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노년
길 위의 노년
  • 이경순
  • 승인 2019.05.12 15:48
  • 호수 14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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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건강한 노년은 화두일 수밖에 없다. 큰 병 걱정 없는 육체적 건강은 물론이고 노년다운 지혜와 유연한 사고를 겸비한 정신적 건강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흔히 노년에는 젊은 시절 마련해 놓은 성과에 바탕을 둔 지속된 안정을 희구하게 마련이다. 젊어서는 사서라도 고생을 하지만 늙어서는 번거로운 잡무에서 벗어나 안정된 환경 속에서 편안히 살고 싶은 것이 상식일 것이다. 하지만 건강한 삶을 살았던 노인들, 많은 일생동안 끊임없는 창작열을 불태웠던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고생은 늙어서도 유지된 경우가 많았다. 물론 자발적 고생을 사서 한 이들이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예능프로그램인 ‘스페인하숙’에 출연한 산티아고 순례길의 노년들을 보면서도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필자는 예전부터 자발적 고생을 하면서 아름다운 노년의 삶을 꾸린 이를 알고 있었다. 바로 조선후기의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명문가문 출신이었지만 일생동안 벼슬을 얻지 않았고 원주의 고향에 그대로 머물러 살던 사람이다. 흔히 양반이라면 노비를 부려 한가하고 시서화를 즐기는 여유로운 삶을 떠올리지만, 모든 사대부의 삶이 그처럼 녹록하지는 않았다. 정시한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의 가족 생계를 챙기고 부모봉양과 봉제사 접빈객이라는 일상의 의무를 다하는 일에 온 신경을 쏟아야 했다. 그러던 중 부모가 돌아가신 62세에 엄청난 결단을 하게 되었다.

“내 나이 예순이 넘었고 양친을 영원히 이별하였다. 이전에 일삼았던 공부가 거친데 만약에 다시 너희들에 얽혀서 일에 빠져버린다면 나의 일생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니 책을 가지고 산에 들어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는 것만 못하다. 너희들은 나의 뜻을 막지 말라.”

일상의 의무가 다하자 자식들에게 가출선언을 한 뒤 산으로 향한 것이다. 노년에 길과 산위에서의 자발적 고생에 착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후 3년 동안의 삶이 ‘산중일기’라는 일기 속에 기록되었다. 이 기간 내 산으로의 ‘가출’은 4차례였고 모두 장기간의 여행으로 그 일수는 총 600일 가까이에 이른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도 놀라운 기록이다. ‘산중일기’ 이후에도 정시한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정시한은 길과 산에서 노년을 보내고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또한 길에서 산에서 공부가 이어졌다. 정시한이 남긴 ‘산중일기’는 오늘날 조선후기 사대부의 여행과 사찰의 상황을 보여주는 보고와 같은 기록이다. 특히 산에서 만났던 스님과 사찰 생활이 그 일기 속에 세밀히 기록되어 오늘날 조선후기 사찰생활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정시한은 산에서 이어나간 독서와 사색의 결과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세울 수 있었다. 그래서 퇴계사상의 계승자로서의 위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저술을 70세가 넘어서 완성할 수 있었다.

필자는 정시한이 이렇게 건강하고 생산적인 노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길 위에서 고생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몸을 편하게 하지 않고 하루에 몇 십리를 이동하고 높은 산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올랐다. 또한 길 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이며 교류했고 낯선 이들이 불러온 새로운 세계에 몰입했다. 무엇보다 자연이라는 커다란 세계 속에서 자유로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육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한 노년을 위해 길 위의 고생은 마다할 일이 아니다. 세속적 욕심을 끊고 자유로운 나를 발견하기 위한 고생, 새로운 세계를 품어 나와 공동체의 의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고생이라면 말이다.

이경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glib14@korea.kr

 

[1489 / 2019년 5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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