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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법성게’ 제24구: “파식망상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

기자명 해주 스님

일승의 수행자는 버릴 망상이 없어서 망상을 쉬지 않을 수 없다

망상은 실재가 있는 것 아니니
번뇌 또한 곧 용일 뿐 체가 없어

망상이 실재가 아닌 것 알기에
망상은 없으며 반드시 쉼 얻어

부처님 삼업 감응해 얻은 이 몸
다시 계를 받을 것이 없으므로
계를 버릴 것도 없음을 알아야

“만약 부처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뜻을 허공처럼 맑혀라. 망상과 모든 집착을 멀리 여의어, 마음이 향하는 바가 다 걸림 없도록 하라.(若有欲知佛境界 當淨其意如虛空 遠離妄想及諸取 令心所向皆無礙)”(화엄경)

모든 중생에게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가 구족해 있는데 망상과 집착 때문에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해서 괴로움을 받고 있다. 망상과 집착만 여의면 본래 구족한 부처님 지혜를 얻어서 안락하게 된다. 망상과 집착을 여의면 부처님 경계를 알 수 있으니, 다시 말해서 여래로 출현하게 된다는 ‘여래출현품’ 법문이다.

‘법성게’ 제24구 “파식망상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은 “망상을 쉬지 않을 수 없다. 망상 쉼을 반드시 얻지 않을 수 없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망상 쉼을 반드시 얻지 못함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또는 “망상을 쉬지 않으면 반드시 얻을 수 없다”라고도 번역한다. 파(叵)는 불가(不可)의 뜻이며, 혹은 막(莫)의 뜻으로 사용되고도 있다.(원통기)

‘망상’의 사전적 뜻은 ‘이치에 맞지 않는 허황된 생각’이다. 망령된 생각, 허망한 생각, 헛된 생각 등의 의미이다. 망상은 집착을 생기게 한다. ‘망상을 쉰다[息]’는 것은,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며[不起], 망상을 멀리 여의고[遠離], 끊어 멸하는 것이다.[斷滅] 

그러면 구체적으로 망상이 무엇이며, 식망상(息妄想)은 어떠한 경계인지, ‘일승법계도’의 주석서와 ‘도신장’ 등을 통해서 살펴보자. 

첫째, 망상은 두 가지 아집[二我執] 즉 인아집(人我執)과 법아집(法我執)이다.(법기) 인아집은 단일한 개체의 자성이 실유(實有)라고 집착하는 사견이며, 법아집은 색(色)·심(心)을 구성하는 모든 법의 자성이 실유라고 집착하는 사견을 말한다. 아집은 아견(我見)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보법을 믿고 향하는 수행자[行者]는 안으로 증득한 해인의 본래 자리에 돌아가니, 그 해인의 경지는 만약 아(我)가 있으면 이를 수 없고 무아(無我)의 사람이라야 능히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만약 아집을 야기하는 팔식(八識)의 망상을 점차로 쉬어서 이를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삼승의 뜻이고, 일승에서는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본래 자리에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 행자가 여의의 가르침으로 처음 발심하는 때에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곧 바로 법성가에 들어가게 된다.(대기)  

둘째, 망상이란 일승에서 흘러나온 것[所流]과 일승을 목표로 하는 것[所目] 등에 통한다. 삼승의 사람이 자교(自敎)의 자취를 지켜서 집착하여 구경을 삼기 때문에, 이 미혹한 집착을 기준하여 총체적으로 망상이라 한다.(대기)

만약 이 집착을 끊으려면 육상(六相)의 칼을 사용해야 하니, 육상 가운데 이상(異相)의 도장을 찍으면 곧 그 끊어지는 대상이 각각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서 분명하게 차별된다. 

그러므로 만약 일승에 들어가려면 삼승에서 말하는 망상을 끊는다는 마음을 쉬어야 한다. 만약 그 망상 끊는다는 망상을 쉬지 않는다면 곧 망상을 쉬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즉 망상을 끊는다는 마음을 끊어 없애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식망상’이라는 것이다.
 

화엄경변상도권1.고려목판.
화엄경변상도권1.고려목판.

셋째, 망상이란 자기의 몸과 마음 외에 부처를 바라고 법을 구하는 마음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대기) 

‘원통기’에서는 본유(本有)를 기준으로 해석하여, 만약 망상을 쉰다면 곧 반드시 본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본유의 진여는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성공덕(性功德)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넷째, 망상이란 본래 없다. 망상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니, 번뇌는 오직 용(用)일 뿐이고 체(體)가 없다. 따라서 번뇌가 본래 끊을 바가 없는 것임을 아는 것을 끊음[斷]이라고 이름할 뿐이다.(도신장)

‘화엄경’의 여래광명각품에서는 “일체 모든 세간이 다 망상을 좇아 생겨났으나, 이 모든 망상 법이 그 자성이 일찍이 있지 아니하다(一切諸世間 皆從妄想生 是諸妄想法 其性未曾有).”라 하고, 진실상(眞實相)을 아는 것이 도사(導師)이신 부처님을 뵙는 것이라 설하고 있다. 

의상 화상이 이르기를, “번뇌(惑)는 오직 용(用)일 뿐이고 체(體)가 없으나, 지혜는 체와 용을 갖춘다”라고 하였다.

문. 체가 없으면 어떻게 작용이 있을 수 있는가?
답. 체는 머무름 없는 실상이며 미혹의 작용이 번뇌가 되니, 미혹의 작용을 쉴 뿐이고 끊을 수 있는 체가 없다. 
문. ‘하나를 끊으면 일체가 끊어진다’란 이미 체가 없으면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 및 일체로 삼는가?
답. 장애되는 법문을 기준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하나와 일체를 말하는 것은 하나가 곧 일체인 법문을 장애하기 때문이다.(도신장) 

이처럼 번뇌 망상은 ‘하나를 끊으면 일체가 끊어진다’고 하나, 실제로는 끊을 바가 없다. 그래서 ‘도신장’에서는 또 “덕으로써 말하면 처음부터 걸림이 없고, 미혹으로써 바라보면 다함없는 덕을 덮는 것이라 한다.

‘진기’에서는 ‘망상을 쉰다’란 지위에 의거함을 기준으로 해서 말한다면 끊을 수 없음으로써 끊음을 삼기 때문에 끊음의 뜻이 이루어지며, 만약 곧바로 일승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 장애를 듦에 체의 양이 법계와 같고 지혜를 드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고 한다. 

설잠 스님은 ‘법계도주’에서 ‘삼세제불·역대선사와 일체설법이 향상의 한 수[向上一着]와 끝내 관계가 없으며, 온 대지가 곧 업식(業識)이어서 넓고 넓어 본래 의지할 것이 없다’라고 한다. 다만 거짓 이름자로써 중생을 인도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망상과 식망상 그리고 “파식망상필부득”에 대한 해석이 다양함을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망상을 쉬지 않으면 반드시 얻을 수 없다.”라고 번역함은 삼승과 동교일승적 해석이다. 별교일승적으로 본다면, 본제에 돌아간 일승 화엄 행자에게는 망상은 없다. 망상이 실재하는 것이 아닌 줄 알아서 망상이 없는 것이니, 그것이 망상 쉼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파식망상필부득”을 “망상 쉼을 반드시 얻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별교일승적 식망상을, 의상 스님의 법손들은 일승의 지계바라밀과 연계해서 설명하고 있다. ‘진기’에서는 만약 일승을 기준으로 한다면 장애의 체를 듦에 양이 법계와 같고 지혜를 들어도 또한 양이 법계와 같으니, 만약 장애와 다른 지혜로 지혜와 다른 장애를 끊고자 한다면 망상을 쉬지 않은 까닭에 반드시 끊을 수 없으며, 계를 지님도 또한 그러하다고 한다. 만약 별도로 선(善)을 취하여 막음의 주체로 삼고 그 불선(不善)을 취하여 막음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이와 같이 지니는 자는 오히려 계를 깨뜨리는 사람이라고도 한다.

숭업 스님은 일승의 계는 본래 계를 받고 버림이 없어서 막음의 주체와 대상을 여의었다고 한다. 그것은 제2지에서 부처님이 행하시는 것이 일승의 계가 되나, 일승 중에는 모든 범부와 소승 및 보살이 없고 오직 만족된 부처님만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엄경’의 제2지(離垢地)에서는 지계바라밀의 구체적 내용으로 십선업(十善業)을 펴고 있다. 십선업은 신업(身業)의 세 가지, 구업(口業)의 네 가지, 의업(意業)의 세 가지이다. 이 신구의 삼업은 지계자인 보살의 성품이 저절로 일체 악업을 멀리 여의어서 저절로 악업을 짓지 않고, 그 성품이 바로 십선업으로 나타남을 강조하고 있다.

숭업 스님은 이 신구의 삼업이 바로 부처님의 삼업이므로 계를 받음도 없고 버림도 없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십선 가운데 처음 셋은 ‘여래명호품’의 신업의 행하는 바이고, 다음 넷은 ‘사성제품’의 구업의 행하는 바이고, 다음 셋은 ‘광명각품’의 의업의 행하는 바이다. 이러한 삼업은 법계의 일체 모든 법이 모두 부처님의 삼업임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지금 이 나의 몸은 부처님의 십선에 감응하여 얻은 바이다. 

그러므로 본래 미혹한 때가 없고 다시 법을 받음도 없어서 삼세가 다하도록 항상 스스로 움직이지 아니하며 또한 법을 버림도 없다. 몸 밖에 경계가 없으며 경계밖에 몸이 없어서 막음의 주체와 대상을 여의었다.(관석)

‘여래명호품’과 ‘사성제품’과 ‘광명각품’은 화엄경 제2회에서 설하는 믿음의 대상이 되는 세 품이다. ‘여래명호품’에서는 시방세계 부처님의 명호가 한량없으니, 그것은 부처님의 신업이 한량없기 때문이다. ‘사성제품’과 ‘광명각품’도 부처님의 구업과 의업 경계가 한량없어서 사성제 법문과 깨달음의 광명이 시방세계에 한량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부처님의 삼업에 감응하여 얻은 몸이 지금 이 몸이므로, 본래 미혹한 때도 없고 다시 계를 받을 것도 없으므로 계를 버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승의 수행자는 피울 망상도 없고 버릴 망상도 없어서 망상을 쉬지 않을 수 없으므로 “파식망상필부득”이라 함을 알 수 있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92호 / 2019년 6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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