시 건축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학자들 사이에는 진흥왕 30년의 준공 때에는 불상을 조성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처음에 조성된 불상을 폐기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35년에 장육존상으로 새로 조성하여 봉안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주위 담장 공사까지 마치면서 본존불상을 조성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고, 또한 처음에 조성한 불상을 폐기하였다는 것도 신성한 예배대상인 점을 고려하면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그러면 결국 장육존상을 새로 조성하고, 금당을 다시 건축할 때에 이전의 불상은 일시 다른 곳(동축사)으로 옮겨 봉안하였다가 뒤에 다시 황룡사로 옮겨 다른 불전(좌우 금당 가운데 한 곳)에 봉안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순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1976〜1983년의 발굴조사 결과 초창가람은 1탑1금당식이었으나, 이후의 중창가람은 1탑3금당식의 병렬형인 것으로 밝혀짐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이 가능하게 되었다. 즉 장육존상을 봉안하기 위해 진평왕 6년(584) 새로운 금당을 완공할 때에 1금당의 초창가람과 다르게 3금당으로 조성하여 중금당에는 장육존상, 좌우의 금당 가운데 한쪽에 초창 때의 불상을 봉안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전후 불상 모두 석가3존상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 장륙3존불상은 9층목탑과 함께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골의 병란으로 불타 없어지고 작은 석가상(최초의 불상)만이 남았었음을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증언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육존상의 조성 경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황룡사 장육존상조에서 연기설화의 형태로 전해주는데, ‘사중기(寺中記)’·‘별본(別本)’·‘별기(別記)’ 등 여러 종류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승자료에 따라 설화 내용은 다소 다른 사실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에 ‘삼국유사’ 장육존상조의 내용을 자료별로 구분하여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 신라 제24대 진흥왕 즉위 14년 계유(癸酉, 553) 2월에 궁궐을 용궁(龍宮)의 남쪽에 지으려고 하는데, 황룡이 그곳에 나타났으므로 이를 고쳐서 절로 삼고 황룡사라고 하였다. 기축년(己丑年, 569)에 주위의 담을 쌓고 17년 만에 겨우 완성하였다. (그뒤) 얼마 안되어 바다 남쪽에 큰 배 한 척이 나타나서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 지금의 울주 곡포)에 와 닿았다. 검사해 보니 공문(牒文)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서천축(西天竺)의 아육왕(阿育王)이 황철(黃鐵,구리) 5만7천근과 황금 3만푼을 모아서 석가3존상을 주조하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축원하기를, ‘부디 인연 있는 국토에 가서 장육존상을 이루소서’ 라 하고, 아울러 한 부처와 두 보살의 상도 실었다.” 고을 관리가 문서를 갖춰 국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은) 그 고을 성 동쪽의 높고 깨끗한 땅을 골라 동축사(東竺寺)를 세워 세 불상을 편안히 모시게 하고, 그 금과 황철을 서울로 수송하여 대건(大建) 6년 갑오(甲午, 574) 3월(寺中記에는 癸巳, 573년 10월 17일이라고 하였다)에 장육존상을 주조했는데, 단번에 이루어졌다. 그 무게는 3만7천7근으로 황금 1만1백98푼이 들었으며, 두 보살에는 철 1만2천근과 황금 1만1백36푼이 들었다. 황룡사에 모셨더니 이듬해에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 자나 젖었다. 대왕이 세상을 떠날 조짐이었다.  

(2) 별본에 말하기를, 아육왕은 인도 대향화국(大香華國)에서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뒤 1백 년만에 태어나서 부처님의 진신(眞身)에 공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금과 철 약간 근을 모아 3번이나 불상을 주조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중략) 아육왕은 (태자의) 말을 옳게 여겨 (금과 철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남염부제(南閻浮提) 16대국(大國), 5백중국(中國), 10천소국(小國), 8만취학(聚落)을 두루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모두 주조에 성공하지 못했다. 최후로 신라국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文仍林)에서 그것을 주조하여 불상을 완성하니 모습이 다 갖추어졌다. 아육을 번역하면 무우(無憂)라고 한다. 

(3) 뒤에 대덕 자장(慈藏)이 서방으로 유학하여 오대산에 이르렀더니, 문수보살이 현신(現身)으로 감응하여 비결을 주며 부탁하기를, ‘너희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불과 가섭불이 강연한 땅이므로 연좌석(宴坐石)이 아직도 있다. 그러므로 인도의 무우왕(無憂王)이 황철 약간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1천3백여년이나 지난 뒤에 너희 나라에 이르러 (불상이) 이루어지고 그 절에 모셔졌던 것이니, 대개 위덕의 인연이 그렇게 시킨 것이다’ 라고 하였다. 뷸상이 이루어진 뒤 동축사의 삼존불상도 이 절로 옮겨 봉안하였다.

(4) 절의 기록에는 ‘진평왕 5년 갑진(甲辰, 584)에 금당이 조성되었으며, 선덕왕 때 절의 첫째 주지는 진골 환희(歡喜)스님이고, 제2대 주지는 자장 국통(國統), 다음은 혜훈(惠訓) 국통, 다음은 상률(廂律)스님이다’ 고 하였다. 이제 병화(몽골침입)가 있은 뒤 큰 불상과 두 보살상은 모두 녹아 없어지고, 작은 석가상만이 아직 남아 있다. 

이상에서 인용한 ‘삼국유사’ 장육존상조의 내용은 역사적인 사실과 설화적인 허구가 혼합되어 있어 구별이 요구되는데, 설화적인 내용도 허구라고 하여 전연 의미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니된다. 이 설화는 왕권강화와 국가발전, 특히 영역확장과 불교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달성한 진흥왕의 고양된 의식, 그리고 서쪽의 불교 나라인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정복군주인 아육왕(阿育王, Aśoka)에 견주는 위대한 제왕으로서의 자부심이 연기설화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진흥왕이 새로 조성한 장육존상 앞에서 불교의 이상적인 제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rājan) 같은 위대한 제왕이 되기를 염원하였던 사실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진흥왕 5년(544) 완성된 신라 최초의 사찰이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로 사액되었는데, 이 사찰의 이름 속의 ‘륜(輪)’은 전륜성왕의 금륜(金輪)이나 법왕(法王, 부처)의 법륜(法輪)을 가리킨다. 따라서 흥륜은 그러한 륜을 일으켰다는 뜻이지만, 이 사찰에 미륵불이 주존으로 봉안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륜은 전륜성왕의 금륜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흥륜사는 전륜성왕과 미륵신앙을 결합한 정치적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건립된 사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미래의 미륵불이 있기 위해서는 그 앞에 과거의 석가불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새로 완공한 황룡사에는 주존으로 거대한 석가불상을 조성하였던 것이며, 새로운 전륜성왕 출현의 염원이 아육왕과의 인연을 강조하는 연기설화를 구성하였던 것으로 본다. 인도에서 출생하여 최초의 통일제국을 건설하고 불교를 크게 일으킴으로써 아육왕의 8만4천탑의 설화와 함께 아육왕불상의 전설을 전승케 한 아육왕을 철륜성왕(鐵輪聖王, 무력전륜성왕)의 틀 속에 끼워 맞추려는 전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83호 / 2019년 4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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