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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7·28대 총무원장 월주 스님-상

‘자주‧자율적 종단 건설’ 원력 세웠지만 10‧27법난으로 좌절

조계사·개운사파 극적 합의로
조계종에도 1980년 ‘서울의 봄’
월주 스님 17대 총무원장 당선
불교 자주 내세우며 정권과 대립
‘5·18’ 발발하자 광주 위문 방문
신군부 강압에 총무원장서 사직

1970년 5월 당시 조계종 교무부장을 맡았던 월주 스님이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출처=‘토끼뿔거북털’

조계종 총무원장은 영욕의 자리다. 종단 대표권 등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어 선망의 자리가 될 수 있지만, 그로 인해 감내해야 할 것도 적지 않다. 뜻하지 않은 도전에 직면하기도 하고, 중도에 물러나야 할 때도 많다. 파란만장했던 조계종사가 웅변한다. 

조계종 17‧28대 총무원장을 역임한 월주 스님의 삶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탁월한 리더십과 종무경력, 개혁적인 이미지로 두 번이나 총무원장에 올랐지만, 시련 또한 만만치 않았다. 첫 총무원장은 신군부가 자행한 10‧27법난으로, 두 번째 총무원장은 ‘98년 종단사태’를 부른 3선 논란으로 종단사의 전면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렇기에 ‘총무원장 월주 스님’에 대한 평가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공존한다. 월주 스님의 첫 총무원장은 1980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무렵 조계종에도 ‘서울의 봄’이 찾아들었다. 종정중심제 논란으로 촉발된 2년7개월간의 종단분규가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서울 조계사와 개운사에 별도의 총무원을 설립했던 양측은 3월30일 서울 적조사에서 만나 분규 수습을 위한 극적인 합의를 이룬 데 이어 4월17일 6대 중앙종회의원 총선거를 실시해 69명의 중앙종회의원을 새롭게 선출했다. 갈등과 대립으로만 치닫던 조계종에 모처럼 찾아든 훈풍이었다. 언론도 “조계종이 2년7개월간의 분규를 끝내고 화합을 이뤘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중앙종회는 4월26일 6대 개원 종회를 열고 의장단 및 총무원장 선출에 착수했다. 종단 안팎에서는 누가 차기 총무원장에 선출되느냐에 관심이 모아졌다. 비록 조계사‧개운사파가 통합을 이뤘지만 양측 모두 종단운영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속내가 강했다. 개정된 종헌에 따라 총무원장이 종단의 실질적 대표권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양측은 총무원장에 거는 기대가 컸다. 

‘대한불교(1980년 4월27일자)’에 따르면 개원종회를 앞두고 총무원장 후보로 7~8명이 물망에 올랐다. 조계사파에서는 혜정‧송원 스님이, 개운사파에서는 광덕‧월주 스님이, 중도 성향에서는 녹원‧벽암 스님이, 원로그룹에서는 월산‧영암 스님 등이 후보로 거론됐다. 당시 69명의 중앙종회의원 가운데 조계사파가 28명, 개운사파가 27명, 중도파가 14명으로 분류됐다. 어느 쪽이 중도파를 흡수하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월주 스님
월주 스님

‘6대 중앙종회 회의록’에 따르면 이날 중앙종회가 진행한 총무원장 선거에서 개운사파의 지지를 받은 월주 스님이 38표를 얻어, 조계사파가 지지한 녹원 스님(28표)을 10표차로 누르고 제17대 총무원장에 선출됐다. 조계사파가 중도성향의 녹원 스님을 지지한 것은 중도파를 흡수하겠다는 의도였지만, 그들의 마음을 얻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이에 앞서 도견 스님과 월탄‧초우 스님이 각각 의장과 부의장에 선출되면서 중앙종회 의장단도 모두 개운사파가 차지했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경향신문(1980년 4월28일자)’은 “중도세력과 뒤늦게 손잡은 조계사 측의 미온적인 자세와 달리 그동안 밖에서 일치단결해 투쟁해온 개운사 측이 선거를 앞두고 치밀한 계획과 조직력으로 결속을 다진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조계사파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였다. 중앙종회 의장단에 이어 총무원장까지 개운사파에 돌아간 것은 종단운영의 주도권을 개운사파에 내준 것이었다. 조계사파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긴 분규 끝에 화합국면을 맞은 상황에서 ‘자리문제’로 다시 대립하는 것은 총무원장 월주 스님으로서도 큰 부담일 수 있었다. 이 때문인지 월주 스님의 당선소감은 화합과 배려에 중점을 뒀다. 스님은 “오늘 저를 지지하신 분이나 반대하신 분들이 이 시점에서는 모두 지지해 주신 것으로 믿겠다”며 “모두 총 단합해 비불교적인 것을 불교화 시키고,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종단행정 바탕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총무원 첫 집행부 인사도 안배에 역점을 뒀다. 총무원 5부장 가운데 사회부장과 규정부장에 조계사파인 정대‧법달 스님을 제청하면서 총무원장 선출과정에서 표출된 갈등을 최소화하려 했다. 

그러나 종단운영의 주도권을 빼앗겼다고 판단한 조계사파의 불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는 새 종정추대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표출됐다. 조계사파는 종회 의장단에 이어 총무원장마저 개운사파가 차지한 이상 종정스님만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스님으로 모셔야 한다는 입장이 강했다. 

‘6대 중앙종회회의록’에 따르면 중앙종회는 4월27일 원로스님을 포함한 가운데 종정추대를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공전만 거듭했다. 종정추대는 개정된 ‘종정추대조례’에 따라 원로의원과 중앙종회의원, 총무원장이 참석한 종정추대위원회에서 과반수 득표자를 종정으로 추대하는 방식이었다. 1차 투표에서는 조계사파가 미는 월산 스님이 28표, 개운사파가 지지하는 성철 스님이 27표, 월하 스님이 5표, 석주 스님이 2표, 고암 스님이 1표, 구산 스님이 1표를 획득했다. 양측이 지지한 월산‧성철 스님 모두 종정추대위원회 재적과반수(45표)를 얻지 못했다. 월산 스님과 성철 스님만을 대상으로 진행한 2차 투표에서도 월산 스님이 31표, 성철 스님이 29표를 얻어 이번에도 과반수 획득에 실패했다. 

그러자 조계사파가 중심이 된 종회의원들은 3차 투표에서도 과반수 득표가 나오지 않으면 다수득표자를 종정으로 추대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개운사파는 종법에 어긋난다며 반발해 평행선을 달렸다. 결국 중앙종회는 회기를 연장해 5월7일 종정추대안을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그러나 5월7일 회의에서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오히려 날선 공방만 지속되며 양측의 감정 골만 깊게 패였다. 심지어 일부 스님들은 월주 스님의 승적의혹을 제기하며 총무원장 자격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종회의원들 간의 인신공격성 발언들이 오가면서 혼란이 가중됐다. 정작 종정추대문제는 제대로 다뤄보지도 못한 채 휴회와 정회를 반복하다 무산됐다. 종정추대는 무기한 연기됐다. 

종정추대가 공전을 거듭하고, 일부 스님들이 중앙종회에서 제기한 월주 스님의 자격문제가 논란이 되면서 조계종은 다시 개운사‧조계사 분규가 재연되는 듯했다. 조계사 측 총무원장이었던 송원 스님이 신임 총무원장 월주 스님에게 업무인수인계를 거부하면서 개운사‧조계사파의 대치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다행이 전 종정 고암 스님이 조계사 측을 설득하면서 5월14일 인수인계가 진행될 수 있었다. 4월26일 17대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월주 스님이 조계사 총무원에 입성하기까지는 보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총무원장에 오른 월주 스님은 공언했던 대로 불교의 자주화와 불교관계법 개정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종단이 자율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불교재산관리법, 공원법 등의 개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게 스님의 소신이었다. 이런 행보를 계속한 월주 스님은 ‘12‧12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에겐 ‘눈엣가시’였다. 서슬 퍼런 권력 앞에 모두가 고개를 숙이는 상황에서 ‘자율’과 ‘자주’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신군부를 자극하는 것일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총무원장 취임 20여일 만에 ‘광주 5‧18민주화운동’이 발발하자 월주 스님은 진상조사와 위문방문을 추진했다. 월주 스님 회고록 ‘토끼뿔거북털(2016,조계종출판사)’에 따르면 조계종이 광주 방문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당시 종로경찰서장은 총무원으로 찾아와 월주 스님을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월주 스님은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며 “시민 쪽 희생자와 군인 등 모두를 위로하기 위해 가겠다”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월주 스님은 5월24일 ‘소요사태 진상조사선무단’을 현지로 급파한 데 이어 6월3일 교무부장 현광 스님 등과 함께 직접 광주를 찾았다. 당시 종교계 수장이 광주지역을 찾은 것은 월주 스님이 처음이었다. 광주 관음사에서 ‘광주사태 희생자 영가’를 위한 천도재를 봉행했고, 전남대병원과 군병원을 찾아 유족들을 위로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월주 스님의 이 같은 행보는 무모해 보일만큼 거침없었다. 그러나 이는 신군부의 ‘역린’을 건드린 것과 다름없었다. 법난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월주 스님의 ‘자주’ ‘자율’ 행보는 계속됐다. 9월15일 조계사 불교회관에서 ‘불교관계법 개정요구 결의대회’를 열어 정부 측에 법개정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신군부가 자신들의 권력침탈을 옹호하는 집회 요구에 대해서는 ‘정교분리’를 이유로 단호히 거부했다. 1980년 9월 신군부의 비호를 받았던 이철희‧장영자씨 부부가 ‘용두관음 불상’을 모시고 여의도 광장에서 신도 100만명이 참석하는 ‘호국기도회’를 열자는 마지막 제안도 뿌리쳤다. 신군부와 월주 스님과의 관계는 더 이상 회복될 수 없었다. 

그로부터 1달여 뒤인 1980년 10월27일 새벽, 신군부는 작전명 ‘45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군홧발로 전국 사찰을 난입해 스님과 일반인 등을 강제로 연행했다. 10‧27법난이었다. ‘언론통폐합’으로 신군부의 나팔수로 전락했던 언론들은 다음 날 신군부의 이 같은 만행을 “불교정화”로 미화했다. ‘조선일보(1980년 10월29일)’에 따르면 계엄사는 불교계 자체의 자율적 정화와 숙청이 있기를 기대해 왔지만 도저히 갱생의 힘이 없는 것으로 판단, 부득이 사회정화차원에서 조치를 취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달랐다. 물론 1950~60년대 불교정화에 이어 개운사‧조계사 분규 과정에서 대립과 갈등 등 적지 않은 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월주 총무원장 집행부가 출범하면서 안정을 되찾고 있던 시기였다. 1980년 10월17일 ‘조계종 자율정화추진방안’을 발표하며 자체 정화에 착수한 상태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10‧27법난은 ‘불교계에 본때를 보이겠다’는 신군부의 의도적 탄압이라는 시각이 많다. 

신군부의 칼날은 총무원장 월주 스님을 겨냥했다. ‘토끼뿔거북털’에 따르면 월주 스님은 10월27일 계엄군에 연행돼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23일간 조사를 받았다. 이들은 총무원장 사퇴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단호히 거부했지만 종단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월주 스님은 총무원장 사직서를 전달했다. ‘향후 2년간 모든 공직을 맡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서야 서빙고 분실을 나설 수 있었다. 

10‧27법난은 불교계에 큰 상처를 남겼다. 조계종 스님과 불교계 인사 153명이 연행돼 강제 조사와 고문을 받았고, 일부 스님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수많은 언론들이 쏟아낸 ‘불교비리’ 보도로 불교계 위상은 회복될 수 없을 만큼 실추됐다. 1980년 조계종에 찾아든 ‘서울의 봄’도 그렇게 저물어갔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93호 / 2019년 6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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