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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6대 총무원장 월하 스님-하

‘종정중심제’ 논란으로 촉발된 2년 7개월 종단분규 통합 이끌어

서옹종정에 권한 받은 고암 스님
‘종정중심제’ 고집으로 다시 갈등
종단분규 지속으로 비판 커지자
1980년 3월30일 통합 합의 서명

분규 수습 뒤 통도사서 후학양성
94년 원로회의서 종정으로 추대
98년 사태 때 불신임 수모 겪기도

1978년 7월31일 서옹 종정으로부터 권한을 인계받은 고암 스님은 종단대표권자로서의 입지를 굳혀갔다. 그해 8월2일 새 총무원장에 성수 스님을, 규정원장에 월남 스님을 임명하면서 중앙종회(개운사)측과 선을 그었다. “종정의 모든 권한을 중앙종회에 위임한다”는 약속도 번복했다. 이 때문에 월하 총무원장을 중심으로 한 개운사 측과 갈등의 골은 차츰 깊어졌다. 고암 종정과 개운사 측의 대립은 5대 중앙종회의원 선거를 두고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4대 중앙종회 회의록’에 따르면 중앙종회는 8월14일 개운사에서 제54차 임시회를 열어 4대 중앙종회의 임기를 9월23일로 규정하고 종헌에 따라 1개월 전 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다. 종회의장 서운 스님은 이날 “항간에 4대 중앙종회의 임기가 8월12일로 만료되었다는 설이 떠돌고 있는데 의원의 임기는 선서한 날로부터 4년인 고로 오는 9월23일 임기만료”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중앙종회는 5대 중앙종회의원 선거일을 9월5일로 확정했다. 

그러자 고암 스님 측은 ‘대한불교(1978년 9월3일자)’에 공고를 내고 중앙종회 측이 9월5일 진행하는 5대 중앙종회의원선거의 중지를 명령했다. 1974년 8월10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3대 중앙종회의 임기만료일을 8월12일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4대 중앙종회의원이 선출됐기 때문에 1978년 8월12일로 임기가 종료됐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앙종회 측이 선거를 강행하자 고암 스님은 다시 9월6일 긴급명령 1호를 공포하고 “종단사태 수습을 위해 중앙종회를 대신할 비상종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4대 중앙종회가 이미 임기가 만료됐기 때문에 이를 대신할 비상종회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면에는 개운사 측이 중심이 된 중앙종회를 무력화시켜 종정중심 체제를 굳히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고암 스님은 이날 교구본사주지 25명을 당연직으로, 개운사 측이 포함된 종단 중진 40명을 위촉직으로, 총 60명의 비상종회의원을 지명했다. 개운사 측으로서는 중앙종회를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추진된 비상종회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고암 스님 측은 개운사 측이 빠진 상태에서 비상종회를 강행, 9월9일 오현(신흥사)·이두(법주사)·월산(불국사)·도우(고운사)·도문(백양사)·혜성(선암사)·지선(관음사)·지성(선운사) 스님의 당연직 의원 8명과 조계사 측의 27명이 참석한 가운데 첫 회의를 열어 월산 스님을 의장에, 혜정·원광 스님을 각각 부의장에 선출했다. 

비상종회는 개운사 측과 합의한 총무원장 중심제를 번복하고 다시 종정중심제로 회귀하는 절차를 밟아나갔다. 9월25~26일 2차 회의에서는 종정권한을 확대하는 종헌개정을 단행하고, 종정은 재정·안녕질서상 위험이 있다고 판단될 때 ‘비상명령’을 발표할 수 있으며, 총무원장과 규정원장, 교구본사주지를 직접 임명할 수 있도록 했다. 10월18일 3차 회의에서는 직무대행 고암 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하고, 고암 스님이 지명한 월산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인준했다. 개운사 측에 맞서 5대 중앙종회의원 50명도 선출했다. 이에 따라 서옹 종정의 사퇴로 일시적으로 봉합되는 듯 했던 조계종은 다시 조계사·개운사로 양분됐다. 

개운사 측도 9월5일 예정대로 5대 중앙종회의원 선거를 진행하면서 비상종회와 대립각을 세웠다. 비상종회에 합류한 8개 교구본사가 선거에 불참했지만 간선직을 포함해 64명이 종회의원으로 선출됐다. 9월26일 개운사에서 5대 중앙종회 개원종회를 열어 종회의장에 월주, 부의장에 벽파·의현 스님을 선출했다. 개운사 측은 이때까지도 고암 종정 측과 대화를 이어가며 사태를 수습해 나가겠다는 계획이었다. 자신들이 추대한 종정과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개운사 측으로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암 종정 측이 새로운 종회와 집행부를 구성한 데 이어 개운사 측의 5대 중앙종회를 불법으로 규정하자 강하게 반발했다. 더 이상 대화가 어렵다고 판단한 개운사 측은 10월23일 제56회를 임시회를 열어 종정 고암 스님의 불신임을 추진했다. 

5대 중앙종회회의록에 따르면 이날 의장 월주 스님은 “(고암 스님은) 우리가 모신 종정이요, 우리가 법원에 추천해 모신 종정직무대행이요, 문공부에 갖은 노력을 하여 등록한 종정”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설득과 아량을 베풀었고 참아왔지만, 종정스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종단을 역행하고 파국으로 이끌고 있다”고 토로했다. 총무원장 월하 스님도 “우리는 종정스님에게 기대를 많이 해왔다”면서 “종정스님은 서옹 스님으로부터 (종권을) 인수받으면 총무원에 모든 것을 인계해줄 테니 아무 말하지 말고 있으라고 해서 반신반의하면서 말 하지 않고 있었는데 처음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했다. 

결국 중앙종회는 이날 고암 스님이 7월31일 서옹 종정으로부터 종권을 인수받은 이후 행한 모든 종무행정을 무효로 결의했다. 총무원장 성수 스님을 비롯한 총무원 간부 발령, 긴급종령 1호, 비상종회 구성, 비상종회에서 선출한 5대 종회의원 선출을 모두 무효로 결의했으며, 총무원장에 월산 스님을 임명하고 불국사·대흥사·수덕사 주지를 발령한 것도 모두 종헌종법을 위배하고 부당하게 처리한 종무행정이라고 규정했다. 

중앙종회는 한발 더 나아가 자신들이 추대했던 고암 종정에 대한 해임결의안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대신 총무원장 월하 스님이 종단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종정직무대행을 겸하도록 했다. 서옹 스님에 이어 고암 스님까지, 종단의 최고 어른인 종정이 중앙종회로부터 연이어 불신임된 것은 1970년대 후반 조계종의 혼란상을 웅변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양측의 불신과 반목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종무행정도 큰 차질을 빚었다. 1978년에 이어 1979년에도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이 조계사와 개운사에서 따로 열렸고, 심지어 양측에서 한 사찰에 다른 주지를 발령하면서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월하 스님은 1994년 5월9일 원로회의에서 제9대 종정으로 추대됐다.   출처=‘사진으로 본 통합종단  40년사’
월하 스님은 1994년 5월9일 원로회의에서 제9대 종정으로 추대됐다. 출처=‘사진으로 본 통합종단 40년사’

치열한 법정공방은 해를 넘겨서도 이어졌다. 대법원은 6월26일 서옹 스님 측이 개운사 측의 승소에 항고했던 ‘종정직무정지가처분 신청’을 기각함으로써 개운사 측의 적법성을 재확인됐다. 그러자 고암 종정 측은 ‘종단 혼란 수습’을 이유로 8월1일 5대 중앙종회의원 선출을 위한 총선거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대법원이 1977년 9월 이후 서옹 종정이 행한 종무행정을 무효라고 판결한 만큼 그 당시 종헌종법에 따라 새롭게 종회를 구성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개운사 측은 법원판결로 정당성을 얻었고, 이미 5대 중앙종회를 구성해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총선거를 진행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개운사 측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양측은 종단 대표권자를 두고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정부 측이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이해관계가 첨예한 양측을 돌려세우기는 쉽지 않았다. 이러는 사이 세간의 시선은 양측 모두에게 싸늘했다. 언론은 조계종 분규를 잇따라 보도했고, 그럴수록 종단의 위상은 끝없이 실추됐다. 세간의 비판은 양측 모두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 양측은 종회의원 총선을 통해 새 집행부를 구성하고, 개운사·조계사 총무원을 통합하는 방안으로 양측 입장을 조율했다. 1980년 3월30일, 종단 분규 수습에 앞장서다 갑작스럽게 입적한 조계사 측 총무원장이었던 경산 스님의 입적 100일을 맞아 양측은 서울 적조사에서 만나 극적인 합의를 이뤘다. 

‘대한불교(1980년 4월6일자)’에 따르면 이날 개운사 측을 대표해 참석한 녹원 스님(당시 직지사 주지)은 월하 총무원장과 월주 종회의장의 서명이 담긴 합의서를 제시했다. 그러자  조계사 측도 고암 종정과 송원 총무원장의 서명을 이끌어 냈다. 양측은 개운사 중심의 4·5대 중앙종회를 인정하고, 5대 종회의 임기를 단축, 20일 이내에 종회의원 선거를 진행하기로 했다. 종회의원은 총 69명으로 하되, 42명은 교구별로 직접 선출하고 나머지 27명은 개운사 측에서 14명, 조계사 측에서 13명을 추천하기로 했으며 새 집행부가 탄생하면 양측에서 발생한 민형사간 일체의 문제를 불문에 부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양측은 4월17일 6대 중앙종회의원 총선거를 실시해 69명을 선출했다. 이어 4월26일 6대 중앙종회를 개원하고 무기명 비밀투표를 통해 제17대 총무원장에 월주 스님을 선출했다. 이로써 서옹 스님의 종정중심제 논란으로 촉발된 2년 7개월간의 조계종 분규는 마침내 일단락됐다. 

개운사와 조계사로 양분된 종단 분규를 수습한 월하 스님은 이후 통도사로 내려왔다. 통도사가 영축도제양성 후원회를 창립하자 고문을 맡아 후학양성에 앞장섰고, 1984년 5월 통도사가 총림으로 지정되면서 그해 6월10일 영축총림 초대 방장으로 추대됐다. 

월하 스님이 다시 종단의 전면에 나선 것은 1994년이었다. 이 무렵 조계종은 의현 총무원장의 3선 문제로 또다시 홍역을 앓았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선우도량 등 8개 승가단체가 의현 총무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원회(범종추)’를 구성하자, 스님은  원로 가운데 제일 먼저 지지의사를 밝혔다. 월하 스님의 적극적인 지지는 범종추의 큰 버팀목이 됐고, 이는 의현 총무원장의 퇴진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됐다. 이후 월하 스님은 1994년 4월10일 출범한 개혁회의의 초대 의장으로 추대됐다. 5월9일 종단사태 과정에서 사퇴한 서암 종정의 뒤를 이어 제9대 종정에도 추대됐다. 

개혁회의에 이어 그해 11월21일 월주 스님이 제28대 총무원장으로 선출되면서 조계종은 안정을 되찾았다. 개운사·조계사 분규를 함께 수습했던 전력이 있었던 만큼 월하 종정과 월주 총무원장의 관계도 순조로웠다. 그러나 ‘조계종사(근현대편, 교육원)’에 따르면 월주 총무원장 재임기간 동안 불교방송 공금횡령사건, 흥천사 토지처분 의혹사건, 여의도불교문화원 불사금 횡령사건, 승려도박사건 등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종단 분위기는 다시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월하 종정과 월주 총무원장 사이에서 종단 운영과 관련해 이견이 속출했다. 월하 스님은 종정중심제로의 종헌개정과 멸빈자 사면복권 추진을 총무원장에게 꾸준히 요구했다. 그러나 월주 스님이 이를 거부하면서 종정과 총무원장 사이에 앙금이 쌓였다. 

이런 가운데 1998년 10월 월주 총무원장이 3선에 출마하면서 양측의 갈등은 표면화됐다. 월하 종정은 10월24일 ‘월주 스님의 3선 반대와 후보사퇴’를 촉구하는 교시를 발표했고, 이 교시에 따라 정화개혁회의가 출범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결국 정화개혁회의와 총무원 측의 대립은 대규모 폭력사태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조계종은 또 한 번 세간으로부터 따가운 비판을 받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월하 스님도 총무원 측이 주도한 승려대회에서 불신임되는 수모를 겪었다. 폭력사태로 얼룩진 1998년 종단사태는 불교적 해결방식보다는 힘의 논리를 앞세우면서 현대 조계종사에 큰 상처만 남기고 말았다. 이 때문에 월하 스님은 2001년 8월20일 ‘1998년 종단사태’와 관련해 종도들에게 참회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불교정화운동을 비롯해 종단의 주요사건 때마다 중심에 섰던 월하 스님은 2003년 12월4일 통도사 정변전에서 세수 89세, 법랍 71세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91 / 2019년 6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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