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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㉒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①

기자명 최병헌

진평왕 이후 불교식 왕명시대 넘어 석존의 혈통과 연결

법흥왕 이후 진흥왕 때부터
진(眞)자를 붙인 불교식 왕호

진평왕, 석존 아버지 이름인
백정 사용·부인은 마야부인

왕실혈통 석존가족에 의제
신성혈통 종교적 권위확보

불교식 왕명은 성골 끝나는
진덕여왕 때까지만 사용돼

성골은 성스러운 유골 의미
부처님 사리 용어에서 유래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네팔 룸비니 전경. 법보신문 자료사진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네팔 룸비니 전경. 법보신문 자료사진

진흥왕 37년(576) 8월 왕권강화와 영역확장, 불교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이룬 진흥왕이 세상을 떠나고, 둘째 아들인 사륜(舍輪, 또는 金輪)이 왕위를 이어 25대 진지왕(眞智王)이 되었다. 진흥왕의 맏아들인 동륜(銅輪)이 동왕 27년(566)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33년(572)에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진지왕은 원년(576) 거칠부(居柒夫)를 상대등으로 삼아 보필케 하고, 2년(577) 봄 2월에 시조묘인 신궁(神宮)에 제사를 지내고 크게 사면을 행하면서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의욕적인 출발을 하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백제의 성왕이 피살당한 이후 국가적 위기를 수습하고 2년(577)부터 침입해오기 시작한 백제군을 연이어 격퇴하고 내리서성(內利西城) 등을 쌓아 국경수비를 강화하였다. 또한 3년(578) 중국 남조 진(陳)에 사신을 보내어 국제적인 교류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진지왕 4년(579) 7월17일 즉위 4년 만에 사망함으로써 왕위는 동륜태자의 아들인 진평왕에게 넘겨졌다. 진지왕의 죽음에 대해서 ‘삼국사기’에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지만, ‘삼국유사’ 도화녀비형랑조에 의하면, 나라가 어지럽고 음난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폐위됐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왕권을 강화하려다가 귀족들의 반발을 사서 귀족회의, 즉 화백회의에서 폐위당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자료의 부족으로 그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하지만 진지왕의 아들로서 용수(龍樹 또는 龍春)가 건재하여 활약하였던 사실을 감안하면 정상적인 왕위계승은 아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진지왕계는 뒷날 용수를 거쳐 춘추대에 이르러 29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함으로써 동륜태자계의 성골왕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진골왕 시대를 열었다. 

진지왕을 이은 26대 진평왕(眞平王, 579~632)은 이름이 백정(白淨)이고 진흥왕의 맏아들인 동륜태자의 아들이다. 진평왕의 재위기간은 54년이나 되는데, 진흥왕 때의 비약적인 왕권강화와 영역확장을 바탕으로 하여 대내적으로는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 공부(貢賦)를 맡은 조부(調府), 의례(儀禮)와 교육을 담당하는 예부(禮部), 그리고 선부(船府)·승부(乘府)·영객부(領客府)·상사서(賞賜署)·대도서(大道署)·시위부(侍衛府) 등의 중앙관서의 대대적인 정비를 통해 지배체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지명(智明)·원광(圓光)·담육(曇育) 등의 유학승을 통한 불교발전의 전기를 마련하여 왕권강화와 국가발전의 사상적 토대를 확고히 구축함으로써 중고시기 진흥왕을 이은 제2의 전성기를 맞게 하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고구려·백제의 침공에 대항하여 수(隋)·당(唐)과의 적극적인 통교를 통해서 대중외교(對中外交)의 기반을 확고히 다짐으로써 뒤이은 선덕여왕·진덕여왕 때의 나당연합의 단서를 여는 업적을 이루었다. 

‘삼국사기’ 진평왕조에서는 “왕은 태어날 때부터 기이한 용모였고, 신체가 장대하고 뜻이 깊고 굳세었으며, 지혜가 밝아 사리에 통달하였다”고 하여 위인의 풍모를 가진 것으로 묘사하였다. ‘삼국유사’ 천사옥대조에서도 진평왕의 신체가 장대했음을 더욱 구체적으로 서술하여 “진평왕의 키가 11자이었는데, 내제석궁(內帝釋宮, 또는 天柱寺)에 행차하였을 때 왕이 돌계단을 밟으니 세 개의 돌이 부러졌다. 왕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이 돌을 옮기지 말고 뒷사람들에게 보여주라’ 고 하였으니, 성 안에 있는 움직이지 못하는 다섯 돌(不動石) 중의 하나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교사(郊祀)나 종묘의 큰 제사 때에 진평왕이 매던 옥대의 길이가 10위(圍, 아름), 새겨 넣은 장식이 62개였다고 하며, ‘삼국사기’ 경명왕 5년조에서도 이 옥대는 매우 길어 보통 사람이 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천사(天使, 忉利天)가 내려 주었다는 진평왕의 성대(聖帶)는 진흥왕 때의 황룡사 장육존상, 선덕여왕 때의 황룡사 9층목탑과 함께 신라의 호국3보의 하나로 받들어졌으며, 고려 태조 20년(937) 경순왕이 바치자 고려 태조는 내고(內庫)에 보관케 하였다고 한다.  

진평왕이 위대한 인물이고 신성한 존재였다는 점은 그 자신과 가족들의 이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진평왕 자신의 이름은 백정(白淨), 왕비의 이름은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갈문왕 복승(福勝)의 딸이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선비(先妣) 마야부인 이외에 손씨 승만부인(僧滿夫人)이라는 후비가 있었다고 하나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진평왕 원년(579) 8월 친동생 백반(伯飯)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 국반(國飯)을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책봉하였던 것으로 보아 진평왕에게는 백반과 국반의 두 친동생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진평왕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덕만(德曼)과 천명부인(天明夫人)이었다. 덕만은 진평왕을 이어 즉위하여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되었으며, 천명부인은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또는 용춘)와 결혼하여 김춘추(29대 무열왕)를 낳았다. 그리고 진평왕의 조카딸이며, 국반의 딸인 승만(勝曼)은 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이 되었다. ‘삼국유사’ 무왕조에서 진평왕의 딸로 등장하는 선화공주는 설화적인 허구의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진평왕 가족들의 이름 가운데서 주목되는 것은 불교의 석존 가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 다수 발견된다는 점이다. 진평왕의 이름 백정은 석존의 아버지, 부인인 마야부인은 석존의 어머니, 백반과 국반 등 친동생 2인은 모두 석존의 3촌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석존의 생존연대와 가족관계의 사실은 분명히 밝혀지지 못하였는데, 조사한 바로는 다음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카비라국의 사자협왕(師子頰王, Siṁhahanu-rāja)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정반왕(淨飯王, 또는 白淨, Śuddhodana-rāja), 백반왕(白飯王, Śuklodana-rāja), 곡반왕(斛飯王, 또는 穀淨, Droņodana-rāja), 감로반왕(甘露飯王, 甘露淨, Amŗtadana-rāja) 등이었다. 그리고 정반왕의 부인으로는 자매 사이인 마야부인(摩耶夫人, Māyā)과 파자파티(波闍波提, Prajāpatt)가 있었고, 두 부인에게서 각각 시탓르타(悉達陀, Śiddhārtha)와 난타(難陀, Nanda) 등 이복형제를 낳았다, 그밖에 석존의 출가전의 부인으로는 야소다라(耶輸陀羅, Yaśodharā), 그 아들로는 라후라(羅睺羅, Rāhula)가 있었다. 그리고 4촌 형제들로는 아난타(阿難陀, Ānanda), 데바닷타(提婆達陀, Devadatta), 아누룻타(阿那律, Aniruddha) 등이 있었다. 그런데 석존을 비롯해서 석존의 이복동생, 사촌형제, 아들, 계모, 부인 등이 모두 출가하고 있었음이 주목되는데, 카비라국의 멸망과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진평왕인 백정과 그의 부인 마야부인은 석존 부모의 이름에서, 진평왕의 두 동생인 백반과 국반은 석존의 3촌의 이름에서 각기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는 아들이 없고, 2인의 딸만 낳았는데, 큰 딸인 덕만이 선덕여왕이 되었다. 선덕(善德)이라는 왕호는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에 의하면, “부처가 입멸한 뒤 700년이 지나 선덕바라문이라는 여성이 통치자가 되는데, 그때 이름이 아숙가(阿叔伽, Aśoka)라고 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신라의 선덕여왕의 왕호는 이것에 근거한 것이 틀림없다고 본다. 그리고 국반의 딸로서 진덕여왕이 된 승만(勝曼)은 ‘승만경(勝鬘經)’의 주인공인 승만부인의 이름에서 취한 것이며, 앞서 진평왕의 후비인 승만부인(僧滿夫人)도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이것에 근거한 것으로 본다. 원래 ‘승만경’의 중심인물인 승만부인은 코살라국의 국왕 바사닉(波斯匿, Prasenajit)의 딸이었다고 하는데, 여성 재가불자의 대표적 인물로 추앙되었다. 이상 진평왕과 그 부인, 그리고 형제들로 구성된 최소의 왕실 가족들의 이름은 그대로 인도 석존의 가족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고, 그들의 소생인 딸들의 이름도 모두 불교경전에서 따옴으로써 이른바 진종설화(眞宗說話)를 성립시키게 되었다.

한편 진평왕의 두 동생을 갈문왕으로 책봉하면서 진정(眞正)과 진안(眞安)이라는 갈문왕의 호칭을 부여한 것은 중고시기 신라의 모든 왕호에 ‘진(眞)’ 자를 붙인 것과 같은 취지로 보인다. 불교를 처음 공인한 23대 법흥왕 이후의 중고기 왕호에는 한결같이 불교적인 의미를 지닌 ‘진’자를 붙이고 있었다. 즉 법흥왕을 계승한 24대 진흥왕부터 25대 진지왕·26대 진평왕·28대 진덕여왕 등이 모두 진자를 붙이고 있으며, 27대 선덕여왕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진자를 붙이지 않았으나 역시 불교식 왕명임에는 변함이 없다. 아울러 왕위가 부자로 세습되면서 왕위에 오를 수 없던 왕의 동생이나 왕비의 부친에게 갈문왕을 책봉하는 관례에 따라 진평왕은 두 동생을 갈문왕으로 삼으면서 왕호에 ‘진자’를 붙이는 것과 같이 진정과 진안으로 이름하였던 것이다. 

23대 법흥왕부터 28대 진덕여왕까지의 ‘중고’시기는 이른바 불교식왕명시대라고 칭할 수 있는데, 앞의 진흥왕과 진지왕의 시기는 전륜성왕의 이름을 붙임으로서 그 통치이념을 추구하였다. 그에 비하여 동륜태자 계통의 진평왕과 선덕여왕·진덕여왕의 시기는 진평왕 직계의 좁은 범위의 왕실가족의 혈통을 석존의 가족에 의제(擬制)하여 인도불교의 신성한 혈통에 연결함으로써 부처님과 동일시하는 종교적 권위의 확보를 추구하였다. 정치와 불교가 일체화된 일종의 제정일치의 형태라고 할 수 있는데, 청동기시대의 무속종교의 천신신앙을 불교신앙으로 대체하여 한 차원 높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불교식 왕명이 신라의 왕실계보에서 성골(聖骨)이 끝나는 진덕여왕까지만 붙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성골은 김씨왕족 가운데도 왕이 될 자격을 가진 최고의 골품이었다. 같은 왕족이면서도 진골과 구별되는 특별한 신분이었으나 28대 진덕여왕이 사망하면서 소멸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성골과 진골의 개념구분에 대해서는 부모양계가 왕종(王種)인가 또는 한쪽만 왕종인가로 구별된다는 종래의 견해부터 국왕의 최소 가계집단(家系集團)에 속하는 왕족인가 아닌가로 구별된다는 근래의 견해 등 다양한 주장이 제시되어 왔으나, 아직 그 실상은 분명히 밝혀내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나 성골이라는 개념이 원래 성스러운 유골, 곧 부처님의 사리를 가리키는 용어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불교와의 관련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라고 본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87 / 2019년 5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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