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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초기불교 지도자의 불성론 

기자명 이제열

선사도 초기불교지도자도 불성 오해

불성을 아트만 취급하지만
공성의 다른 이름이 ‘불성’
일부 선사들 ‘참나’ 주장에
불성만 억울한 처지에 놓여

얼마전 미얀마 상좌부불교를 지도하는 스님과 점심을 함께했다. 스님은 조계종으로 출가했으나 회의를 느껴 초기불교를 공부했다고 한다. 스님은 대화를 하던중 내게 요즘은 무슨 경을 가르치느냐고 묻기에 북송때 회당조심 스님이 편찬한 ‘명추회요’를 강의한다고 말씀드렸다. 스님은 대승의 교리를 잘 모른다며 내용이 어떤 것인지 간략히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대승의 모든 교리가 공사상과 불성사상에 입각해 펼쳐지고 있으므로 ‘명추회요’의 내용도 이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명추회요’의 종지에 대해 간단한 설명도 곁들였다. 그런데 스님이 내 이야기를 듣자 “불성은 부처님이 직접 설한 가르침이 아니고 힌두교의 아트만 사상의 영향을 받아 생긴 기형적 교리인데 법사님은 왜 그런 교리들을 신봉하느냐?”고 반박했다. 나는 스님의 이런 질문 내용에 꽤 익숙했기에 조금도 불쾌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남방 상좌부 계통에서 공부한 분들 대부분 대승 교리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 스님과 비슷하다 보니 그분들로부터 이미 이런 가시 돋친 질문들을 많이 받아왔던 터였다. 그들은 니까야 계통의 초기경전만 불설로 한정하면서 대승의 모든 교리는 힌두사상의 변형으로 치부한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에는 대승 교리를 불교에서 퇴출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항상 느끼는 점이 있다. 대승 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비판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이다. 

그날 나는 스님에게 대승에서 중시하는 불성이 부처님의 진설이냐 아니냐를 일단 차치하고(사실 이 부분도 오해의 소지가 적지 않다) 대승에서 말하는 불성 개념에 대해 말씀드렸다. 초기불교 입장에 서있는 분들이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는 점은 불성을 힌두교의 아트만과 같다고 간주하는 데 있다. 부처님은 무아를 설하셨고 무아를 진리로 삼는 것이 불교인데, 불성은 무아와 위배된다고 비판한다. 즉 불성은 유아(有我)와 진아(眞我)의 성질을 띤 힌두교의 아트만과 같은 교리이기 때문에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불교 관점에 선 분들의 이 같은 주장은 힌두교의 아트만과 불성을 구분하지 못하는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불성은 아트만과 같은 유아나 진아의 성격을 전혀 띠고 있지 않다. 불성을 설하는 대승의 어떤 교설에서도 불성을 실체화하거나 절대화시키는 내용을 찾기 힘들다. 대승에서 불성이란 유무의 양극단을 벗어난 중도로서 외도들의 유론과 같이 보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대승의 ‘마음’을 심층적으로 다룬 ‘해심밀경’에서도 ‘부처님께서는 마음에 ‘나’가 없고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가 없고 실체가 없으므로 끝내 얻을 만한 법이 없다’고 했다. 불성은 중생들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특별한 마음이 아니며, 이미 완성체로서 존재하는 궁극적 실재도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실체 없는 마음의 무아성과 공성을 이름만 바꾸어 불성이라고 명명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초기불교 관점에 선 분들이 불성에 대해 반발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음직하다. 그것은 한국의 잘못된 선불교에도 원인이 있을 것 같다. 선사라는 분들이 불성을 ‘아트만’이나 ‘푸드갈라’로 이해하고 이를 대중화시키는데 한몫했다. 지금도 입만 열면 ‘참나’니 ‘진아’니 ‘참생명’이니 ‘근본’이니 하는 말로 불성을 아트만이나 푸드갈라로 둔갑시킨다. 초기불교에 관심 갖는 분들의 불성에 대한 오해는 이렇게 일부 선사들의 잘못된 불성관 영향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오늘날 대승의 핵심교리인 불성은 양쪽에서 씌운 누명으로 크게 억울한 처지에 내몰렸다. 보다 큰문제는 무아와 공의 성질을 띤 불성이 아트만 교리로 변질 이해되는 현 불교계에서 반발조차 어려울 정도로 유아론이 만연한 상황이라는 점에 있다.

이제열 법림선원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1484 / 2019년 4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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