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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6대 총무원장 월하 스님-상

불교정화·종단혼란 수습 앞장섰던 현대 한국불교사의 목격자

19세 때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
통도사서 구하 스님 전법 제자
정화 때 비구 측  불교재건위원
통합종단 초대 총무부장에 선출 

종단 갈등 때마다 중재자로 나서
조계·개운사 분규수습 참여했다
1978년 2월 총무원장에 선출돼

월하 스님(밑에서 셋째줄 맨 왼쪽)은 1954년 9월 선학원에서 열린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 통도사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참석해 비구승 중심으로 구성된 종단 집행부에서 총무부장과 종회의원에 피선됐다. 사진출처 ‘영축총림 통도사 근현대불교사'
월하 스님(밑에서 셋째줄 맨 왼쪽)은 1954년 9월 선학원에서 열린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 통도사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참석해 비구승 중심으로 구성된 종단 집행부에서 총무부장과 종회의원에 피선됐다. 사진출처 ‘영축총림 통도사 근현대불교사'

월하 스님은 근현대 한국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불교정화운동과 1970년대 조계사·개운사 갈등, 1994년‧1998년 종단사태 등 근현대 한국불교사를 관통하는 주요사건 때마다 그 중심에 있었다. 총무원장과 종정을 역임하며 종단의 정점에 서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시련과 도전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스님의 삶은 파란만장했던 한국불교사와 궤를 같이한다. 

월하 스님은 1915년 4월9일 충남 부여군 군수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집 근처에 있던 고란사를 다니며 불연을 맺었고, 스님들의 일상을 동경하며 발심했다. 19세 되던 해인 1932년 ‘금강산에는 큰스님이 많다’는 말에 금강산 유점사를 찾았다가 그곳에서 출가인연을 맺고, 이듬해 7월 성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40년 통도사에서 구하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고 전법제자가 됐다. 이후 오대산 상원사에서 당대 선지식으로 존경받았던 한암 스님 문하에서 수차례 안거와 용맹정진을 이어가며 구도의 길을 걸었다. 이런 구도행은 스님이 1965년 51세의 나이에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에 추대되는 배경이 됐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불교계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결혼한 스님을 승단에서 배제하고 계율을 복원해 부처님법대로 살겠다는 움직임이었다. 월하 스님도 1954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로 본격화된 불교정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스님은 1954년 통도사 출신 스님으로서는 유일하게 선학원에서 열린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 참석해 종헌제정위원에 선출됐다. 9월28~29일 전국비구승대회에서 통과된 종헌에 따라 비구승 중심으로 구성된 종단 집행부에서 총무부장과 종회의원에 피선됐다. 이후 효봉·청담·인곡·경산 스님과 더불어 비구 측 대표로 활동하며 비구‧대처 갈등에서 비구 측 입장을 대변했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비구·대처 갈등은 박정희 군사정부의 개입으로 변화를 맞았다. 박 정권은 1961년 12월 “비구·대처가 동수로 참여하는 불교재건비상종회를 조직해 모든 분쟁을 수습하고 단일종단을 만들며, 법원에 계류 중인 모든 소송은 취하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정부의 강압적인 중재안에 따라 1962년 1월 불교재건위원회가 구성됐고, 월하 스님은 비구 측을 대표해 불교재건위원으로 참여했다. 불교정화운동 기간의 활동은 통합종단출범 이후 스님이 종단 중심부에 설 수 있었던 기반이 됐다. 통합종단이 출범한 이후 스님은 초대 총무부장에 선임된 데 이어 법규위원장, 1966년 감찰원장, 1967년 부처님오신날 봉축위원회 집행위원장, 세계불교도우의회(WFB) 한국지부 부위원장, 1975년 동국학원 이사장 등을 맡았다. 

그러나 통합종단이 출범한 이후에도 조계종은 조용한 날이 많지 않았다. 비구·대처의 갈등이 정리되자 종단운영의 주도권을 두고 종정·총무원장 간의 불협화음이 속출했고, 사찰주지 인사를 두고도 크고 작은 갈등이 줄을 이었다. 그럴 때마다 월하 스님은 종단의 중진·원로들과 협의체를 구성, 중재에 나서면서 갈등해소에 앞장섰다. 1978년 2월 월하 스님이 개운사 측 총무원장에 선임된 것도 이런 행보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1977년 12월9일 월하 스님은 이후락 전국신도회장의 주선으로 열린 원로모임에 참석했다. 이 무렵 조계종은 종정 서옹 스님 측과 중앙종회 측의 극심한 갈등으로 내분 수순을 걷고 있었다. 이날 모임을 기점으로 원로들은 사태수습을 위한 ‘종단재건회의’를 구성, 종헌개정을 통해 1978년 2월15일까지 새 집행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종정과 중앙종회 측도 이를 수용해 모든 권한을 종단재건회의에 이양하기로 했다. 그러나 1월21일 서울고등법원의 가처분 결정은 종단재건회의의 중재노력을 수포로 만들었다. 서옹 스님은 종정권한을 종단재건회의에 이양하겠다는 약속을 번복해 종정직 복귀를 선언하면서 양측의 갈등은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일이 이렇게 되자 종단재건회의에서 15대 총무원장으로 선출됐던 석주 스님은 사의를 표명했다. 

이런 가운데 중앙종회 측은 1978년 2월2일 서울 개운사에서 제50회 정기중앙종회를 속개하고 사퇴를 선언한 석주 스님의 사표를 수리했다. 이어 월하 스님을 새 총무원장으로 선출하고 3월10일 개운사에 총무원 간판을 내걸었다.  종정과 중앙종회 측의 극한 대립은 조계사‧개운사 총무원으로 양분되는 결과로 이어진 셈이다. 양측의 갈등이 심해지자 종단 원로들의 주선으로 정부가 개입에 나섰다. 당시 김성진 문공부 장관은 원로스님들과의 논의 끝에 4월20일 기자회견을 열어 “분종사태의 당사자인 종정과 종회가 동시퇴진하고 원로회의에 종권을 위임, 새 종헌을 통해 집행부를 구성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종단 분열에 따른 비판여론과 박정희 군사정부가 개입한 상황에서 양측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측은 정부의 중재안을 모두 수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부 중재안를 받아들이는 양측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 서옹 스님측은 양측의 동반퇴진을 전제로 수긍했던 반면 중앙종회 측은 일단 사퇴하는 모양새만 취하기로 했다. 

4대 중앙종회회의록에 따르면 중앙종회 측은 1978년 4월28일 서울 개운사에서 제51회 임시회를 열어 정부와 원로회의 측이 제시한 중재안에 대해 논의했다. 이날 종회의장 녹원 스님은 “우리의 주장이 옳지만 종단 화합과 이 사태 수습을 위해 서옹 종정은 사퇴해 물러가고, 우리 종회도 승리자의 아량으로서 종단 수습에 기여하는 자진 사퇴의 결의가 있어야 한다”면서 “(그래야) 이 난관을 수습하는 동시에 즉각 종회의 전통을 단절시키지 않고 그대로 계승할 수 있다. 빠른 시일 내에 종회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승리자의 아량’ ‘종회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 등에서 정부 중재안에 대한 중앙종회 측의 입장이 담겼다. 

중앙종회는 이날 임기 3개월을 앞두고 전원 사퇴한 중앙종회의원 보궐선출과 종단사태를 수습할 원로 21명도 선출했다. 그러나 종정스님을 대신해 종단을 수습할 원로들을 모두 종회에서 선출했다는 점은 원로회의가 개운사 측의 입김에 좌우될 소지가 다분했다. 실제 원로회의는 새로 48명의 중앙종회의원을 선출하면서 이두‧도문‧월남‧무진장 스님을 제외하고 전원 개운사 측 종회의원으로 재선출했다. 종정스님 측이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앙종회는 예정된 수순대로 종단 집행부 구성에 착수했다. 중앙종회는 그해 5월6일 선학원 회의실에서 임시회를 열어 종회의장에 서운, 부의장에 용명‧월남 스님을 선출하고, 종단원로와 중앙종회의원 등이 포함된 18명의 종정추대위원회를 구성해 새 종정에 고암 스님을 추대했다. 총무원장에 대한 선거를 진행해 표결 끝에 월하 스님을 총무원장에 선출했으며, 총무원 각 부장에 대한 인준도 결의했다. 

그러나 서옹 스님 측은 중앙종회의 결의에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서옹 스님은 5월10일 성명을 발표하고 정부 중재안을 거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서옹 스님은 “숭고한 법통을 수호하고 불교중흥의 새 역사를 이룩하고자 종정권한이 미치는 한 직접 행사할 것”이라며 종정직 복귀를 선언했다. 종단 분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조계종은 혼란이 거듭됐다. 그해 5월14일 부처님오신날에 고암 종정의 법어와 서옹 종정의 법어가 따로 발표됐고, 종단 봉축법요식도 개운사와 조계사에서 각각 열리는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이런 가운데 서울고등법원은 7월8일 설조 스님 등이 제기한 ‘종정 등 직무집행정지 및 직무대행자선임 가처분’ 신청에 대해 서옹 스님 측의 이의신청을 배척하고, 서옹 종정의 직무정지를 결정했다. 중앙종회 측이 추대한 고암 스님을 종정직무대행자로도 선임했다. 

법원으로부터 적법성을 인정 받은 개운사 측은 조계사 총무원에 대한 인계절차에 착수했다. 개운사 측은 7월12일 서울민사지법의 조계종 동산인도 가처분 결정에 따라 7월27일 강제집행에 나섰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조계사 측이 강하게 저항하면서 양측 사이에서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투석전이 벌어졌고, 10여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조계종에 대한 비판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서옹 스님 측은 재판에 진 데 이어 따가운 비판까지 받게 되면서 더 이상 설자리가 없었다. 결국 서옹 스님은 7월31일 오전 서울 코리아나호텔에서 고암 스님과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종정권한 이양”을 약속했다. 이에 따라 조계사‧개운사로 양분됐던 조계종도 분규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이날 서옹‧고암 종정이 발표한 공동성명서는 또다른 갈등을 암시했다. ‘동아일보(1978년 7월31일자)’에 따르면 두 스님은 공동성명서를 통해 “앞으로 종단정상화를 위한 여러 가지 문제에 상호 적극 협력하기로 했다”면서 “종단의 시비를 극한화시킨 양측 당사자들도 자숙해 참회의 정신으로 불교화합에 협조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서옹 종정의 명예로운 퇴진을 위한 의례적인 표현일 수도 있었지만, ‘양측 당사자들의 자숙과 참회’ 등은 이번 사태의 최종 승자로 볼 수 있는 개운사 측에도 책임을 묻는 것이어서 논란의 소지가 됐다. 실제 서옹 종정으로부터 권한을 인계받은 고암 스님은 8월2일 새 총무원장에 성수, 규정원장에 월남 스님을 임명한 데 이어 총무원 부장단 인사까지 단행했다. 이는 5월6일 중앙종회가 선출한 월하 총무원장 체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총무원장을 중앙종회에서 선출하겠다는 종헌 체계를 부정함과 동시에 종정중심제로의 회귀를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암 스님은 한발 더 나아가 8월16일 “종정의 모든 권한을 중앙종회에 위임한다”는 중앙종회 측과의 합의를 무효화시켰다. 사실상 새로운 종정중심제를 위한 시동이었다. 개운사 측으로서는 자신들이 추대한 고암 종정으로부터 뒷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개운사 측은 다시 반발했다. 이에 따라 서옹 종정과 중앙종회의 갈등으로 시작된 조계종 분규는 다시 고암 종정과 중앙종회(개운사)의 갈등 양상으로 번져갔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87 / 2019년 5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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