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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노동

기자명 유정길
  • 법보시론
  • 입력 2019.05.07 16:10
  • 수정 2019.05.08 09:32
  • 호수 1488
  • 댓글 3

1년간의 공양주 생활을 하면서
나는 한때 1년 남짓 공양주로 일했다. 상주대중 40여명의 아침공양을 위해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 했다. 사시예불과 제사도 준비해야 했고 오후에 장을 보고 다시 저녁공양을 준비하는 일과를 반복했다. 매일 4시30분에 일어나 공양간 문을 열던 어느 날, 깊은 탄식이 나왔다. ‘오늘도 어제했던 일을 또 해야 하는구나.’ 그 순간 깨달았다. ‘어머니들이 항상 이렇게 일을 해왔구나, 매일 이렇게 반복된 일을 해오셨구나.’ 그 이후 노동의 성격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여성의 사회참여가 높아지면서 남녀 간 일의 구분이 적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성별에 따른 역할분담이 나뉘어 있고 차별이 많이 남아 있다. 아버지의 일은 돈을 버는 것이다. 일은 할수록 돈으로 쌓이거나 성과로 남거나 직위와 사회적 명성을 얻는 등 축적이 일어난다. 그래서 수직에 가깝게 가파르게 그리고 빠른 속도로 많은 돈 벌기, 높은 명예, 큰 권력을 추구한다. 이러한 아버지 노동을 ‘직선적인 노동’이라고 표현해 보자. 

돈되는 아버지 노동과 돈안되는 어머니 노동
어머니의 일은 하루 종일 고생하면서도 표시가 나지 않고 돈도 안 된다. 임신, 육아, 청소, 요리, 집안정리 등 모든 가사노동이 그렇다. 그런데도 간혹 남편으로부터 ‘집에서 놀면서 뭐했냐’는 핀잔까지 듣는다. 이러한 여성의 노동은 매일 동일하게 반복되며 돈이나 경력, 명성이 쌓이는 축적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이것은 ‘순환적인 노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지불노동과 비지불노동
그런 측면에서 돈 버는 지불노동(=임금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오늘날, 돈 안 되는 어머니의 노동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며 그 밑을 떠받치는 거대한 비자본주의적 노동이다. 오늘날 자연을 파괴하는 환경재앙, 생명의 죽임, 생태적 위기를 초래한 것은 무한히 성장하고 무한히 발전하는 바로 ‘직선적 사회’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의 노동이 바로 ‘직선적인 노동’이다. 현대사회의 발전은 ‘자원은 무한하다’는 허황된 패러다임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뿐인 지구’라는 말은 우리의 터전은 유한하다는 말이다. 유한한 자원의 세계에서 무한을 향해 벌이는 모든 발전의 패러다임은 잘못된 것이며 결국 오늘날 인류를 파탄 내는 원인을 제공한다. 이에 반해 ‘어머니 노동’인 ‘순환적인 노동’은 생명을 보살피고, 키우며, 살리는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사회에는 ‘돈 되는 일’, 임금노동만을 중시한다. 그러나 실제 따져보자. 우리사회가 정말 이렇게 돈 되는 임금노동으로만 움직일까? 부인이 밥해주는 일, 아이가 방끗 웃어주는 일, 이웃끼리 서로 돕는 일 등은 모두 돈 안 되는 일이다. 사찰 등 종교단체, 자원봉사센터 등에는 돈 되는 일이 아닌 일에 수많은 선한 의지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처럼 돈 안 되는 일을 ‘무불노동’ ‘비지불노동’ 또는 ‘그림자 노동’이라고도 한다.

어머니 노동에 세상을 구원할거야
빙산의 10분의 1이 위에 떠있고 나머지 10분의 9는 물속에 있듯이 오늘날 임금노동은 전체에서 불과 10%밖에 안 된다. 나머지 90%의 그림자 노동이 우리사회를 떠받치고 있다. 인권을 지키고 평등한 사회, 자연환경을 위해 돈 안 되는 그림자 노동, 공짜노동, 자원봉사노동을 하는 보살들이 만들어준 아름다운 환경 덕분에 그 은혜를 입고 나는 편히 살고 있다. 그래서 나도 시간을 만들어 자원활동도 하고 사회단체에 후원하며 보은을 해야 한다.

돈 되는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일수록 각박해지고, 돈 안 되는 노동이 많은 사회일수록 따뜻해진다. 이처럼 아버지노동으로 대표되는 남성성의 사회를 어머니노동으로 대표되는 여성성의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녹색적 가치 생태사회가 강조하는 중요한 메시지다.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 ecogil21@naver.com

 

[1488 / 2019년 5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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