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특집 인터뷰] 국립현대미술관장 윤범모
[부처님오신날 특집 인터뷰] 국립현대미술관장 윤범모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9.05.07 16:25
  • 호수 148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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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선을 넘는 자유인 “주인공으로 살아야 진정한 예술가”

동아 신춘 미술평론가로 등단
경주엑스포·창원비엔날레 감독
근대예술가·월북작가도 재조명

일반인에게 난해한 현대미술은
작가·미술관 모두에게 책임 있어

20세기 전반 단 한 명의 예술가
근대 최초 조각가 김복진 손꼽아
조각가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
그 영향력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국립현대미술관 내 전시관에서 만난 윤범모 관장은 여전히 트레이드 마크인 모자를 쓰고 있다.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지만 자리를 잡고 서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특유의 자신감이다.  

‘국립’과 ‘관장’이라는 직함이 주는 선입견만 없다면 그는 여전히 자유로워 보인다. 트레이드마크인 모자는 여전하지만 그 흔한 넥타이는 사양했다. 그래도 카메라 앞에서 옷섶을 잡아주는 정도의 매너가 그와 세상의 타협선일지 모른다. 

지난 2월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임명된 윤범모(69) 관장의 이력은 빼곡하다. 가천대 교수, 미국 사우스플로리다대 연구교수를 역임했고 최근까지도 동국대 석좌교수로 강단에 섰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예술총감독, 창원 조각비엔날레 총감독으로 현장을 지휘했고 한국민화센터 이사장, 가나문화재단 상임이사, 한국큐레이터협회장 등 굵직한 단체에서도 역량을 발휘했다. 

더 오래전으로 올라가보면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미술평론가로 등단 후 반평생 넘게 미술평론가로 활동했다. 주목받지 못했던 근현대 예술가 발굴과 월북작가에 대한 재평가도 묵직하다. 나혜석, 김복진에 대한 연구는 그들을 근현대미술사 속에서 부활시키며 미술사학자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런가하면 주류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민중미술, 북한미술에 대한 관심과 행보는 그가 실제로 10여년의 시간 매진했던 오지탐험과도 닮아있다. 

벽을 넘고, 금기에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는 “외로웠다”고 고백한다. 그런 윤범모를 이제와 ‘국립현대미술관장’이라는 단 하나의 정의 속에서 만나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미술사학계를 향해 “한 민족의 미적 특성을 한두 단어로 특화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의문을 던지면서도 “굳이 필요하다면”이라고 한 발 물러서 ‘무애미론’을 제시하던 그의 모습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앞은 늘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이 앞을 지나다니는데 그들 중 미술관에 들어오는 사람이 10%나 될까요. 불행한 일입니다. 미술관은 아이디어의 창고이자 시대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인데 말입니다.”

관장 취임 3개월여, 현대미술 그리고 현대미술관에 대한 정의가 그의 소감을 대신한다. 

반평생 미술평론가이자 미술사학자로 살아왔지만 그것만으로 윤범모를 정의하기에는 부족하다. 스스로는 ‘시인’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조선말까지도 ‘미술’이라는 말이 없었다. 근현대의 신조어다. 우리 역사에서 조선왕조까지는 서화의 시대였다. ‘서화동체’ 시대에서 미술의 시대로 독립한 것이 불과 100여년이다. 그나마도 전반기는 식민지, 후반기는 분단기다. 전반부를 근대미술, 후반부를 현대미술이라고 크게 구분하지만 그 경계선도 분명하지가 않다. 현대미술은 표현 방식이나 매체, 재료, 형식뿐 아니라 내용도 무제한이고 복합적이다. 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작품들도 많다. 시대와 동행하는 장르, 그것이 현대미술이자 현대미술의 특징이다.” 

▲정의가 어려운 만큼 일반인은 즐기기가 쉽지 않다.
“현대미술의 폭이 넓고 깊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자꾸 접하면 친숙하게 된다. 낯설 때는 어렵지만 자꾸 접하면 좋아진다. 판소리를 듣는 외국인이 처음부터 좋겠나. 자주 접하고 친숙해지면 본질을 이해하게 되고 재미도 느끼게 될 것이다.”

▲현대미술과의 거리감이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미술계와 미술관 모두의 책임이다. 미술을 너무 난해하고 고답적으로 만들어서 일반대중들이 거리감을 느끼게 한 원천적인 문제점이 작가에게 있다면 작가와 대중의 중간 매개가 돼야할 미술관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관장 취임 후 지난 3개월 어떻게 보냈는지.
“그야말로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에 자리하고 있는 ‘도심 속 미술관’과 ‘고궁 속 미술관’ 외에도 청주의 ‘수장고 속 미술관’, 과천의 ‘자연 속 미술관’까지 전국에 4관 체제로 이루어진 아시아 최대 규모의 미술관이다. 전시관의 규모와 소장 작품, 기획력과 기술력 등 모든 면에서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4관의 살림을 두루 살피고 중심과 방향을 세워나가야 한다는 점을 유념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서 꼭 이루고 싶은 성과가 있다면?
“이웃집 같은 미술관을 만드는 것이다. 미술관은 아이디어와 상상력, 그것들이 주는 즐거움이 넘치는 곳이다. 그런 곳을 이웃집처럼 여길 수 있어야 되는데, 이웃집 문을 두드리기가 힘든 세상이 되어서 그런지 쉽지가 않다. 무엇보다 전문가부터 애호가, 일반인, 지나가다 들른 외국인들까지 다양한 관객의 눈높이에 맞는 다채로운 미술관 사업을 개발해서 제공하는 것이 미술관의 역할이다. 단시간에 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2019년 공립미술관 순회전시’ 사업도 연장선상인가. 
“지역 협력망사업으로 양질의 전시를 제공해 현대미술을 일반인들이 친숙하게 여길 기회를 만드는 사업이다. 우리나라에도 각 지역마다 공·사립미술관이 많다. 그런 미술관에 우리 미술관의 소장품을 대여 전시해서 수준 높은 미술작품 전시를 기획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박사학위 연구주제가 ‘김복진’이다. 근대미술사에 있어 김복진의 의미는.
“20세기 전반에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서 1명의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나의 선택은 김복진이다. 그는 매우 특수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다. 근대기 최초의 조각가일 뿐 아니라 1925년에 결성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문학가들의 실천단체’ 일명 ‘카프(KAPF)’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물론 사회주의 운동이 중심이었지만 카프의 행동강령 가운데 하나가 독립운동이었다. 독립운동사에서 그의 영향력도 적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무려 5년간이나 감옥살이를 했다는 점이 이를 가늠케 한다.”


 

경전에 주석달 듯 불교미술에도 새로움·상상력 더하길 주저 말아야


동국대서 탄허 스님 만난 것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 여겨

 

현대 불교미술 발전 위해서는
창작·계승 영역 명확히 구분해야 


우리 역사 최고 철학가는 원효
한국미 규정 굳이 필요하다면
‘무애미’가 가장 적절한 단어

 

미술관의 주인공이라 여기면
누구나 쌓여 있는 보물 가질 것

동국대 학부 재학시절 탄허 스님을 만난 것을 인생 최고의 행운으로 손꼽는 윤범모 관장은 “탄허 스님에게서 육조단경을 배우며 육조 혜능에게 매료당했다. 내가 만약 영화감독이라면 육조 혜능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의 인생 좌우명은 ‘수처작주’다. 

윤 관장은 2006년 ‘김복진 연구’로 동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활동한 한국 조각가’ 정도로만 알려져 있던 김복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였다. 근대 최초의 조각가이자 미술평론가, 문예운동가,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다채로운 행보를 보인 김복진에 대한 심도있는 조명이었다. 전통적인 불상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근대 불상의 범본을 이룩했다고 평가되는 김복진에 대한 연구는 전통과 진보라는 양 극단의 섭렵을 추구해온 윤 관장의 노력이 맺은 또 하나의 결심이었다. 

▲김복진에 주목한 계기는. 
“김복진은 39살에 요절했고 유작이 남아있지 않다. 동경미술학교 졸업 후 작품과 사회 활동을 시작했고 그 와중에 5년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1940년 39살로 요절하기까지 그가 실제 활동한 시기는 10년 남짓이다. 그 짧은 기간 이룩된 김복진의 영향력은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불교와 김복진을 접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결과였다.”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불교미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인가.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며 불교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다. 한국미술 절반이 불교미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미술, 불교를 모르면 우리 문화의 반을 이해할 수 없다. 한국미술사 공부에서 불교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인연 있는 스님이 있다면.
“동국대에서 탄허 스님을 만난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고 행운이었다. 특히 탄허 스님에게 ‘육조단경’을 배우면서 육조 혜능이 얼마나 멋있는 인물인지를 깨닫게 됐다. 내가 영화감독이라면 혜능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을 정도다. 그렇게 감동과 깨달음을 주는 인물이 또 있을까 싶다.”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뿐 아니라 시인이라는 직함도 갖고 있다.  
“시인이 가장 끌린다. 시는 연필 들 힘만 있으면, 그 힘도 없으면 입으로만 써도 된다더라.(웃음) 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실제로 그는 ‘멀고 먼 해우소(2011)’ ‘토함산 석굴암(2015)’ 등 여러 편의 시집을 출간하고 활동하는 시인이다. 최근에는 102살의 현역 화가로 2016년 100살 기념 개인전을 열었던 김병기 화백과의 인터뷰를 통해 근현대 한국미술사를 새롭게 조명한 글을 모아 출간한 ‘백년을 그리다’로 격월간 ‘에세이스트’가 선정한 ‘시대의 에세이스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의 매력은 무엇인가.
“미술이랑 다를 게 없다. 시를 쓰면 관찰력, 표현력, 상상력이 커진다. 꽃, 돌맹이, 나무 하나도 다르게 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시는 대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고 그것이 창작의 첫 출발이다.”

▲금기·새로움에 대한 도전, 창작·상상력 이런 것들을 늘 강조하는 것 같다.
“예술은 세상을 향해서 하는 이야기, 자기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다. 그것을 담는 그릇이 예술이다. 그런 예술행위가 이웃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은 일상에서 나와야 된다. 일상과 떨어진 작품은 관념이다. 큰 울림을 주기 힘들다. 평범한 내 이야기 속에서 나와야 한다. 도가 평상심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다시 미술이야기다. 불교미술이 현대미술과 소통할 수 있으려면. 
“어떤 예술이라도 100% 새로운 것이란 없다. 특히 동북아 철학에는 ‘주석’ 문화가 있다. 자신의 의견과 비판을 내놓으면서도 본문을 존중하는 겸손한 태도다. 경전에도 주석을 달듯이 불교미술도 전통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가미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불교미술도 현대미술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새로운 시도가 자칫 전통에 대한 훼손이 될 위험성도 있다. 
“물론 종교미술이 교리의 특성을 무시하거나 반영하지 못하면 종교미술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창작미술과는 다르다. 하지만 다양한 해석은 가능하다. 문화재의 전승·보존을 위해서는 기법, 소재, 표현 등 전통의 방식을 재현하고 계승하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문화재 전승과 보존 분야의 종사자들이 매진할 수 있도록 그 영역의 독창성을 인정하고 불교미술에서는 창작을 더욱 중시해야 한다. 그래야 전승의 영역, 창작의 영역이 각각 존중받을 수 있다.”

▲교계에서도 불화의 현대화에 대한 고민이 적지 않다. 
“월북작가 중에 청계 정종여라는 분이 있다. 1930년대 대표적 화가다. 청계가 진주 의곡사의 괘불을 그렸다. 높이가 10m 정도 되는 대작이다. 정통불화 방식이 아닌 독창적으로 괘불을 그렸다. 일반화가가 사찰 봉안용 괘불을 그렸다는 것도 매우 특이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당시 의곡사 주지였던 오제봉 스님이 이를 의뢰했다는 점이다. 괘불이라는 형식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한 청계, 그리고 작가의 시도를 수용한 오제봉 스님 같은 이들이 그 시대의 미술을 창조한 주역들이다. ”

▲모범이 될만한 사례들이 있나. 
“강화도 전등사 무설전을 들 수 있다. 법당 본존은 조각가 김영원 교수, 후불탱화는 프레스코화로 오원배 작가가 조성했다. 광주 무각사도 ‘반야심경’을 문자도로 표현하고 오방색으로 조성해 봉안했다. 최근에는 돈황 벽화의 천수천안관세음보살도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봉안했다. 이러한 시도들은 현대미술이 요구하는 창의성, 시대성을 담으면서도 종교미술의 도상학과 예배의 기능을 모두 충족시키는 새로운 시도다. 석굴암의 본존불이 최고의 미학을 담고 있다고 해도 오늘날 그것을 재현하는 것은 복제이지 현대불교미술이 될 수는 없다.”

▲‘불교미술대전’의 기획과 진행에도 참여하셨는데, 아쉬움의 표현인가. 
“창작성과 시대성에 무게중심을 둬야 한다. 조선말 조성된 여러 감로도는 시대상을 담고 있다. 당시 어떤 미술도 그런 시도를 하지 못했다. 불교미술이 그 벽을 넘는 선구자였다. 이 시대의 창작력과 도전정신이 있어야만 우리의 후대들도 이어받고 발전시킬 역사와 문화를 갖게 된다. 불교미술은 언제나 시대의 중심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문화의 주축이 될 수 있었다.”

▲ ‘한국미론’을 통해 제시했던 ‘무애미론’과 연관성이 있는가.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일본학자가  ‘비애미’ 등으로 우리의 미를 정의했는데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단편화된 시각에서 벗어나고 싶어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무애미론’이다. 지난 2000년간 가장 독자적인 사상을 펼친 사상가를 뽑으라면 나는 원효 스님을 꼽는다. 동시에 그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가장 독창적인 철학가의 핵심적인 사상 가운데 하나가 무애다. 또한 실제 예술가의 입장에서 무애를 춤과 노래로 지어 거리에서 시연, 퍼포먼스를 했다. 이 만큼 우리민족의 DNA와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이 있을까. 굳이 한민족의 미적 특징을 규정하는 개념이 필요하다면 우리에게는 ‘무애미’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불교계에 대한 당부가 있다면.
“국립현대미술관은 늘 새로운 감동과 아이디어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꼭 미술이라는 울타리가 아니라도 다양한 콘텐츠를 활용한 프로그램들이 보석같이 쌓여있는 곳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불교계에도 마찬가지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자주 찾아 주셨으면 좋겠다. 관심이 있는 만큼 보이고 알면 사랑하게 된다. ‘수처작주’가 인생의 좌우명이다. 누구든 이곳의 주인공이 나라고 여긴다면, 그 보물을 가질 수 있다.”

저서 ‘한국미술론(2017)’의 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미술사연구의 기본은 결국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더불어 그것은 ‘해석’의 문제와 연결된다. 작가와 작품을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런 바탕에서 상상력, 독창성, 시대정신, 민족의식, 정체성 등의 키워드를 소중히 간직하게 했다.”

그는 문제의식의 주인공이었는지 모른다. 주인이기에 문제가 보이고 고민했으리라. 상상력, 독창성, 시대정신, 민족의식, 정체성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도 바로 ‘주인공’이다. 

이제 그가 펼쳐 보일 국립현대미술관이 상상력, 독창성, 시대정신 그 모든 것을 만끽할 바로 그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88 / 2019년 5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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