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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앎

잘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실은 더 알기 어렵다

안다고 할 때 사람마다 의미 달라
신도 ‘어느 정도’ 믿는 것에 불과
‘깨달음’ ‘열반’ 개념 이해 제각각

안다는 건 무엇일까? 안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미를 갖는 걸까? 두 사람이 어떤 대상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 때, 둘의 앎은 같은 것일까?

어떤 대상에 대해 더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은 더 낮은 지식을 가진 사람의 지식이 더 낮다는 걸 알지만, 더 낮은 지식을 가진 사람은 더 높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더 높은 지식을 가졌다는 걸 알기 힘들다.

어떤 대상에 대해 더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은 더 낮은 지식을 가진 사람의 지식의 한계 즉 ‘그가 어디까지 아는지’ 알지만, 더 낮은 지식을 가진 사람은 더 높은 지식을 가진 사람의 지식의 한계 즉 ‘그가 얼마나 더 아는지’ 알기 힘들다.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이 수학 교수가 어떤 수학을 얼마나 아는지 무슨 수로 알 수 있겠는가? 아예 불가능하다. 배우면 될 것 같지만 머리가 안 따라가면 배우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같은 말을 사용하면 같은 뜻인 줄 알지만, 많은 경우에 같은 뜻이 아니다. 특히 형이상학적인 용어가 그렇다. 예를 들어 이(理)와 기(氣)가 그런 물건이다. 이들은 각각 수십 가지 다른 뜻이 있다. 옥편을 찾아보라. 뿐만 아니라 철학자들은 이(理)와 기(氣)에 더 많은 뜻을 부여하며, 철학자들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이런 의미는 옥편에도 나오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첨예한 이기(理氣) 논쟁은 대부분이 논쟁자들이 이(理)와 기(氣)에 대해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 사실을 모른다는 데, 즉 이(理)와 기(氣)에 대한 정의가 서로 다르지만 그 사실을 모른다는 데 기인한다고 한다. 고려대 이승환 교수가 저서 ‘횡설과 수설’에서 편 주장이다. 소위 상대방이 주장하지 않은 걸 공격하는 허수아비 논법이라는 것이다.

신을 믿는 사람들을 유신론자라고 한다. 누가 신을 믿느냐고 물을 때 그에게 ‘무얼 신이라고 하느냐?’고 되물으면 그는 무어라고 대답할까? 신을 믿지 않는 걸 무신론이라고 한다. 존재하지 않는 신을 믿지 않는 것도 무신론일까? 존재하는 신을 믿지 않는 게 무신론이라면, 어느 신이 존재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상숭배란 존재하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일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일까?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은 존재하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일까? 존재하지 않는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일까? 만약 후자라면 왜 ‘존재하지 않는 신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하지 않았을까? 고대인들은 수많은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을 가능성이 무척 크다. 그중에 자기들 신이 제일 세다고 믿었을 것이다.

신을 믿는다는 건 ‘어느 정도’ 믿는 것이다. ‘완전히’ 믿는 게 아니다. 신에 대해서 완전히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신에게 유신론자 자신이 모르던 속성이 나타날 때 계속해서 신을 믿을 수 있을까? 더 이상 안 믿는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신이 그에게 자신의 모든 면을 보여준 게 아니므로, ‘자기가 신에 대해 생각하고 인정하는 게 신의 모든 면이라고’ 생각하고 믿었기 때문이다. 평생 믿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못 믿게 되는 이유다. 5000년 동안 자기 민족이 믿던 신을 버리기도 한다. 유대인들은 반 정도가 홀로코스트 이후 야훼 신을 버렸다. 그 결과 현재는 수십 프로가 무신론자이다.

불교에서 신 또는 구원에 대응되는 게 부처와 깨달음과 열반이다. 불교도들은 부처와 깨달음과 열반을 추구하지만, 부처와 깨달음과 열반에 대해서 누구나 같은 의미를 부여할까? 만약 다르다면,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부처와 깨달음과 열반은 존재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부처와 깨달음과 열반이 존재한다는 보장은 어디 있을까?

무엇을 물질이라 하고 무엇을 마음이라 할까? 물질과 마음에 대한 정의는 사람들에 관계없이 다 일치할까? (컴퓨터가 마음을 가졌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왜, 식물이나 아메바나 짚신벌레가 마음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컴퓨터가 마음을 가졌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까?) 우리는 물질에 대해서 얼마나 알까? 마음에 대해서 얼마나 알까? 혹시,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이런 것들이, 사실은 깨달음이나 열반에 대한 앎보다 더 알기 어려운 것은 아닐까?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84 / 2019년 4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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