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저항 시인이자 스님이자 독립투사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은 호국보훈의 달 6월, 독립운동가로 만해 스님(1879~1944)이 선정됐다.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5월31일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민족이 낳은 위대한 저항시인이자 스님 독립투사 만해 한용운 선생을 2019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만해 스님은 1879년 8월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만해 스님은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발간, 한국불교가 새로운 문명세계에 적응할 수 있는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만해 스님은 이때부터 불교 혁신운동을 일으킨 주역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됐다.
1919년에는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3·1만세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만해 스님은 불교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 및 전국적인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하도록 권유했다. 1919년 3월1일 서울 종로 태화관에 민족대표들과 자리한 만해 스님은 독립선언식을 가진 뒤 일경에게 체포됐지만, 같은 해 7월10일 옥중에서 집필한 ‘조선독립의 서’를 통해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의연하게 강조했다.
만해 스님은 석방 후에도 민족운동의 최일선에 섰다.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조신민립대학 기성회 상무위원으로서 활동했으며, 좌우합작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 창설이 추진되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신간회 창립 후에는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돼 활약했다.
55세가 되던 1933년 지금의 서울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집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집을 지을 때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에 볕이 잘 드는 남향에 터를 잡으라는 지인들의 권유에도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며 끝내 동북 방향으로 집을 틀어지었다. 집터를 잡을 때 역시 민족적 자존심을 꺾지 않은 만해 스님은 일제강점기 끝무렵에 자행된 황민화 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꼿꼿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창씨개명 반대운동과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한평생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염원하던 만해 스님은 1944년 6월29일 광복을 눈앞에 두고 입적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만해 스님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공훈을 기렸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1492호 / 2019년 6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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