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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신 참나 자연법칙

이데아는 특정 물건 형태 아닌 자연법칙으로 존재

수학에서 신 개입할 여지없어
수학 기반한 과학이 인간 해방
신이라도 자연법칙 초월 불가
참나론자도 유일신론자와 비슷

중세에 일부 이슬람 학자들은 ‘자연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자연법칙의 존재가 신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연법칙이 존재한다면 자연법칙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즉 입헌군주국의 왕처럼 법에 따라야 하므로.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자연법칙이 위배되는 것은 관찰할 수 없다. 물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른다든지, 끓는 물에 손을 집어넣으면 동상을 입는다든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난 적도 없다. 구태여 일어난다면 과학기술 덕이다. 양수기를 이용하면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으로 퍼 올릴 수 있다. 적어도 양수기 관 속에서는 물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른다. 유신론자들은 신이 자연법칙을 초월해 세상사 즉 인간사에 개입한다고 주장하지만, 주장뿐이지 아무 증거가 없다.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불교도들은 불보살이 초월적인 신통력으로 세상일에 개입한다고 믿는다. 물론 아무 증거도 없다. 수천 년 동안이나 빌어 왔지만, 자연법칙이 위배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고대인들은 일식·월식이 그런 일이라고 간주했지만, 무지에 기초한 망상이었다. 이 역시 자연법칙에 지나지 않는다. 용이 승천하는 현상이라고 간주된 용오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신이 자연법칙을 초월한다면 수학에도 개입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일은 없다. 1+2가 4가 되는 경우는 없다. 4가 홀수가 되는 경우도 없다. 신이 수학에 개입할 수 없다면, 어떻게 물리 화학 등에 개입할 수 있을까? 특히 물리학은 수학을 연구수단으로 하므로, 수학을 초월할 수 없다면 물리학도 초월할 수 없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신의 손아귀로부터 해방시키는 위업을 이루었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는, 만약 존재한다면, 완벽한 창이나 완벽한 방패 등 특정한 물건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법칙으로 존재한다. 자연법칙을 이용해 더 나은 물건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중력의 법칙, 전자기의 법칙, 열역학법칙, 상대성이론 등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원시적인 생각을 한 것이다. 만물과 현상은, 이데아의 그림자가 아니라, 자연법칙의 그림자이다. 인간의 행동이 의지와 욕망의 그림자인 것과 같다. 인간의 행동 역시 여러 요소 사이의 상호관계의 산물, 즉 연기(緣起)의 산물이다. 따라서 인간행동의 배후에 상주불변(常住不變)의 주체는 없다. 오온(五蘊)의 상호작용 또는 연기작용일 뿐이다. 이걸 무아연기론(無我緣起論)이라고 한다. 무아연기론은 우리의 마음이 자연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주장이다. 자연을 움직이는 신이 필요 없다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참나(眞我 아트만)도 필요 없다. 참나주의자(眞我論者 true atmanist)들은 모든 게 참나의 의지의 작용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유신론자들이 자연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신을 인정하지 못하듯이, 자연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참나를 인정하지 못한다.

어떤 이슬람 학자는, 목화를 불에 집어넣으면 목화가 연기를 내면서 검은색으로 변하는 것은 열 때문이 아니라 신이 그리되길 원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자연법칙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 의하면, 모든 일은 신의 의지에 의해서 일어나는 특수한 사건이다. 즉, 자연법칙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이들은, 신은 자연법칙을 창조하고 우주를 자연법칙에 맡기고 물러났다는 이신론적(理神論的) 시각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격을 지닌 신이 우주의 모든 일을 자신의 의지로 관장하는 걸 기대한다. 그래서 미천한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신이 주관한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신의 섭리가 아닌 자연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우주는, 절대군주의 의지가 아닌 법에 의해 작동하는 법치주의 사회와 같다.

이슬람이 스페인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전쟁에 지면서, 12세기에 이슬람 과학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상당수 이슬람교도들은 과학교육에 대한 석유수익금 투자를 반대한다. 기술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자기들 종교 교리에 반하는 근본적 과학(fundamental sciences)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참나 불교도들은 이들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85 / 2019년 4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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