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출근길에 어르신 한 분이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접했다. 가슴이 먹먹하다. 예전에는 어르신들께 안부를 여쭙는 인사말이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식사는 하셨습니까?’였는데 살아가면서 이 말들의 의미를 더 새기게 된다. 매일매일 얼굴 보고 인사 나누던 어르신이 밤새 안녕하시지 못하고 중환자실에 계신다는 가족들의 연락을 전해 들었을 때는 사회복지현장에서 일하는 우리들로서는 한동안 가슴이 아려온다.
이 어르신과의 첫 만남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처음 서울노인복지센터에 출근하던 날 관장실로 찾아오시어 “나는 남성합창단을 맡고 있는 누구”라고 이야기하시며 “합창단을 전폭 지원하지 않는다”고 야단부터 치셨다. 그러시더니 나가실 때는 “관장이 많은 노인네들 하소연 듣느라고 고생이 많고 수고한다”고 인사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후로 종종 관장실로 오셔서 ‘수고한다’고 지지해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던 분이다. 첫 만남에서는 비판도 서슴없이 하시고 점점 익숙해질수록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분이시다. 그런 분이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니, 빨리 회복되시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부처님을 찾게 된다.
가끔 노인복지관에서는 이런, 아니 이보다 더한 비보를 전해 들을 때가 있다. 어느 해인가는 초년 사회복지사가 사회활동지원사업을 맡은 적이 있다. 경험도 적었던 그 사회복지사는 처음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어르신들과 친해지게 됐다. 서로 안부도 물어가며 열심히 사업을 진행하면서 “어르신들에게 보람도 되고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이 일이 너무 재미있다”고 좋아하곤 했다. 그러던 차에 한 어르신이 며칠째 일을 나오시지 않아 연락을 했다가 가족들로부터 부고를 전해 듣고는 눈시울이 잔뜩 붉어져 내게 보고하러 왔던 기억이 있다. 울먹이면서 일을 하던 그 사회복지사를 달래어 어르신과 작별인사를 하고 오라고 장례식장에 보내었다. 아마도 나이 어린 그 사회복지사에게는 어르신들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인생을 배워가는 모습에서 삶과 죽음이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계기이자 한 뺨 더 성장하는 성장통이었을 것이다. 그런 직원들을 보면서 인생의 선배로서 참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인생 선배로서 정말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까. 자신이 없다. 늘 깨어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일상을 잘살아야 한다,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나 자신은 그리 살아가고 있는지.
오늘 위독하시다는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듣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며 다짐한다. 불교에서는 생과 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늘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죽음을 잊고 사는 것이 사실이다.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고는 이야기하지만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싫어하는 것도 죽음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 수행자인 나도 목전에 죽음이 있음을 망각할 때가 왕왕 있다. 항상 건강할 것 같고 영원히 살 것처럼 이 욕심 저 욕심을 부리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르신의 안타까운 소식에 자신을 반성해보는 시간이 된다.
희유 스님 서울노인복지센터 시설장 mudra99@hanmail.net
[1486 / 2019년 4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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