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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고시위원장 지안 스님

“자각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하는 게 수행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의식주 고급화 됐지만 현대인들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해
스스로 마음 밝히는 게 곧 불교
자각 성취하면 번뇌도 줄어들어
​​​​​​​
현대사회는 중도가 실종된 사회
흑백 논리로 편가르기만 난무
조금 손해보더라도 너그럽게
상대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

지안 스님은 “불교는 크게 이해하고 크게 행동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며 “그것은 결국 부처님과 같은 대자대비로 가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지안 스님은 “불교는 크게 이해하고 크게 행동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며 “그것은 결국 부처님과 같은 대자대비로 가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이 끝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은 인생이 편치 않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은 점점 물질적으로 발달되어가고 옛날보다 외형적으로 의식주가 고급화되고 있습니다. 옛날보다 좋은 집에 살고 고층 아파트가 늘어납니다. 식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 한정식 집에 가면 차려진 반찬 수가 무척 많습니다. 옛날에 비해 음식이 매우 고급화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옷도 옛날보다 잘 입고 삽니다. 이러한 외형적인 모습을 보면 분명 의식주가 고급화되고 수준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삶의 질을 놓고 봅시다. 옷감도 질을 평가하는데 삶의 질은 어떠한지 생각해 봅시다.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무엇인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서적인 장애를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법을 만난 인연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그런 변화 과정에서 자신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당면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맺은 인연의 소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는 용어가 바로 인연입니다. 오늘 법회는 정법불교거사림의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몇몇 회원들은 아마 초창기부터 인연을 맺고 있겠지요. 이런 신행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함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서 자신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시간과의 인연, 공간과의 인연, 사람과의 인연이 인생사를 구성하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과의 인연입니다. 사람과의 인연을 잘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경영이고 이것이 자신의 인생 성패를 좌우한다고 합니다.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합니다. 깨달음은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깨달음 자체에 대한 개념을 확실하게 정립해 두시기 바랍니다. 깨달음은 참선을 10년 동안 해서, 오랜 수행을 해서 도를 깨달았다는 식의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을 세 가지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자각(自覺)’입니다. 자기 자신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앞서 생각을 새롭게 해서 자신을 정화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깨달음의 운동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누가 나를 아는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남이 나를 모르듯이 나도 나를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각할 수 있습니다. 자각이란 생각을 고치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각, 뜻깊은 생각, 의미 있는 생각, 망념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가는 방향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만드는 것이 자각입니다. 자각을 한 사람들을 경전에서는 성문, 연각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번뇌를 끊고 삽니다. 번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탐진치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욕심부릴 일을 갖지 않은 사람입니다. 화를 낼 일도 없습니다. 어리석음도 없습니다. 요즘은 중년들도 우울증에 걸린다고 합니다. 우울증이라는 것은 마음이 어두운 상태입니다. 자각하면 마음이 밝아집니다. 마음을 밝히는 것이 곧 불교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깨달음은 자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자각을 통해 번뇌를 줄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각타(覺他)’입니다. 자각만으로 완전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남을 깨우치는 깨달음을 각타라고 합니다. 이것은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수행자상인 보살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연은 묘합니다. 내가 남을 깨우치려는 의도적인 생각이 없었는데 나 때문에 누군가 깨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나의 실수나 어리석은 행동이 남에게 깨달음의 계기를 줄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남이 깨닫도록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중국 고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곽휘원이라는 한 공무원이 있었습니다. 고향을 멀리 떠나 외지에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에는 집에 있는 부인과 자녀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외지에 가서 외롭게 지내다가 편지를 썼습니다. 안부를 전하고 자녀들이 잘 있는지 등 편지를 쓰고 봉투에 넣는데 그만 편지 쓴 종이를 넣지 않고 빈 종이를 넣어 보냈습니다. 부인이 그 편지를 받아보니 글자가 하나도 없고 빈 종이만 있었습니다. 부인은 나름대로 엉뚱한 해석을 합니다. 편지를 쓰려다가 가족들이 보고 싶어 가슴이 막혀 글을 쓰지 못하고 백지를 보냈구나. 사실 실수로 그렇게 보낸 것인데 말입니다. 이 백지 편지를 받고 부인이 감동을 합니다. 얼마나 가족이 보고 싶었으면…. 이렇게 해서 답장을 합니다. 그 답장을 받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자신이 백지를 보낸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백지를 보낸 것이 오히려 집사람을 감동시키다니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는 일화입니다. 

이렇듯 남에게는 의도적인 것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인연이라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왜 불교교육을 잘 시켜야 하는가는 것도 바로 각타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자각각타가 동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원만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신, 구, 의 삼업의 행위가 원만하게 나옵니다. 성문, 연각, 보살들이 이루지 못한 것을 ‘각만(覺滿)’이라고 합니다. 각행(覺行)은 깨달음의 행동이라는 말인데 이 각행이 원만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신업에 허물이 없어야 하고 구업에 허물이 없어야 하고 의업에 허물이 없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아니다 싶으면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끔직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잘못된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말이 되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다각적인 면에서 생각해보면 수긍이 되고 이해가 됩니다. 이것이 ‘대해(大解)’입니다. 크게 이해하면 오해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크게 이해하면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현대사회는 경직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중도가 실종된 사회입니다. 다각적인 면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흑백논리에 의해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대인들의 의식구조가 직선적 사고방식에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시비를 가리면서 편 가름을 합니다. 틀린 사람을 배척합니다. 

불교는 항상 순환을 이야기합니다. 이면에서도 살펴보고 저면에서도 살펴봐야 합니다. 밤하늘의 달은 둥급니다. 실제 달을 가까이에서 보면 여기저기 곳곳이 움푹 패여 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보면 둥글지요. 이와 같이 대해로 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부처님의 모습입니다. 대해가 되고 나면 자연스럽게 대행(大行)이 나온다고 합니다. 대행은 큰 행동입니다. 마음을 크게 써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크게 이해하고 크게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결국 부처님과 같은 대자대비(大慈大悲)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집착을 하고 본인의 생각에 머물다 보면 대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해가 일어나지 않으면 이타적인 행동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어느 선방에서 참선 수행을 한 스님이 해제 후 오랜만에 도반의 절을 찾아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날따라 절에 도반 스님도 보이지 않고 사무실에도 사람이 없는데 마침 법당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법당으로 가 보니 신도 한 분이 관세음보살을 향해 절을 하면서 관세음보살 명호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법당 문을 조금 열고 “보살님, 보살님”하고 불렀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관세음보살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듣지 못하신 모양이다’ 하며 스님은 목소리를 좀 더 높여서 “보살님, 보살님” 하고 크게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이 신도님이 스님을 향해서 확 돌아보더니 “어디서 온 땡중인데 기도하는 보살을 불러대느냐?”라며 야단을 쳤습니다. 

기도하는 신도님 입장에서는 정성을 모아 기도하는데 법당 문을 열고 불러대니 귀찮지요. 그런데 이 스님이 그 말을 듣고 그냥 무심코 내뱉은 말이 참 유명한 말입니다. “보살님. 내 말 좀 들어보세요. 나는 보살님 몇 번 밖에 안 불렀는데도 그렇게 화를 내는데 보살님은 관세음보살님을 그렇게 여러 번 부르니 얼마나 화가 나시겠습니까.”

우스개 이야기 같지만 속에는 숨어있는 뜻이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사람 마음 불편하게 하는 종교는 옳은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수행의 덕목입니다. 이런 것이 대행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좀 더 너그러운 자세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처님 법을 배우면서 ‘각(覺)’의 의미를 좀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안 스님이 지난 3월20일 통도사 마산포교당 정법사(주지 도문 스님)에서 봉행된 ‘정법불교거사림 창립 30주년 기념법회’에서 설한 법문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1484 / 2019년 4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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