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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㉑진흥왕의 순수비와 황룡사의 장육존상-하

유교 왕도사상과 불교 법왕을 아우르는 정법치세 정치이념 수립

황룡사 장육존상 조성설화
중국에도 비슷한 기록 많아
신라 고유전설 보기 어려워

자식들 금륜·사륜 명명한 건
불교의 이상적 제왕 출현 기대

선대왕부터 공동묘역 탈피
국왕 정점 지배체제를 확립

​​​​​​​말년에 부인과 더불어 출가
불교 통한 삼국통일 원동력

‘삼국유사’ 중종대 간행 목판본 가운데 권3, 탑상 제4 황룡사 장육존상.
‘삼국유사’ 중종대 간행 목판본 가운데 권3, 탑상 제4 황룡사 장육존상.

‘삼국유사’ 황룡사 장육존상조의 내용은 별전(別傳)·사중기(寺中記)·별본(別本)·별기(別記) 등에 전하는 여러 종류의 전승 자료들을 모아 정리한 연기설화이다. 그런데 설화의 내용은 자료에 따라 약간의 다른 사실들을 전해주고 있으나, 모두 석가3존상의 조성에서 인도(西竺)의 아육왕(阿育王, Aśoka)은 실패하고, 신라(東竺)의 진흥왕이 성공하였다는 내용은 일치한다. 아육왕 불상의 경우는 아육왕의 8만4천탑 설화와 함께 중국측 문헌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특히 아육왕 불상에 대해서는 혜교(慧皎, 497〜554) 찬술의 ‘고승전(高僧傳)’, 도선(道宣, 596〜667) 찬술의 ‘광홍명집(廣弘明集)’과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 등의 문헌에서 발견된다. 황룡사 장육존상조의 기록과 유사한 내용도 있어 주목되는데, 동진(東晋) 때 단양(丹陽)의 장간사(長干寺)와 형주(荊州)의 장사사(長沙寺)에 모셨던 아육왕상은 물속에서 빛을 발하거나 홀연히 나타나는 이적으로 발견되어 절에 모셔졌으며, 그 뒤로 이 불상들은 국운에 중대한 변화가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거나 스스로 법당 밖으로 걸어 나오는 신이(神異)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와 같은 중국의 아육왕상 기록은 황룡사 장육존상에 대한 기록이 신라에서만 전해 내려오는 고유한 전설이라기보다는 이와 비슷한 중국의 전설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하는 하나의 단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석가3존상의 조성에서 서축의 아육왕이 실패한 것을 동축의 진흥왕이 성공하였고, 조성 다음해에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 자나 젖은 것은 진흥왕이 세상을 떠날 조짐이었다는 설화 내용은 미륵불과 전륜성왕으로 구성되는 정치이념을 석가불의 조성을 통하여 한층 더 완벽하게 구현하고자 하는 진흥왕의 염원을 담은 것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삼국유사’ 황룡사 장육존상조의 내용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별본’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그에 의하면 아육왕은 인도 대향화국(大香華國)에서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뒤 1백 년만에 태어나 진신(眞身)에 직접 공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금과 철(구리)을 모아 3번이나 불상을 주조했으나 실패하였다. 실패를 미리 예견하였던 태자의 건의를 받아들여 재료를 바다에 띄워 보냈으며, 남염부제(南閻浮提, Jambu-dvīpa)의 16 대국(大國), 5백 중국(中國), 1만 소국(小國), 8만 취락(聚落)을 거쳐 신라의 해안에 도달하여 마침내 진흥왕이 문잉림(文仍林)에서 불상을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원래 아육왕은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뒤 200년 즈음(B.C. 268〜232 년간 재위한 것으로 추정) 인도 최초의 통일 왕국을 건설하고 불법을 크게 일으켜서 불교적인 이상적 제왕인 전륜성왕으로 추앙되고 있었다. 그런데 아육왕이 불상 제조에 실패한 반면, 그가 보낸 자료를 가지고 신라의 진흥왕이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왕권을 강화하고 지배영역을 크게 확장한 진흥왕의 긍지에 그대로 부합되는 것이며, 나아가 불교적인 이상적 제왕인 전륜성왕의 출현을 기대하는 염원을 반영한 것이다. 

다음 ‘별본’과 ‘별기’에서 인용한 내용 가운데서 주목되는 것은 자장(慈藏)이 중국 오대산에서 현신한 문수보살로부터 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즉 인도의 무우왕(無憂王, 아육왕)이 황철(구리) 약간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1,300여 년이나 지난 뒤에 신라에서 불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자장은 선덕여왕 14년(645) 황룡사에 9층목탑을 세우게 한 것으로 유명한데, 황룡사 9층목탑의 건립을 ‘찰주본기’에서는 남산원향선사(南山圓香禪師), ‘삼국유사’ 황룡사9층목탑조에서는 신인(神人)이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이 장육존상조에서 인용한 자료에서는 장육존상의 주조 사실을 문수보살이 확인하여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아 장육존상과 아육왕의 관계를 전해주는 설화는 신라에 광범하게 유포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진흥왕에게 있어서 아육왕, 그리고 전륜성왕이라는 불교적인 이상적 제왕의 정치적 이념은 대단히 깊게 각인되어 있었음을 재삼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진흥왕은 큰 아들을 동륜(銅輪), 둘째 아들을 사륜(舍輪, 또는 金輪)이라고 명명하였다. 수미산세계설에 의하면 수미산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의 승신주(勝身洲), 남쪽의 섬부주(贍部洲 , 또는 閻浮提), 서쪽의 우화주(牛貨洲), 북쪽의 구로주(俱盧洲) 등 네 개의 주(洲, 대륙)가 펼쳐져 있는데, 전륜성왕은 4종의 덕(德)과 7종의 보물을 가지고 수미4대주를 통솔한다고 생각되는 신화적 이상적 제왕이다. 전륜성왕은 위덕(威德)에 따라 금(金)·은(銀)·동(銅)·철(鐵)의 4종으로 나뉘어 금륜왕은 수미4대주(須彌四大洲), 은륜왕은 동·서·남 3주, 동륜왕은 동·남 2주, 철륜왕은 남섬부주 1주를 통치한다고 하며, 히말라야 남쪽의 인도 대륙을 통일한 아육왕은 철륜왕으로 비정된다. 또한 ‘인왕반야경’이나 ‘보살영락본업경’ 등의 경전에서는 전륜성왕의 교의적(敎義的) 위치를 보살의 계위에 배대시키고 있는데, 특히 ‘영락경’에서는 금·은·동·철의 4륜왕은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양(十廻向)의 보살의 계위에 역순으로 의설하기도 한다. 그런데 진흥왕이 자기 두 아들을 동륜과 사륜, 또는 금륜으로 명명한 것은 이러한 전륜성왕설에 입각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동륜은 별다른 문제가 없지만, 사륜은 원래 철(쇠)륜을 의미한 것이거나 사(舍)와 금(金)의 글자 모양의 유사성에서 발생한 판각과정의 혼동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형 동륜이 진흥왕 27년(566)에 태자(太子)로 책봉되었다가 공교롭게 연호를 홍제(鴻濟)로 변경하는 33년(672)에 사망하고, 뒤에 사륜이 왕위를 계승하여 25대 진지왕이 되면서 사륜이 금륜으로 해석 존칭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동륜과 사륜, 또는 금륜 이외에 은륜(銀輪)이라는 명칭도 전승되고 있어 흥미롭다. 1989년 경남 김해시에서 신라 경덕왕대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紀)’를 필사했다는 이른바 필사본 ‘화랑세기’가 발견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으나, 검토 결과 위작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정되었지만, 필사본에서 진흥왕의 딸의 이름이 은륜공주(銀輪公主)로 기록되어 주목된다. 만일 이 기록을 받아들이면 금·은·동·철의 4륜왕의 이름이 모두 등장하게 되어 진흥왕이 전륜성왕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진흥왕은 재위 37년에 세상을 떠나자 애공사(哀公寺)의 북쪽에 장사 지냈다. ‘삼국사기’에서는 앞선 법흥왕릉도 같은 장소로 전하는데, 오늘날 애공사의 위치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법흥왕릉과 진흥왕릉을 비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당시의 상황과 오늘날 경주 지역의 무덤군과 내부구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선도산 아래에서 위쪽 방향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열을 지어 조성된 무덤군 4기 가운데 2기가 법흥왕릉과 진흥왕릉일 것으로 추정된다. 진흥왕대부터 법흥왕의 장지 선정을 계기로 하여 신라 왕실이 6부 지배집단의 공동 묘역을 떠나 다른 새로운 지역에 그들만의 무덤군을 조성하였다는 것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체제가 강화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진흥왕조 말미에서는 진흥왕의 불교신앙을 종합적으로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받들었고,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칭하다가 죽었다. 왕비 또한 그것을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다가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또한 ‘삼국유사’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조에도 진흥왕의 불교신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제24대 법흥왕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삼맥종(彡麥宗)인데, 심맥종(深麥宗)이라고도 한다. 양(梁)나라의 대동(大同) 6년 경신(庚申, 540)에 즉위하였다. 백부 법흥왕의 뜻을 흠모하여 일념으로 불교를 받들어 널리 불사(佛寺)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이끌어 승려가 되게 하였다. 또 천성이 풍류를 좋아하고 신선(神仙)을 매우 숭상하여 민가의 아름다운 처녀를 뽑아 원화(原花)로 삼았다. 이것은 무리를 모아서 인물을 뽑아 효도, 우애, 충성, 신의를 가르치고자 함이었으니,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큰 요체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진흥왕은 말년에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호를 법운이라고 하였으며, 왕비 사도부인(思道夫人)도 또한 출가하여 영흥사에 머물렀다고 하는 것은 전륜성왕을 본받고자 하였다. ‘장아함(長阿含)’권7 전륜성왕수행경과 ‘중아함(中阿含)’권15 전륜성왕경 등의 초기경전에 의하면 전륜성왕이 만년에 왕위를 태자에게 물려준 뒤 삭발하고 출가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삼국유사’ 원종흥법조에 의하면 영흥사는 법흥왕대 왕비 보도부인(保刀夫人)의 발원으로 흥륜사의 공사가 재개되는 법흥왕 22년(535)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왕과 함께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법명을 묘법(妙法)이라 하고 영흥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리고 진흥왕비 사도부인도 왕을 따라 출가하여 비구니로서 영흥사에 거주하다가 진평왕 36년(614) 입적하였다. 

이로써 진흥왕은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법흥왕의 딸인 모친이 섭정하였는데, 법흥왕의 불교흥륭의 정책을 이어받아 흥륜사 공사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흥륜사에 주불로 미륵불을 봉안하여 미륵신앙과 전륜성왕을 결합한 정치적 이념을 추구하였다. 뒤에 성년이 되어 친정체제를 구축하고 왕권강화와 영역확장 사업을 추구하면서 흥륜사에 이은 황룡사를 창건하고 거대한 석가3존상을 조성함으로써 미륵불과 전륜성왕으로 구성되는 정치이념을 확고하게 수립하였다. 왕권을 강화하고 영역을 크게 확장한 정복군주로서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는 사상으로서 전륜성왕사상을 적극적으로 유통시킨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의 위상 강화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전륜성왕으로 명명함으로써 불교적 이상적 제왕의 출현을 기대하였다. 진흥왕이 말년 화랑제도를 정비하여 미륵하생을 염원한 것은 미륵불과 전륜성왕의 정치이념을 사회저변으로 확대하려는 사상정책의 일환이었다. 또한 진흥왕은 이러한 불교 흥륭정책의 추진과는 별도로 유교적 왕도사상을 통하여 세간적 속제(俗諦)의 국왕과 출세간적 진제(眞諦)의 법왕(法王)을 아우르는 ‘정법치세(正法治世)의 정치이념을 수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진흥왕의 이러한 사상정책은 뒷날 삼국통일 달성의 원동력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85 / 2019년 4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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