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㉔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③
54.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㉔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③
  • 최병헌
  • 승인 2019.06.04 10:47
  • 호수 149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진흥왕 이후 초부족국가 정신과 왕실 신성화 위해 진종설화 수립

지증마립간 시대를 끝으로
법흥왕때부터 불교식 왕명

귀족 중심의 6부 체제 몰락
왕권 강화 차원 골품제 등장

첫째 동륜 단명, 진흥왕 사후
둘째 사륜 진지왕으로 즉위

진지왕 4년 만에 왕 물러나
동륜계와 투쟁의 산물 증거

6부 체제 넘어선 왕위계승
동륜계와 진지왕계가 경쟁

신라 중고기(23대 법흥왕〜28대 진덕여왕)가 시작된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법흥왕의 아버지인 22대 지증마립간 4년(503)부터라고 할 수 있다. 지증마립간(500〜514)은 영토의 확장, 국명과 왕호의 개칭, 우경(牛耕)의 실시, 순장(殉葬)의 금지, 주군(州郡)의 설치 등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의 발전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즉위 4년10월 국명을 신라(新羅), 왕호를 ‘왕(王)’으로 확정하고, 왕 이외에는 아무도 왕을 칭하지 못하게 한 것은 마립간시대를 마감하고, 뒤를 이은 법흥왕부터 이른바 불교식 왕명시대를 열게 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마립간시대(17대 내물마립간〜22대 지증마립간)는 6부(部)가 각각 독자적인 정치단위로서 공동의 회의체를 구성하여 운영하는 공화국의 지배체제였다고 하여 이른바 연맹왕국(聯盟王國)시대라고도 일컬어졌다. 6세기 이후의 현존 자료에 의하면 6부체제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에서 특히 탁부와 사탁부의 우세가 확연하여 탁부에는 국왕, 사탁부에는 갈문왕이 소속되어 있음이 나타난다. 국명과 왕호를 개칭하기 한달 전인 9월25일에 세운 ‘영일 냉수리비(冷水里碑)’에서는 7인의 6부회의 구성원(7王) 가운데 지증마립간이 사탁부 소속의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으로 나오는데, 그는 원래 정통의 왕위계승자가 아니었다. 지증마립간의 계보를 보면 ‘삼국사기’ 지증마립간 즉위년조에서는 “내물왕의 증손이요, 습보(習寶)갈문왕의 아들이며, 눌지왕의 6촌동생(再從弟)”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지증마립간의 아버지인 기보(期寶)갈문왕이 눌지왕의 동생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습보와 기보를 동일인으로 볼 때 한 세대의 차이를 나타낸다.) 이로써 지증마립간은 역대 왕들을 배출해온 탁부 소속이 아니고 사탁부 소속이었으며, 21대 소지마립간의 직계 자손이 아니고 김씨왕실의 방계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증마립간의 즉위 때 나이가 64세였다는 사실, 그리고 즉위 4년 동안 갈문왕의 칭호를 그대로 사용한 사실 등을 아울러 고려할 때, 갈문왕의 신분으로 정변을 일으켜 국왕에 즉위하여 지배체제의 정비와 왕권 강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증마립간 이후 중고기, 그리고 삼국통일 뒤의 중대의 왕위는 모두 그의 직계 자손으로 이어졌다. 지증마립간의 두 아들 가운데 큰 아들은 23대 법흥왕(514〜540), 작은 아들은 입종(立宗)갈문왕이었다. 법흥왕 11년(524) 정월15일에 세운 ‘울진 봉평비(鳳坪碑)’에서는 14인의 6부회의 구성원 가운데 탁부 소속의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과 사탁부 소속의 사부지갈문왕(徙夫智葛文王)이 제일 앞에 나오는데, 모즉지매금왕은 법흥왕, 사부지갈문왕은 입종갈문왕을 지칭한 것이다. 지증마립간의 두 아들 가운데 큰 아들은 국왕으로 탁부에, 작은 아들은 갈문왕으로 사탁부에 각각 달리 소속되었음이 특히 주목된다. 이로써 법흥왕대 이후 6부체제는 해체되어 단위 정치체로서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고 있었으나, 7세기 후반까지도 6부체제 자체는 잔존하여 모든 귀족에게는 소속부의 이름이 관칭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6세기초부터 7세기 후반 사이의 금석문자료 가운데 탁부와 사탁부 소속의 인물이 압도적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특히 법흥왕대 국왕은 탁부, 갈문왕은 사탁부의 소속이었던 것을 보아 실제적인 정국운영은 탁부 소속의 국왕과 사탁부 소속의 갈문왕에 의해 주도되는 이부연합(二部聯合)의 지배
체제였음을 알 수 있다. 

법흥왕은 즉위 7년(520) 율령의 반포, 14년(527) 불교의 공인, 18년(531) 상대등의 설치, 23년(536) 연호의 제정 등 일련의 개혁작업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국왕의 존재는 6부회의체의 구성원에서 벗어나 초월적 지위로 상승하게 되었다. 이제 국왕은 소속부에서 초월한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반면 6부회의를 계승한 귀족회의 구성원들은 예외 없이 소속부의 이름을 관칭하면서도 소속부의 구별에 우선하여 고위관등부터 열기함을 원칙으로 함으로써 일원적인 관등체계를 성립시키는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6부체제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는 대신에 왕족과 여타의 귀족이 구분되고, 일반귀족들의 차등이 규정되는 골품제도가 왕권의 강화와 관등체계의 정비와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역사의 전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법흥왕은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왕위는 입종갈문왕의 아들인 24대 진흥왕(540〜576)으로 계승되었다. 입종갈문왕은 법흥왕의 아우로서 ‘봉평비’와 ‘천전리서석(川前里書石’의 원명(元銘)·추명(追銘) 등 여러 자료에 등장하는 것을 보아 왕에 버금하는 실력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함으로서 이후 중고기 왕위는 그의 자손이 독점하게 되었다. 진흥왕은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법흥왕의 딸이자, 모후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의 섭정과 탁부 출신의 명신 이사부(異斯夫)의 보필을 받아 왕권을 강화하고, 영역을 크게 확장하였으며, 유교의 왕도사상과 불교의 전륜성왕 이념을 통합한 새로운 정치이념을 수립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진흥왕은 즉위 27년(566) 큰 아들 동륜(銅輪)을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6년만에 세상을 떠났고, 둘째 아들인 사륜(舍輪, 또는 金輪)이 왕위를 이어 25대 진지왕(576〜579)이 되었다. 진지왕은 즉위 초기 탁부 출신의 명신 거칠부(居柒夫)를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보필을 받았으나, 거칠부가 곧 죽고, 왕 자신도 즉위 4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삼국사기’에서는 진지왕이 죽은 사연에 대한 언급이 전연 없지만, ‘삼국유사’ 도화녀비형랑조에 의하면, 나라가 어지럽고 음난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폐위시켰다고 하여 왕의 폐위와 죽음이 정변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폐위 원인을 왕권 강화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에서 찾으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으나, 나는 왕실과 귀족세력 사이의 권력 투쟁의 결과라기보다는 동륜계와의 왕위계승투쟁의 산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성이 높다고 본다. 진지왕에게는 용수(龍樹, 뒤에는 龍春)라는 아들이 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제치고 실제 왕위를 계승한 것은 동륜의 아들인 26대 진평왕(579〜632)이었다. 동륜은 태자로서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동륜은 입종갈문왕의 딸과 결혼하여 백정(白淨)·백반(伯飯)·국반(國飯) 등의 아들을 두어 진지왕계(사륜계)와 경쟁하는 세력이 되었다. 결국 동륜계가 승리하여 진평왕을 즉위케 할 수 있었고, 그의 사후에는 큰 딸 덕만(德曼)이 27대 선덕여왕(632〜647), 조카딸 승만(勝曼)이 28대 진덕여왕으로 연이어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즉위과정에서는 적지 않은 혼란이 있었고, 그러한 사건의 배후에는 진지왕계 자손의 동향이 주요한 변수로 작용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평왕은 54년 동안 재위하면서 비교적 안정된 체제를 유지하였다. 그는 진흥왕대의 왕권강화와 영역확장의 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대내적으로는 중앙의 통치제도를 크게 정비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수(隋)·당(唐)과 통교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견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유학승들을 중국에 보내어 남조와 북조, 수와 당의 불교를 수입하여 초부족적인 국가정신과 새로운 윤리관을 수립하고 왕실의 신성화를 위한 진종(眞種, 刹帝利, kşatriy)설화를 수립하였으며, 나아가 통일 뒤 교학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실 안에서는 동륜계인 진평왕의 경쟁세력으로서 진지왕(사륜)의 아들인 용수가 건재하고 있었으며, 6부체제에서 초월적인 존재로 상승한 왕실 이외에도 6부 가운데 특히 탁부(양부로 개칭)와 사탁부(사량부로 개칭)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진평왕 7년(585)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 3곳에 각각 사신(私臣)을 두었는데, 6부 가운데 특히 탁부(양부)와 사탁부(사량부)와의 타협과 관리를 위한 것이었다. 위 3궁 가운데 대궁은 국왕이 거처하던 대궐, 양궁은 양부(梁部), 곧 이전의 탁부에 위치한 왕궁, 사량궁은 사량부(沙梁部), 곧 이전의 사탁부에 위치한 왕궁을 말하는데, 대궁에는 대아찬 화문(和文), 양궁에는 아찬 수힐부(首肹夫), 사량궁에는 이찬 노지(弩知)를 각각 사신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진평왕 44년(622)에 3궁을 통합하여 내성(內省, 경덕왕 때 殿中省)을 설치하고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龍樹, 뒤에 龍春으로 개명)를 사신(경덕왕 때 전중령)으로 임명하였다. 3궁 이외에 본피부(本彼部)에 위치한 왕궁도 있었는데, 관원의 수와 격이 3궁에 비해 떨어지고 있어서 본피부의 세력이 양부와 사량부보다 약화되었던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통치체제가 크게 정비된 진평왕 44년에 이르러서는 6부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던 양부와 사량부도 독자성을 강하게 지닌 단위 정치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단순한 왕경의 행정구획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6부에는 6부소감전(六部小監典, 또는 六部監典)을 각각 설치하여 운영하고, 그 위에 전읍서(典邑署)를 설치하여 6부를 통합 관리하였다. 또한 3궁을 통합하여 관리하는 사신으로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가 임명됨으로써 이제 왕위계승은 6부체제를 뛰어넘어서 오로지 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으로 이어지는 동륜계와 용수(춘)-태종무열왕으로 이어지는 진지왕(사륜)계 사이의 연합과 경쟁의 체제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이외에 본가야 왕실의 후예인 무력-서현-유신계가 새로운 변수로 끼어드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91 / 2019년 6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