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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법성게’ 제23구: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기자명 해주 스님

입법계 역시 법계에서 법계로 들어간 것이니 환귀본처이며 환본제

행자는 방편 따라 오승 나뉘나
일승에 포섭되기에 별교일승

행자가 본제에 돌아간다 해서
돌아갈 자리 따로있다 구하면
허물이며 찾아도 눈 속의 티끌

본제란 법성, 해인, 일승법계
일체가 ‘오척법성’이므로
돌아갈 참된 근원 따로 없는
본래자리 안주하는 게 환본제

의상 스님은 ‘화엄경’의 세계를 증분·연기분의 자리행과 이타행으로 파악하고, 다시 수행자의 방편과 이익 얻음[修行者方便及得利益]에 초점을 맞추어 자리이타행을 밝히고 있다. 수행자의 방편에 해당하는 네 구절 가운데 첫구가 “그러므로 행자는 본제에 돌아가”라는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이다. 

이 ‘법성게’ 제23구의 의미를 ‘그러므로[是故]’ ‘행자(行者)’ ‘본제에 돌아가다[還本際]’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그러므로[是故]’란 무엇을 받은 말인가? 바로 위의 이타행 4구인가? 아니면 자리행과 이타행에 다 해당되는 것인가? 그 내용은 다음 말인 ‘행자’와 연계된다. 즉 수행자의 근기와 수행방편 등과 연결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의상 스님은 행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행자’란 일승의 보법(普法)을 보고 들은[見聞] 이후, 아직 보법을 원만히 증득하기 이전까지를 말한다. 이것은 별교일승(別敎一乘)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 

만약 방편일승(方便一乘)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면 오승(五乘)이 모두 일승(一乘)에 들어가 포섭된다. 왜냐하면, 일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고, 일승을 목표로 하는 것이고, 일승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뜻을 기준으로 하면 오승을 모두 포섭하니, 일승의 수행자도 또한 가능하다.(일승법계도)

행자란 별교일승과 방편일승의 일승 수행자임을 알 수 있다. 별교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행자란 일승의 화엄보법을 보고 들은 이후부터 아직 보법을 원만히 증득하기 이전까지의 수행자이다. 그리고 방편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오승이 다 해당되니, 오승이 일승에 포섭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방편일승은 동교일승이다.

의상 스님의 강설을 받아 적은 ‘지통기’에서는 견문(見聞)의 지위에 대한 다음 문답을 전하고 있다. 

문. 견문 등의 세 지위[三位]가 보법(普法)의 바른 지위[正位]인가?
답. 아니다. 다만 삼승을 따라서 이 말을 할 뿐이다. 만약 보법의 바른 법이라면 곧 지위도 없고 지위 아님도 없으니, 일체의 육도와 삼계의 법계에 대한 법문이 보법의 바른 지위 아님이 없다. 또 한 지위가 일체의 지위[一位一切位]이고 일체의 지위가 한 지위[一切位一位]이다. 지위의 법문과 같이 일체의 행과 가르침과 뜻 등의 법문도 또한 그러하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보법 가운데 무엇으로 처음을 삼는가?
답. 하나의 법문을 얻는 것으로 시작을 삼는다. 이것은 곧 마지막과 다름이 없다. 

견문 등의 세 지위 즉 견문·해행(解行)·증입(證入)은 삼승을 따른 방편이고, 화엄 보법의 바른 지위는 지위도 없고 지위 아님도 없으니 일체 법문이 다 보법의 바른 지위라고 한다. 또 일위가 일체 위이고 일체 위가 일위이니, 하나의 법문을 얻는 것이 시작이며, 시작과 마침이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별교일승을 기준으로 할 때 일승의 보법을 보고 들은 이후 등을 행자라 하고, 또 견문 등의 지위는 삼승을 따른 방편시설이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양자가 혹 서로 어긋나는 말은 아닌가? 

그것은 ‘반시’에서 54각 하나하나가 없으면 붉은 한 줄이 이루어지지 않고 54각을 지닌 한 줄이라서 바로 여의교라 하는 것처럼, 견문에서 증득까지의 지위 그 자체가 바로 별교일승임을 달리 설명한 것이라 하겠다. 

균여 스님은 행자의 근기에 대하여 별교일승의 행자를 기준으로 하고 방편일승을 겸하여 포섭한 원교일승으로 해석한다. 비록 동교일승의 삼승을 들고 있으나, 근본으로 삼는 바를 기준으로 하면 오직 별교일승일 뿐이라고 한다.(원통기) 

‘대기’에서는 별교일승이라 말한 것은 삼승이 목표로 하는 바[所目]의 별교를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만약 불공(不共)의 무주 별교를 기준으로 하면 보고 들음이 곧 원만한 증득이므로, 지위에 의지해 견문에서 증득까지의 단계가 시설된 것은 소목의 별교일승이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상근기는 곧 바로 증분에 들어가고 중근기는 연기분에서 증분에 들어가고 하근기는 ‘행자’ 이하의 수행방편중에서 비로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 뜻은 행자가 방편일승의 삼승까지 포섭한 근기라 하겠으니, 실제로는 모두 뛰어난 일승 수행자라고 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수록’의 고기에서는 견문·해행·증입의 삼생을 여러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즉 과보를 기준으로 하면, 과거는 견문이고 현재는 해행이며 미래는 증입이다. 또 신해(信解)를 증장하는 문을 기준으로 하면, 십신은 견문이고 삼현은 해행이며 십지는 증입이다. 내지는 견문을 삼현, 제4지, 제8지와 문수선지식 등의 지위로 보기도 한다.

그러므로 행자의 근기는 두 가지 면을 다 지니고 있다. 한 면으로는 행자가 수행방편으로 분과된 제오중해인의 근기로서, 이타행으로 분과된 제사중해인의 근기보다 아래라고 간주되는 삼승 또는 오승 근기이다. 그런데 실은 그 삼승 또는 오승이 소목으로서의 별교일승근기이다. 

또 다른 한 면으로는 행자가 별교 일승의 보현근기이다. 구체적인 수행의 결과로 얻은 과보의 모습이 뚜렷이 나타난 제사 중 해인삼매 안의 선재동자나 대위덕 태자 역시 별교 일승의 보현행자인 것이다. 

아무튼 행자가 본래자리[本際]에 돌아가니, 본제란 무엇이며 어디인가?

본제를 알고자 하는가? 선을 물으면 선이 망이고, 도리를 구하면 도리가 가깝지 않다. 설사 현묘함을 알았다 하더라도 또한 눈 속의 티끌일 따름이다. (要識本際麽. 問禪禪是妄 求理理非親. 直饒玄會得 也是眼中塵.) (법계도주)

행자가 본제에 돌아간다고 했는데, 돌아갈 자리가 어디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구하면 허물이고, 설사 찾았다고 하더라도 눈 속의 티끌이라고 한다. 눈에는 금가루라도 잘못 들어간 티끌일 뿐이다.

이 게송은 설잠 스님이 극부송(克符頌)의 일부를 인용하여 본제를 알게 한 것이다. 극부 스님은 극부도자(克符道者)로 불리는 지의(紙衣) 화상이니 임제의현(9세기) 스님의 제자이다. 임제 스님의 사요간(四料揀) 중 “경계는 뺏고 사람은 뺏지 않는다.(奪境不奪人)”에 대한 극부 스님의 송(頌)인 것이다. 

이 ‘탈경불탈인’을 화엄교학에서는 진여인 이법계(理法界)로 설명하기도 한다. 경계는 사법(事)이고 사람은 이법(理)이니, 경계는 제하고 이법의 도리만 남겨두었다고 본 것이다. 

극부 스님의 본 게송은 “경계는 빼앗고 사람은 뺏지 않음이여! 말의 뜻만 헤아린다면 어느 곳이 참인가? 선을 물으면 선이 망이고 도리를 탐구하면[究理] 도리가 가깝지 않다. 해가 비치니 찬 빛이 담박하고 산이 아득하니 푸른빛이 새롭다. 설사 현묘함을 알았다 하더라도 눈 속의 티끌일 따름이다”(인천안목, 대혜보각선사어록)라고, 여덟 구절로 되어 있다. 

대혜 스님은 보설(普說)에서 ‘문선(問禪)’ 내지 ‘안중진(眼中塵)’에 대하여 “좋은 일도 없는 것만 못하다.(好事不如無)” “스스로 일어났다가 스스로 거꾸러진다(自起自倒)”라 설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보현보살과 선재동자.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문수보살.

‘일승법계도’의 주석서에서는 본제와 환본제를 다음과 같이 일컫고 있다.

본제란 안으로 증득한 해인이다(本際則內證海印也). (법기) 
본제란 법성의 자리이다(本際者法性處也). (원통기) 
본제에 돌아감은 불과를 증득함이다(還本際證果也). (법성게과주)
이 행자 등은 자기의 몸과 마음이 곧 노사나불의 체임을 알기 때문에 본제에 돌아간다(此行者等 知自身心卽舍那體 故云還本際也). (대기)

“비로자나품”에서 대위덕 태자가 수없는 보살도를 닦아서 불과를 증득하고 화장세계를 펼친 것을 본래자리로 되돌아갔다고 하여 환귀본처(還歸本處)라고 설하고 있다. 대위덕태자가 돌아간 본제는 비로자나불과의 화장세계이다. ‘입법계품’에서는 선재동자가 한량없는 해탈문을 증득해서 법계에 들어가 보현보살과 동등해지고 부처님과 동등해지고 일체 모든 존재와 동등해짐을 설하고 있다. 선재동자의 입법계 역시 법계 안에서 법계에 들어간 것이니, 환귀본처이고 환본제라 할 수 있다.

이같이 의상 스님은 지혜의 눈이 어두워 망상심으로 수행하려는 미혹한 이도 본제에 되돌아갈 수 있는 방편을 시설하고 있으니, 법성으로 연결된 연기의 끈을 잘 잡아서 법성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수행자는 다 보현 근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의상 스님이 자서(自序)에서 밝힌 ‘반시’의 저술목적도 이름 없는 참된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니, 바로 환본제이고 환귀본처임을 알 수 있다. 

의상 스님은 ‘화엄경’의 문문구구가 다 부처이고, 나의 몸과 마음인 오척신(五尺身)이 바로 법신으로서 법성신임을 천명하였다. 처처(處處)가 일승법계이고 물물(物物)이 오척법성이니, 되돌아갈 참된 근원이 따로 없는그 본래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환본제라 하겠다. 그래서 불유타오(不由他悟)라, 다른 이를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니다.(화엄경) 

그러면 의상 스님은 언제 어떤 인연[機緣]으로 환본제하셨을까? 그 답은 분명 스님의 행장과 ‘법성게’를 저술하기까지의 수학과정, 그리고 제자들에게 설해준 법문에 이미 나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의상 스님에게 직접 듣고 싶은 맘이 간절해질 때가 있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90호 / 2019년 5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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