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하라
4. 부하라
  • 김현태 기자
  • 승인 2019.06.03 14:19
  • 호수 149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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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오갔던 전법·구법승들 목마름 풀어준 오아시스 도시

2002년 문을 연 테르메즈 역사박물관
지역 격동의 문화 변천사 세분화 소개
실크로드 권위자 가토 교수 별실 운영

키질쿰 사막 가로질러 부하라 가는 길
옛 수행자들 전법·구법 위해 걸었던 곳
지루가참 스님 등 동아시아 불교 전파

인공호수 ‘하우즈’ 100곳 수로로 연결
사원 뜻하는 부하라엔 현재 불교 없어
순례자 목마름 달래준 샘물만 여전해
부하라 라비하우즈 전경. 과거 대상들이 낙타를 부려놓고 휴식을 취하던 숙소 ‘카라반 사라이’가 밀집했던 이곳은 현재 카페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테르메즈 역사박물관은 우즈베키스탄의 고고학적 가치를 세계에 알리고 소중한 문화유산을 세계인과 공유하고자 테르메즈 건립 2500주년 되던 2002년 4월 문을 열었다. 이곳은 테르메즈에서 출토된 2만7000여점의 고대유물과 페르시아어·아랍어로 된 1만6000여점의 고서적, 필사본, 목판인쇄본 등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은 시대별로 세분화돼 있어 전시관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만으로 이 지역 격동의 문화 변천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역사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은 파야즈, 카라, 달베르진 등 불교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들이다.

이곳을 방문한 또 다른 이유는 실크로드교류사의 세계적 권위자 가토 규조 교수의 업적을 소개하는 별실이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가토 교수는 주르말라대탑을 비롯해 카라테파, 달베르진테파 등 발굴조사를 주도한 인물이다. 박물관 1층에 마련된 별실에는 가토 교수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업적, 그리고 불상과 보살상, 토기, 동전 등 그가 발굴하거나 연구했던 유물들이 함께 전시돼 있다. 테르메즈 불교의 번성과 쇠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지 곳곳에 일본 대학의 관측장비가 설치돼 있는 것도 가토 교수 덕분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이라는 점이다. 가토 교수는 일제강점기 경북 칠곡의 한 농가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간 뒤 고학했다. 1940년대 초 일본군으로 징집돼 만주에 배치됐고 패전 뒤 포로로 잡혀 시베리아에서 5년간 억류생활을 했다. 그 기간에 러시아어를 배워 아시아 여러 민족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일본에 돌아가 실크로드교류사 연구에 몰두해 실크로드, 특히 테르메즈 유적 발굴과 연구에 독보적인 업적을 쌓았다.

가토 교수는 90세 되던 2012년 일본 언론에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2014년 칠곡 고향을 방문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2016년, 94세의 나이에도 우즈베키스탄 현지에서 조사활동을 하던 중 쓰러져 숨을 거뒀다. 이에 역사박물관는 가토 교수의 테르메즈에 대한 연구업적과 애정에 대한 감사와 추모의 마음을 담아 별도의 공간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박물관 관람을 끝으로 테르메즈를 떠나 기사르산맥 넘어 ‘부하라’로 향한다. 부하라는 테르메즈에서 430km 떨어진 북쪽에 위치한다. 여름철 50도를 육박하는 폭염과 겨울철 혹독한 추위는 도로 곳곳에 파이고 깨진 상처들을 만들어 도착시간을 한없이 늘려놓았다. 테르메즈시에서 멀어질수록 주위의 풍광은 점차 황량해졌다. 낙타풀이라 불리는 사막덤불만 가득한 지역, 키질쿰 사막에 들어선 것이다. 붉은 모래라는 뜻의 키질쿰은 사실 모래가 아닌 흙이다. 물만 있으면 생명이 움틀 수 있다는 뜻이다. 때문에 기사르산맥 주변 쌓인 눈이 녹아 흐르는 지역에는 푸른 녹지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물줄기를 끌어가기 위한 인공수로가 거미줄처럼 퍼져있고, 그 끝에는 누군가의 정성 아래 농작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늘 한 점 찾을 수 없는 사막의 무더운 열기를 경험하니 구법을 위해, 또는 전법을 위해 이 길을 걸었을 수행자들의 목숨을 건 여정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지금은 넉넉잡고 차로 8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이 길을 당시는 열흘은 쉬지 않고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이마저도 방향을 잘못잡거나, 도중에 물이 떨어지거나, 도적떼를 만나면 생의 마지막과 마주해야 했을 터다. 

때문인지 도시와 도시를 잇는 도로에서 만난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자동차 고장 등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는 법이 없었다. 물과 음식을 전하거나, 차를 수리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주거나, 최소한 위로의 말이라도 반드시 건냈다. 휴게소에서 길을 묻기라도 하면 지도를 꺼내 성심성의껏 알려주고, 모르는 장소면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서라도 도움을 주고자 했다.
 

사진 맨 위부터 실크로드교류사의 세계적 권위자 가토 규조 교수의 업적으로 소개하는 테르메즈 역사박물관 별실과 부하라 라비하우즈 야경. 라비하우즈는 수령 500년 이상의 뽕나무 3그루를 비롯한 여러 나무들이 만들어준 거대한 그늘로 밤에는 물론 낮에도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세 번째는 샘이 솟아나는 기적이 있은 후 또 다른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기도처 된 ‘차슈마 아윱’. 마지막은 사막의 도로 가운데 남아 있는 오아시스 ‘카라반 사라이’.

중국 문헌에는 이곳을 거쳐 중국에 도착해 불교 확산에 기여했던 스님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 이들은 불교 경전과 관련 서적을 한역(漢譯)했으며, 불탑과 사찰 건축법을 전했다. 파르티아의 안세고(安世高), 소그드의 강맹상(康孟詳)·강승회(康僧會), 쿠샨의 지루가참(支婁迦懺)·지겸(支謙)·축법란(竺法蘭) 스님이 특히 유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성(姓)이 출신국에 따라 붙여졌다는 점이다. 지루가참의 경우 쿠샨의 중국식 지명인 월지국(月支國) 출신이어서 ‘지(支)’가 성이 된 것이고, 실제 이름은 루가참이다.

지루가참 스님은 167년 낙양에 입성해 대승경전 번역 등 중국에 대승불교가 확산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스님은 ‘반야’ 등 불교사상의 전문용어를 비롯해 ‘사리’ ‘수미산’ 등 인도문화 관련 용어와 ‘사리불’ ‘수보리’ ‘아난’ 등 부처님의 제자 이름을 음역 형태로 처음 소개했다. 스님이 번역한 ‘도행반야경’ ‘반주삼매경’으로 인해 동아시아 불교권에 ‘공(空)’ 사상이 유입됐다.

강거국(康居國)으로 불린 소그드 출신의 강승회 스님은 274년 중국 오나라에 도착해 불교학파를 형성했다. 스님은 오나라 국왕 손권을 부처님께 귀의하게 했다. 손권은 스님을 위해 사찰을 지어 머물게 했고, 스님은 그곳에서 ‘육도집경(六度集經)’ 7부20권을 번역해 오나라에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폈다.

이후에도 동쪽으로 향하는 이곳 스님들의 전법 여정은 꾸준히 이어졌다. 그러던 중 5세기 경 스님들의 중국행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4세기 쿠샨왕조가 멸망한 후 이교도인 에프탈과 투르크, 아바스왕조가 지배하며 불교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박해를 피해 불교국가인 중국으로 대거 탈출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부하라에 가까워질수록 초원과 경작지가 확연하게 커져갔다. 초록이 가득한 곳에는 어김없이 맑은 물 흐르는 인공수로가 놓여있고, 경작지의 규모만큼 수로의 규모도 함께 몸집을 키웠다. 부하라는 불교사원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뷔하라’에서 유래됐다. 불교사원의 도시라는 이름이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불교와 관련된 유적은 남아있지 않다. 오히려 이슬람시대 이후 지금까지 ‘부하라 샤리프(성스러운 부하라)’라고 불리고 있으니 무슬림에게 부하라가 어떠한 곳인지 짐작케 한다. 

부하라는 텐산산맥 북쪽 기슭을 따르는 ‘실크로드 초원로’와 파미르고원을 넘는 ‘실크로드 육로 북도’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다. 실크로드는 이곳을 거쳐 키질쿰 사막과 카라쿰 사막을 뚫고 다시 페르시아와 카스피해 쪽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부하라는 동서문명 교류의 관문으로 불리며 오랜 세월 그 역할을 담당해왔다. 타임머신을 타고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 오래된 유적들이 2500년 동안 자리를 옮기지 않은 채 사막의 땅 위에 차곡차곡 덧씌워져있다. 

부하라 순례는 라비하우즈에서 시작해 라비하우즈에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우즈는 ‘호수’를 의미한다. 물이 귀한 사막도시 부하라 중심지에 자리 잡은 작은 호수가 바로 라비하우즈다. 과거 대상들이 낙타를 부려놓고 휴식을 취하던 숙소 ‘카라반 사라이’가 밀집했던 이곳은 현재 카페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호수 주변에는 수령 500년 이상의 뽕나무 3그루를 비롯한 여러 나무들이 만들어준 거대한 그늘로 밤에는 물론 낮에도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부하라를 대표하는 명소인 만큼 라비하우즈에 관한 이야기도 존재한다. 17세기 부하라의 지배자였던 나지르 지반 베기는 이곳에 호수를 만들고 싶었다. 땅의 주인인 유대인에게 집을 팔라고 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나지르는 지하의 수로를 틀어 유대인 집 쪽으로 향하게 했다. 우기가 되자 물이 범람해 집이 쓸려 내려갔고 유대인은 땅을 팔 수밖에 없었다. 호수는 1620년 완성됐고, 유대인은 쓸려간 집이 멈춘 곳에 교회를 세웠다. 실제 라비하우즈 남쪽 지역이 유대인 마을이고, 마을 초입에 유대교 교회가 있다.

부하라에는 크고 작은 하우즈가 100개나 있고, 각 하우즈는 인공수로로 연결돼 있다. 부하라를 오아시스의 도시라 부르는 이유다. 물과 관련된 또 다른 명소는 ‘차슈마 아윱’이다. 부하라 내 가장 성스러운 장소 중 하나로 ‘차슈마’는 샘 또는 우물을 뜻한다. 번역하자면 ‘아윱의 샘’이 된다. 과거 부하라 주민들이 식수난으로 고생할 때 이곳을 지나던 아윱이라는 성인이 지팡이를 내리쳐 샘물을 솟아나게 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 아윱이 구약에 등장하는 예언자 욥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구약의 욥이 살았던 곳이 현재의 요르단 지방임을 감안하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어찌 됐던 기적이 있은 후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들어 그 신기함에 감탄하고 또 다른 기적을 바라며 기도하는 장소가 됐다. 그리고 그 옛날 법륜의 바퀴 굴리고자 찾아온 이방인의 타는 목마름을 식혀준 감로수는 여전히 맑은 물 솟아내며 순례자를 맞이하고 있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491 / 2019년 6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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