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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달라이라마의 전법 ④

기자명 김정

세계인, 중국 폭압 맞선 티베트 자비에 감동하다

1956년, 티베트자유투사 공격에
중국 4만명 증강 가족들도 처형  
인도 네루 배려로 다람살라 정착
비폭력 노선에 국제사회 큰 호응

그림=육순호<br>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1956년 여름, 캄과 암도 지역의 티베트 자유투사연맹은 중국을 공격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중국군은 4만명을 증강하였다. 중국군은 저항군에 가담한 티베트인들의 아내와 자식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처형했는데, 특히 가혹한 것은 그 고문을 승려들을 시켜서 한 점이었다. 달라이라마는 지안 장군에게 항의했지만 그는 “당신의 비난은 티베트 국민들을 보호하고 도우려는 ‘조국’에 대한 모욕”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해 봄, 달라이라마는 라싸를 방문한 시킴 왕국의 쿠마르 왕자를 만났는데, 그는 아시아 불교도들을 대표하는 ‘마하보디협회’ 의장이었다. 그 자격으로 그는 달라이라마에게 인도에서 열릴 예정인 부처님 탄신 2500주년을 기념하는 ‘붓다 쟌티’에 참석해줄 것을 요청했고, 중국 당국은 티베트인들을 무마하기 위해 이를 허락했다.

달라이마라는 인도를 방문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때 받은 인상을 그는 이렇게 적었다. 

“그 당시 인도에서 내가 발견한 것 중의 하나는 내가 자주 초대를 받아 가는 연회나 리셉션이 중국에서 참석했던 것보다 물질적인 면에서는 정성이 덜했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참된 우정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인민공화국에서의 경험과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인민공화국 사람들은 위협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인도인들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진실한 마음으로만 우정이 싹틀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에서 달라이라마는 인도에 머물러 티베트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지를 인도 수상인 네루에게 타진해보았다. 그러나 그는 “인도가 당신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사실상 거부 의사를 피력했다. 네루에게는 티베트보다 중국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맺은 ‘판치 쉴 조약’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머지 않아 중국은 네루가 그토록 성실하게 지키려 애썼던 그 조약을 무시하고 인도와 전쟁을 벌이게 되며, 이에 낙망한 네루는 심적 타격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 후에 죽고 만다.

인도로부터 티베트로 돌아온 후, 캄과 암도 지방에서 티베트 자유투사들과 중국군 간의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중국군은 비행기를 사용해 도시와 마을들을 폭격했고, 그 결과 생겨난 난민 수천 명이 티베트를 떠나 인도로 갔다. 달라이라마는 그들로부터 끔찍한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1959년에 발표된 국제사법위원회의 보고서는 중국군이 티베트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하고 창자를 도려내며 손발을 잘랐다고, 또한 머리를 베거나 산 채로 죽을 때까지 때리거나 말에 사람을 매달고 죽을 때까지 달렸다고, 죽을 때 “달라이라마 만세!”라고 외치지 못하도록 혀를 찢었다고 보고했다.

그런 와중에도 달라이라마는 수행과 공부를 계속했고 다른 승려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승려 자격시험을 치른 끝에 게세(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군의 위협은 갈수록 심해졌다. 그들은 달라이라마에게 자신들의 병영으로 들어와 안전하게 있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티베트인 수만여 명이 달라이라마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가 머무는 라싸를 에워쌌다.

계속 티베트에 남아서 투쟁할 것인지 티베트를 탈출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이런 경우 ‘네충 신탁’을 받는 것이 달라이라마의 전통이었는데, 신탁은 달라이라마가 티베트에 머물러 중국과 협상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런 차에 달라이라마는 중국군들이 군중을 무차별 공격하기로 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튿날, 달라이라마는 세 번이나 같은 답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네충 신탁을 요청했다. 그러자 영매는 큰소리로 “가라! 오늘 밤 당장 떠나라!”라고 외치더니 탈출할 길까지 상세히 그려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라싸를 떠난 달라이라마 일행은 일주일 뒤에 룬체종이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하여 중국에 의해 강제된 17개 협정 조항을 거부한다고 공식선언을 한 다음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다. 그러고는 인도를 향해 출발하여 3주 후에 봄딜라에 도착한 달라이라마 일행은 네루 수상의 환영 전보를 받았다. 달라이라마는 전 세계의 수많은 기자들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그 사이에 중국군은 수천 명의 티베트인들을 살상하고 많은 건물들을 파괴했다. 1959년 3월에서 다음 해 9월까지에만 무려 12만 명이 희생되었을 정도로 중국군의 공격은 가혹했다. 그리하여 티베트를 탈출하는 난민들이 달라이라마가 머무는 무수리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영양실조와 부상, 추위, 결핵 등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달라이라마는 인도에 머무는 여러 나라의 대사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였고, 그중 말레이시아와 아일랜드 대사가 특별한 동정의 뜻을 표했다. 그들은 유엔에 임시 의결문을 발기하였는데, 그 안은 그해 10월에 찬성 45표, 반대 9표, 기권 26표로 통과되었다. 중국과의 관계를 해치지 않으려는 의도로 인도는 이 표결에 기권하였으나, 달라이라마와 티베트인들을 위해서 새로운 정착지인 다람살라를 제공해주었다. 달라이라마는 다람살라에 20여개의 정착촌을 건설했는데, 마지막에는 10만명에 이르는 티베트인들이 모인 공동체로 발전했다. 

1959년에 인도로 망명한 이래 달라이라마는 티베트 공동체의 정치적 대표이자, 티베트 불교의 종교적 대표로서 활동했다. 그는 티베트의 독립을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원했지만 그 목적을 추구함에 있어서는 본국에 결성한 독립투쟁단체인 캄바의 무장투쟁 노선에 반대하여 이를 해산시키는 등 비폭력 노선을 견지했다. 달라이라마의 이런 입장은 국제사회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유수의 인권단체들이 달라이라마가 취한 행동에 깊은 공감과 경의를 표했고, 그 결과 그에게 노벨평화상(1989년), 루스벨트 자유상(1994년), 세계안보평화상(1994년)이  주어졌다.

달라이라마는 자신이 취하는 행동의 배후에 불교 진리인 다르마가 있음을 천명하였고, 이로써 세계인들은 불교철학이 지향하는 평화의 정신에 감명받았다. 달라이라마는 세계 전역을 돌며 불교 다르마를 설법하였는데, 그것은 티베트인들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 국가 사람들을 향한 것들이, 특히 타종교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들이 많았다.

티베트 전통이 명상을 중시해온 것을 배경으로, 달라이라마는 명상의 보급 및 과학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달라이라마는 언젠가 “만일 불교의 가르침이 자연과학의 법칙과 다르다면 그 경우 자연과학에 따르는 것이 맞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정신에 입각하여 그는 티베트의 명상가들을 대상으로 자연과학적 실험을 하는 데 동의하였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92호 / 2019년 6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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