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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바람,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②-동은 스님

기자명 동은 스님

“원력의 바람(願), 삶 존재하게 하는 바람(風) 일으켜” 

어제의 바람은 병든 청년이 
고뇌하던 질풍노도의 바람
오늘의 바람은 불보살 가피로 
다시 태어난 수행자의 바람
내일의 바람은 따뜻한 훈풍 
중생 곁으로 다가가는 바람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그해 겨울, 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방황하던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이름 모를 암자에 들었다. 주인은 어딜 갔는지 없고 토담으로 지어진 낡은 암자에는 어둠만큼이나 적막감이 돌았다. 이것저것 따질 입장이 아니었던 나는 무작정 방에 들어가 통나무처럼 쓰러져 잠을 잤다. 얼마쯤 잤을까. 밝아 오는 여명에 정신을 차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야말로 이슬이나 피할 정도의 토굴 수행처였다. 정신이 조금씩 들면서 벽 한 곳에 붙어있는 하얀 종이에 시선이 쏠렸다. 가까이 다가섰다. 무슨 글을 써 놓은 것이었다. 천천히 한자 한자 읽어 나갔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이 대목에서 갑자기 목이 메어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출가 전 교회를 다녔던 나는 불교가 뭔지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삶을 뒤흔든 사건이 발생했다. 그 무렵 심한 피로감과 코피가 자주 났었는데 어느 날 길을 가다 쓰러지고 말았다. 깨어난 병원에서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혈액암’이라는 것이었다. 절망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죄라면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데,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려야 하는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억울했다. 분노했다. ‘신의 섭리’라는 말은 내게 통하지 않았다.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들은 나를 산과 바다로 끌고 다녔다. 그야말로 ‘광풍’이었다. 바람이 그물에 걸린 것이었다. 

그 그물은 질겼다. 운명이란 씨줄과 팔자라는 날줄에 무슨 접착제라도 뿌려놓았는지 한 번 걸린 그물은 마치 독거미 줄에 걸린 나비같이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발버둥을 치면서 거의 탈진상태가 되었다. 더 이상 날개를 퍼덕일 힘도 없어져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그리고 점점 옥죄어 오던 거미줄에서 완전히 이완을 했다. 문득 “그럼 누가 그물을 만들었지? 난 그런 그물 필요 없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거미줄이 스르르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 몸 가득 알 수 없는 평온함이 밀려왔다. 바람이 그물을 통과한 것이었다. 

선종 6조 혜능대사가 남방에 은거할 때다. 어느 날 인종(印宗) 법사가 ‘열반경’을 강의하는 회상(會上)에 갔다. 이때 바람에 깃발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한 스님이 “깃발이 흔들린다”고 하자, 다른 스님은 “바람이 흔들린다”며 논쟁을 했다. 이때 혜능 대사가 “그것은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라고 했다. 인종법사는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이것은 5조 홍인 대사의 법을 계승한 혜능대사가 오랜 은둔생활을 끝내고 세상에 나오는 극적인 장면이다. 이것을 ‘바람과 깃발의 문답’이라 한다. 

바람과 깃발이라, 이 얼마나 멋진 비유인가. 바람이 없으면 깃발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흔들리는 깃발을 통해서 바람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바람의 정체성은 움직이는 것이다. 진동이며 파장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바람의 생명력은 끝난다. 우리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바람, 즉 ‘깃발’이라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시간’이라는 것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 실체는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다. 내가 존재한다고 믿는 그 순간 마음속에 생겨났다가, 그 자리를 확인하려는 찰나 사라져 버린다. 결국 존재란 이 머무르지 않고 흐르는 ‘찰라생 찰라멸’하는 그 바람결에 있다. 삶은 오직 지금, 한 생각 일으키는 이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럼 삶이란 무엇인가? ‘아픔’이란 무엇이고 ‘슬픔’이란 무엇인가? ‘운명’이란 무엇이고 ‘팔자’는 또한 무엇인가? 이것들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깃발을 흔들어대는가? 마음속에 씨앗처럼 잠재되어 있다가 인연 조건을 만나면 비로소 바람이 되어 깃발로 나타나는가? 나는 결국 그 ‘불치병’이라는 씨앗에 ‘바람’이라는 조건이 맞아 떨어져 ‘출가’라는 깃발을 달게 된 것인가? 작용이 있는 곳에 결과가 나타난다. 운명이란 놈에게 뒤통수를 한 방 맞아봐야 “어이쿠, 이놈이 도대체 뭐야?”하고 꿈틀하게 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저마다의 깃발을 꽂고 산다. 어떤 바람을 만나 어떤 모습으로 흔들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깃발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아, 내가 살아있구나”하고 슬쩍 미소 한 번 지어주면 된다. 

나는 오래전부터 사람은 존재가 아니라 바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문득 바람 냄새를 맡게 될 때 가슴 아린 그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무의식을 자극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그리움. 불어오는 바람처럼 태어나고, 불어가는 바람처럼 사라져가는 것이 인생이다. 내 삶에 있어, ‘어제의 바람’은 병든 한 청년이 고뇌하던 질풍노도의 바람이었다. ‘오늘의 바람’은 불보살님의 가피로 다시 태어난 행복한 수행자의 바람이다. ‘내일의 바람’은 따뜻한 훈풍으로 중생들 곁으로 다가가는 바람이다. 바람(風)과 바람(願)은 발음이 같다. 한 생각 일으키는 그 바람(願)이 삶을 존재케 하는 바람(風)을 일으킨다. 그래서 발음이 같지 않나 생각도 해본다. 이제 나의 바람이란 중생들을 향해 늘 깨어 있게 하는 원(願)이다.

인생은 내가 지금 어떤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는가에 따라 삶의 내용이 달라진다. “오늘은 어제의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현재의 생각은 내일의 삶을 만들어 간다. 삶은 이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니,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하게 되면 고통이 따른다. 마치 수레가 소를 뒤따르듯이”, ‘법구경’에 있는 말이다. 삶에는 많은 방향이 있으며 어떤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는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달려 있다. 이 선택은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다. 나는 그물에 걸린 바람이 되어 허우적거리다가 출가라는 선택을 통해 수행자라는 큰 선물을 받은 셈이다.

동은 스님 삼척 천은사 주지 dosol33@hanmail.net

 

[1492호 / 2019년 6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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