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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자유의지

결정론 반대하는 자유의지는 불교에선 필수적

자유의지는 다른 것 선택 능력
불교에서 의식한 행동만이 ‘업’
의식 않았어도 타자의 업 성립
업은 기억과 법칙에 의해 작동

유신론자들은, 신이 인간이 타락할 걸 알면서도 왜 인간을 창조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잘못된 길을 선택해 망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의지란 여러 개의 선택지가 주어질 때 그중 하나를 선택할 능력을 말하며, 선택을 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느낌만 그럴 뿐이지 사실은 어떤 선택을 할지 미리 정해져 있는 경우를 배제하기 위해서 즉 결정론을 배제하기 위해서, ‘같은 상황에서 다른 걸 선택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때의 자유의지는, ‘완벽한’ 자유의지를 말한다.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80프로의 자유의지 즉 10에 8은 자유의지를 행사하고 2는 자유의지를 행사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자유의지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완벽한 자유의지이다.

시간을 격(隔)하는, 혹은 시간은 같지만 공간을 격(隔)하는, 두 개의 상황이 문자 그대로 정확히 같은 상황인지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어떤 사람이 자유의지를 가졌는지를 제삼자가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인 역시 불가능하다. 여기서 다시 오차(誤差)의 철학이 나온다. 이 철학에 의하면, 일정한 범위 내에서 같으면 같은 것으로 치는 것이다. 자유의지도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 즉, 일정한 수준을 넘는 자유의지는, 설사 실제로는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그냥 완벽한 자유의지로 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행위로 본다.

인간이 ‘완벽한’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마음에서 결정이 일어난다면, 즉 무의식도 결정에 참여한다면, 그리고 마치 의식적으로 결정한 것처럼 느끼는 자유의지는 완벽한 자유의지가 될 수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자유의지는 ‘의식적인 자유의지’이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는 불교에 필수적이다. 불교는 결정론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불교에 의하면, 의식하고 한 행동만, 업(業 karma 미래의 결과를 낳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기둥을 걷어차면 기둥이 넘어져 우리 몸을 칠 수 있다. 기둥이 충분히 힘을 받으면 넘어지는 것은 법칙이므로, 그리고 기둥이 넘어지면 지붕이 무너지는 것은 법칙이므로, 어떤 행동이건 그 행동이 우주의 법칙을 따라 다른 행동을 낳는다면 그것은 업(業)이다. 내가 나도 모르게 즉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을 모욕하면, 그 사람은 원한을 품고 있다가 언젠가 기회가 되면 보복할 수 있다. 이 경우 내 행동은 내 마음에 업(業)을 만들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에 업(業)을 만든다.

인간 집단을 하나의 거대한 확장된 마음으로 보면, 이것은 그 거대한 마음에 일어나는 업(業)이다. 옛날 의사들은 아이를 받을 때 손을 소독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산모들이 산욕열에 걸려 죽었다. 의사가 더러운 손으로 자기 부인의 애를 받다가는 자기 부인을 죽일 수 있다.  의사가 손을 안 씻으면 감염되고, 임산부가 산욕열에 감염되면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우주의 법칙이고 업(業)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적인 행동도 업(業)이 된다. 업(業)은 개인의 기억, 집단의 기억 그리고 집단과 우주의 메커니즘과 법칙에 의해서 작동한다. 다시 말해 꼭 인격적으로만 작동할 필요는 없다. 이는 기독교에 인격신이 필요 없고 이신(理神)이면 충분하다는 주장과 유사하다. 업(業)은 인격적·의식적이 아니라 비인격적·자연법칙적 업(業)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많은 정보 지식을 가진 사람의 자유의지적 선택과 덜 가진 사람의 자유의지적 선택은 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와 지식이 늘어도 자유의지 능력은 늘지 않고 동일한 것일까? 우리는 살면서 항상 갓난아이 때와 동일한 자유의지도(度)를 유지하는 것일까? 자유의지가 시간을 타고 변한다면 신이 인간에게 주었다는 자유의지는 과연 완전할까? 필시 불완전할 것이다. 같은 질문을 참나주의자들에게도 할 수 있다. 참나(眞我 atman)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완벽할까?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90호 / 2019년 5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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