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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麻)을 지고 가는 사람의 비유

기자명 마성 스님

자신 견해 잘못 알았을 땐 과감히 버려야

어리석어 믿어야 할 것 안믿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어 참변

보통은 자기 지위·체면만 생각
잘못된 견해 쉽게 버리지 못해

스리랑카의 고도 아누라다푸라의 숲속에 조성된 불상. 선정불(禪定佛) 혹은 삼매불(三昧佛)로 불린다. 기원전 3~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스리랑카의 고도 아누라다푸라의 숲속에 조성된 불상. 선정불(禪定佛) 혹은 삼매불(三昧佛)로 불린다. 기원전 3~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옛날에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두 친구가 재물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어떤 마을에 도착하니 많은 삼[麻]이 흩어져 있었다. 둘은 삼[껍질] 꾸러미를 짊어지고 다른 마을로 갔다. 그곳에는 삼실이 많이 흩어져 있었다. 한 동료는 삼 꾸러미를 멀리서 가지고 왔고 짐은 튼튼하게 잘 꾸려졌기 때문에 그대로 삼 꾸러미를 짊어지고 갔다. 그러나 다른 동료는 삼 꾸러미를 버린 뒤 삼실 꾸러미를 꾸려 길을 떠났다.

또 다른 마을에 도착하니 많은 삼베가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삼 꾸러미를 가지고 온 동료는 그대로 짊어지고 다른 마을로 향했다. 그러나 다른 동료는 삼실 꾸러미를 버린 뒤 삼베 꾸러미를 가지고 길을 떠났다. 그들은 또 다른 마을로 갔다.

그곳에는 아마가 많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 아마실이 … 아마천이 … 무명이  … 무명실이 … 철이 … 구리가 … 주석이 … 납이 … 은이 … 금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한 동료가 다른 동료에게 말했다.

“벗이여, 이렇게 많은 금이 있소. 우리가 구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금이요. 그러니 그대도 금으로 짐을 꾸리시오. 나도 금으로 짐을 꾸리겠소. 우리 둘이 금으로 짐을 꾸려가지고 갑시다.” 그러자 삼을 지고 온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벗이여, 나는 이 삼으로 꾸린 짐을 멀리서 가지고 왔고 짐은 튼튼하게 잘 꾸려졌다오.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오. 그대는 알아서 하시오.”

그러나 처음 동료는 은으로 꾸린 짐을 버린 뒤 금으로 꾸린 짐을 가지고 자기의 마을로 돌아왔다. 한편 삼으로 꾸린 짐을 가지고 온 동료는 그의 부모도 기뻐하지 않았고 처자식들도 기뻐하지 않았고 친구와 동료들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그것으로 인해 행복과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반면 금으로 꾸린 짐을 가지고 온 동료는 그의 부모도 기뻐하였고 처자식도 기뻐하였고 친구와 동료들도 기뻐하였다. 그 자신도 그것으로 인해 행복과 기쁨을 누렸다.

이 이야기는 ‘디가 니까야’ 제2권 ‘빠야시-숫따’(DN23)에 나온다. 이 경은 꾸마라깟사빠(Kumārakassapa) 존자가 빠야시(Pāyāsi) 태수에게 설한 법문 가운데 일부이다. 빠야시 태수는 꼬살라의 빠세나디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영지(領地)에 살고 있었다.

빠야시 태수는 “이런 [이유로] 저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화생(化生)하는 중생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열매도 과보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빠야시 태수의 주장은 전형적인 단멸론이다.

꾸마라깟사빠 존자는 빠야시 태수에게 “태수여, 나는 일찍이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이유로] 저 세상도 없고 화생하는 중생도 없고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열매도 과보도 없다’라고 주장한단 말입니까?”라고 반문했다. 그런 다음 여러 가지 비유, 즉 태양과 달의 비유, 도둑의 비유, 분뇨구덩이에 빠진 사람의 비유, 도리천 신들의 비유, 선천적으로 눈이 먼 사람의 비유, 임산부의 비유, 꿈의 비유, 달구어진 철환의 비유, 고동 부는 비유, 불을 섬기는 자의 비유 등으로 빠야시 태수의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해 주었다.

그러나 빠야시 태수는 “꾸마라깟사빠 존자께서 [저를 어리석다고] 말씀하실지라도, 저는 결코 이러한 사악한 나쁜 견해[라 불리는 것]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빠세나디 꼬살라 왕과 다른 태수들은 빠야시 태수는 ‘이런 [이유로] 저 세상도 없고 화생하는 중생도 없고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열매도 과보도 없다’라는 주장과 견해를 가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꾸마라깟사빠 존자시여, 그런데 제가 사악한 나쁜 견해[라 불린다 해서 그것]을 버리게 되면 제게는 ‘빠야시 태수는 참으로 어리석고 영민하지 못하여 잘못된 것을 움켜쥐고 있었구나.’라는 이런 말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분노하면서 이것을 고수할 것입니다. 경멸하면서 고수할 것입니다. 앙심을 품고 고수할 것입니다.” 이처럼 빠야시 태수는 자신의 잘못된 견해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자 꾸마라깟사빠 존자는 ‘두 대상(隊商)의 비유’를 들어 태수에게 “사악한 나쁜 견해를 버리시오. 태수여, 사악한 나쁜 견해를 버리시오. 그대에게 오랜 세월 불행과 괴로움이 있게 하지 마시오”라고 일러주었다. 두 대상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천 대의 수레를 가진 큰 대상이 있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풀과 땔감과 물과 푸성귀가 즉시에 고갈되었다. 그래서 오백 대의 수레를 이끄는 두 대상으로 나누었다. 한 대상의 우두머리는 많은 풀과 땔감과 물과 푸성귀를 모아서 먼저 길을 떠났다. 하지만 도중에 만난 어떤 사람이 일러준 말을 그대로 믿고 이전의 풀과 땔감과 물 등을 모두 버리고 길을 떠났다. 그들은 첫 번째 야영 장소에서도 풀과 땔감과 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두 번째 … 일곱 번째 야영 장소에서도 풀과 땔감과 물을 발견하지 못하고 모두 참변을 당했다. 그 대상은 비인간인 약카(Yakkha, 夜叉)의 먹이가 되었으며 결국 해골만 남았다.

나중에 출발한 다른 대상도 도중에 어떤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그 대상의 우두머리는 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풀과 땔감과 물을 모두 가지고 길을 떠났다. 그들은 첫 번째 야영 장소에서도 … 일곱 번째 야영 장소에서도 풀과 땔감과 물을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먼저 떠난 대상이 모두 참변을 당한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첫 번째 대상의 우두머리는 어리석어서 믿어야 할 것은 믿지 않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은 믿어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여전히 빠야시 태수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꾸마라깟사빠 존자는 끝으로 앞에서 언급한 ‘삼[麻]을 지고 가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때 비로소 빠야시 태수는 자신의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고 꾸마라깟사빠 존자에게 귀의하였다.

이처럼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와 체면 때문에 자신의 잘못된 견해를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의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알았을 때에는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래야 정신적으로 향상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ripl@daum.net

 

[1491 / 2019년 6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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