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반려동물] 1. 불교에서 바라보는 동물
[불교와 반려동물] 1. 불교에서 바라보는 동물
  • 이재형 기자
  • 승인 2019.05.07 14:14
  • 호수 148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물도 억겁윤회 속 부모형제
깨달음을 향해 함께 가는 도반

고통 싫어함은 모든 생명 특징
불교는 차이 있어도 차별 없어
인간이 깨달음 가능성 높지만
행위 따라 처지 바뀔 수 있어

동물이 중생교화 존재로 등장
말 모습 마두보살은 관음 화신
많은 스님들 동물 인연돼 출가
연민은 보리심의 핵심적 요소

동물 존중은 서양이 훨씬 앞서
동양은 동물학대 곳곳에 만연
‘생명’은 21세기 새 패러다임
불교사상은 실천할 때 참 의미
부처님이 전생에 바라문이었던 흰 개를 제도하고 있는 모습. 2세기 경. 심재관 상지대 교수 제공

불교에서는 존중받아야 할 생명이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개와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은 물론 벌레 한 마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마땅히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이는 ‘모든 생명이 고통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선호한다’는 불교의 기본 전제에서 출발한다. 또한 산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는 불살생(不殺生)과 나와 다른 존재가 둘이 아니라는 자타불이(自他不二)는 다른 존재의 고통을 이해하고 평안하게 해주려는 ‘공감’이라 할 수 있다.

초기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는 다른 생명을 공격하거나 다치게 해서 안 되는 이유로 “내가 그렇듯이 이들도 그러하다. 이들이 그렇듯이 나도 그렇다. 자신을 비교의 기준으로 삼아 스스로 죽이거나 다른 사람을 시켜 죽여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에 비춰 다른 생명의 고통을 면밀히 살피고 헤아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적 세계관은 초기불교부터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일관된다. 시대와 지역적 차이를 넘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곳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기도 하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영혼이나 이성의 존재 유무로 판단했던 서구와 달리 불교에서 인간과 동물은 전생의 행위 결과에 따라 태어난 형상의 차이라고 보았다. 아무리 인간일지라도 악한 일을 반복하면 다음 생에 다른 존재로 태어날 수 있으며, 동물도 선한 일을 자주하면 다음 생에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다. 인간과 동물 모두 카르마(karma)라는 행위의 결과를 받는 주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동물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을 뿐더러 언제든 처지가 달라질 수 있는 가변적인 존재인 셈이다. 부처님은 초기경전인 쌍윳따니까야에서 이렇게 설했다.

“비구들이여, 긴 윤회의 시간 동안에 그대들이 머리를 잘려 흘린 피의 시내와 사해(四海)의 물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느냐?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오랫동안 암소들이었고 암소들로서 머리가 잘려질 때 흘린 그 피의 시내가 사해의 물보다 더 많았다. 그대들은 오랫동안 버팔로, 양, 염소, 사슴, 닭, 돼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간 동안 이전에 그대들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아들, 딸이 아니었던 생명(유정)을 찾기란 쉽지 않다. 어떤 연유에서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부처님 말씀은 현재의 수많은 동물들이 과거의 내 모습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억겁의 세월을 윤회하는 동안 나 또한 수많은 동물의 모습으로 살았던 존재라는 것이다. 부처님 전생이야기와 관련된 문헌인 ‘자타카’에 숱한 동물들이 선행과 악행을 행하는 주체로 등장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동물이라고 열등하게 취급받거나 인간이라고 무조건 우월한 존재가 아니다. 다만 인간은 도덕성의 구현정도와 수행능력이 뛰어나고, 그로인한 열반의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인간됨 자체가 희귀하고 고귀하다고 여긴다.

‘자타카’의 바라문과 염소 얘기도 흥미롭다. 제사를 주관하는 바라문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한 염소가 있었다. 그런데 이 염소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더니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 아닌가. 염소의 이상한 행동에 의아해진 바라문이 이유를 묻자 염소가 대답했다. “지난 오백 생 동안 염소로 거듭 태어나면서 괴로워하다가 이제야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기에 기뻐서 웃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를 죽인다면 당신도 나와 같은 운명으로 오백 생을 고통받을 것임을 잘 알기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 말을 듣고 너무 놀란 바라문은 곧바로 염소를 풀어주었다. 잠시 후 번개가 염소를 내리치자 염소가 인간이 됐다는 얘기다. 비록 지금은 인간이 동물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더라도 그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까지도 인연의 끈으로 연결된 무차별의 존재임을 역설한다. 온 우주가 힘을 모았기에 지금 보이는 나무와 풀과 돌멩이 하나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종의 행복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인간 종이 평안할 수 없으며, 동물을 비롯한 다른 종에 대한 합당한 권리를 부여하지 않고서는 인간 종의 권리도 온전히 보장할 수 없음을 일러준다. 대승불교 문헌인 ‘범망경’ ‘능엄경’ ‘능가경’ 등에서 살생과 육식은 돌이킬 수 없는 악업을 낳아 윤회를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족쇄가 된다고 설하고 있으며, 특히 ‘입능가경’에서는 “육식은 자비종자를 끊는 일”이라고까지 경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승불교에서 동물은 종종 중생을 교화하는 존재로도 등장한다. 관세음보살의 현신 중에 말의 머리 형태를 띤 마두관음(馬頭觀音)이 있다. 전륜성왕의 명마가 종횡무진하며 수많은 마구니를 굴복시키듯 마두관음은 위신력과 용맹함으로 생사의 큰 바다를 누비며 중생의 무지를 깨뜨리고 정법을 드러내는 관음의 화신이다. 또 ‘대방등대집경’에는 남섬부주의 여러 섬에 살고 있는 12종의 동물들이 등장한다. 띠와 관련된 12지의 기원이기도 한 이들은 각기 보살의 화신으로서 매년 열두 달에 걸쳐 서로 교대하며 인간계와 천상계의 중생을 두루 교화한다. 동물은 인간보다 욕망과 본능에 더 휩쓸리는 특성을 지니지만 때때로 인간의 무지를 일깨우고 깨달음으로 안내하는 선지식인 것이다.

한국불교 설화와 역사에 나타나는 동물도 결코 열등하지 않다. 신라 원성왕 때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켰다는 기록도 그렇다. ‘삼국유사’ 감통편에 따르면 젊은 시절 김현은 경주 흥륜사에서 탑돌이를 하다가 호랑이가 현신(現身)한 처녀를 만나 정을 통했고, 그 호랑이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김현을 도와 큰 벼슬을 얻도록 도왔다. 김현도 죽은 호랑이를 위해 호원사(虎願寺)를 지어 극락왕생을 빌었으며 임종을 앞두고 과거 호랑이와의 신이한 인연을 적어 세상에 전했다고 한다. 또 ‘삼국유사’ 효선편에는 김대성이 토함산에 올라 곰을 사냥하고 산 밑 마을에서 자는데 꿈에 자신이 죽인 곰이 나타나 자신을 위해 절을 지어주지 않으면 잡아먹겠다고 하자 곰을 잡은 그곳에 장수사(長壽寺)라는 절을 세웠다고 전한다. 이 같은 일화들은 인간과 동물이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인과와 윤회로 얽힌 수평적 관계임을 보여준다.

동물의 죽음에 대한 연민과 외경으로 출가한 고승들도 많다. 신라의 자장 스님은 사냥해서 잡은 꿩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었고, 7세기 혜통 스님은 수달과의 인연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어느 날 수달을 잡아먹은 뒤 뼈를 정원에 버렸는데 다음날 가보니 그 뼈가 사라졌다. 신기하게 여겨 핏자국을 따라갔더니 뼈가 예전에 살던 구멍에 돌아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있는 게 아닌가. 이 모습을 보고 출가한 스님이 혜통이었다. 통일신라 율사 진표 스님도 동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사냥꾼 집안 출신이었던 그가 어느 날 산짐승을 쫓다가 밭두렁에서 잠시 쉴 때였다. 그의 눈에 개구리들이 들어왔고 반찬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30여 마리를 잡아 버드나무가지로 꿰어 물속에 담가놓았다. 그런데 산에서 사슴이 보이자 뒤쫓았고 돌아가던 길에 가져가려던 개구리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다음해 봄 그가 예전 밭두렁을 지날 때였다. 근처에서 구슬피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를 듣고 가서 보니 버드나무에 꿰인 그 개구리들이었다. 큰 충격을 받고 곧바로 출가한 스님은 이후 처절한 수행을 지속했고 평생 민중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성자의 삶을 살았다.

고승들의 출가인연에 유독 동물들의 고통과 죽음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연민이 곧 발심의 근간임을 시사한다. 나약한 존재에 대한 자비심이 있어야 보리심을 일으킬 수 있으며, 불교의 궁극적 이상인 성불에도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는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인간과 동물의 생명 무게가 다르지 않음을 역설해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동물의 생명권 논의를 주도하는 것은 서구다. 수십만 명이 가입된 동물보호단체들이 많고, 사냥, 동물싸움, 생체실험까지 반대하는 운동이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는 것도 서구사회다. 반면 불교전통이 오랜 아시아에서 동물들은 여전히 학대와 인간 먹거리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21세기는 생명의 시대다. 이제는 인권을 넘어 모든 존재들의 생명권이 보장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 앞에 섰다. 불교는 그 요청에 가장 걸맞은 탁월한 사상이다. 그 구슬들을 꿰어 중생계를 이롭게 하는 것은 우리 불자들과 종단의 몫이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488 / 2019년 5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