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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종각(鐘閣) 현판

기자명 손태호

민족문화 지켜온 선각자 보국정신 퍼지길

민족대표 33인 위창 오세창 선생
손병희 등의 권유로 천도교 입교
일제에 맞서 민족문화 보호 앞장
간송에게 문화재 중요성 일깨워
만해 스님과 교류 위창거사로 칭해
1942년 흥천사 종각 현판에 글씨

서울 돈암동 흥천사 종각.

올해는 일제강점기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TV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을 다시 돌아보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유관순 열사에 대한 영화가 상영되기도 하고, 정부에서도 독립유공자와 관련한 많은 행사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3·1운동 하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33명의 민족대표 가운데 어느 한 분 소중하지 않은 분이 없지만 동양미술작가이자 불교미술사 연구자로서 특히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님에 대해 보다 특별한 감정은 어쩔 수 없습니다. 

위창 오세창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일본제국주의 패망 후 일본에 빼앗겼던 구한국 정부의 옥새를 미군정이 돌려줄 때 국민대표로 이를 인수할 만큼 민족대표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위대한 서예가라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전서체에 뛰어난 실력을 갖춰 당대 최고의 전서체 서예가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위창의 뛰어난 서예 작품 중 하나인 서울 흥천사 종각에 걸려 있는 ‘종각(鐘閣) 현판’을 함께 감상해 보고자 합니다. 

서울 흥천사는 한성부 황하방(현재 중구 정동)에 있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의 원찰로 원래 위치는 능 동편에 자리한 왕실사찰입니다. 정릉이 지금 성북동으로 이전 후에도 계속 정동에 있다 1794년 현재 돈암동 위치로 옮겼습니다. 철종 때 법당과 명부전을 중수하였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요사의 중건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종각은 한참 뒤 1942년에 중건되었는데 현판도 이때 쓴 글씨입니다. 

종각 글씨에서 종은 ‘쇠북 종(鍾)’이고 각은 ‘집 각(閣)’입니다. 쇠북 종은 쇠 금(金)과 무거울 중(重)이 합쳐진 한자인데 무거울 중은 다시 일천 천(千)과 마을 리(里)가 합쳐진 글자입니다. 그런데 현판 글씨를 보면 무거울 중에서 일천 천(千)을 마치 종 고리처럼 표현했고 마을 리(里)는 종의 몸통처럼 둥그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범종이 걸려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쇠 금(金)은 마치 탑처럼 표현하여 탑 지붕돌 아래에 풍탁이 걸려 있는 모양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풍탁도 일종의 종입니다. 따라서 쇠북 종(鍾) 글씨에 범종과 풍탁 두 가지의 종의 모습을 전부 표현한 것입니다. 

집 각(閣) 또한 문 문(門)과 각 각(各)이 합쳐진 글씨인데 문(門)은 위를 세워 마치 홍살문의 모양으로 표현하여 신성한 곳이라는 이미지를 전해주어 종의 신성을 더욱 부각시켜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범종의 의미와 상징을 잘 알지 못하면 쓸 수 없는 표현으로 정말 당대 전서체의 일인자다운 글자의 해석과 뛰어난 표현입니다. 낙관은 방형으로 오세창과 위창을 양각으로 새겼습니다.
 

위창 오세창 선생이 쓴 흥천사 종각 현판.

우리나라 옛 선비들은 ‘글씨와 그림은 그 근원이 같다’는 ‘서화동원(書畵同源)’이란 표현을 종종 사용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추사 김정희도 명작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에서 “초서와 예서, 기자의 필법으로 그렸다”고 적어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서화동원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글씨가 바로 흥천사 종각 현판입니다. 

위창 오세창 선생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다시피 역관 집안에 태어나 20세 때 역관으로 관직을 시작하였습니다. 몇 년 후 인쇄 출판기관이었던 박문국의 주사와 최초의 근대적인 신문인 한성순보 기자를 겸했습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치던 중 1902년에는 개화당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에 망명하던 중 일본에서 손병희 등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했습니다. 1906년 일본에서 돌아온 후 손병희·권동진 등과 민족적 개화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런 활동은 1919년 3·1독립선언까지 이어져 민족대표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일제가 3·1운동 이후 문화침략을 강화하여 민족의 문화를 왜곡, 말살하는 정책을 펼치자 적극적으로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고취하고 보호하는 데 앞장섭니다. 이러한 위창의 활동은 아버지가 추사 김정희와 그 제자 우선 이상적에게 사사를 받아 추사학파의 고증학을 이어받은 금석학의 대가였기에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방대한 서화를 보고 배우며 자란 덕분입니다. 

국운이 다하여 나라가 타국에 병합되는 암흑기에 우리 문화라도 제대로 보호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어 위창은 고서화를 모으고 연구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청년 간송 전형필을 만나 문화재 수집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어 간송이 훌륭하고 수많은 작품들을 수집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수많은 명품 서화들은 위창 오세창 선생님의 감식을 거쳐 수집된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위창 선생은 당대 제일의 서화 감식안이자 최초의 한국 미술가 사전인 ‘근역서화징’, 역대 명화를 화첩으로 꾸민 ‘근역화휘’, 조선 명필가 글씨를 모은 ‘근역서휘’, 우리나라 역대 명화가, 서예가의 인장과 도장 등을 모아 꾸민 ‘근묵’ 등 불세출의 역작들을 펴낸 컬렉션이자 연구자였습니다. 

위창 선생은 불교와도 인연이 깊어 만해 스님과도 깊게 교류하였고 스스로도 위창거사라 칭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찰 현판글씨로는 흥천사 ‘종각’ 외에도 봉은사 법왕루의 ‘선종종찰 대도량(禪宗宗刹 大道場)’, 구미 도리사 ‘태조선원(太祖禪院)’, 경남 합천 청가사 ‘대웅전(大雄殿)’, 경남 진주 ‘비봉산 의곡사(飛鳳山 義谷寺)’ 글씨를 썼으며, 비문으로는 경남 합천 해인사 홍제암에서 1947년에 세운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碑)’와 전남 순천 송광사 ‘불일보조국사감로지탑(佛日普照國師甘露之塔)’ 전액(篆額)도 썼습니다. 

“덩~ 덩~.”

오늘도 흥천사의 종은 시방세계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위대한 법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렇게 울려 퍼지는 부처님의 귀한 소리에 험악한 시대에 고군분투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민족문화를 지키고 가꾸어 나간 선각자들의 정신도 함께 퍼져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485 / 2019년 4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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