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하라의 이슬람 유적
5. 부하라의 이슬람 유적
  • 김현태 기자
  • 승인 2019.06.17 15:41
  • 호수 149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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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지혜가 낳은 빛의 도시는 대수학·현대의학의 고향 

기원 전 4세기 유적부터 차곡차곡
“빛이 땅에서 하늘로 비친다” 찬사

칭기즈칸도 허리 숙인 미나레트는
사막 건너는 대상의 길잡이 등대

신학대 입구 조로아스터교 문양엔
“우리는 모두 친구다” 문장 눈길
불교 등 4대 종교 공존탑도 세워
부하라의 랜드마크인 ‘칼란 미나레트’는 하루 다섯 번의 예배시간을 알리는 아잔의 공간인 동시에 밤에는 불을 지펴 사막의 등대로도 활용됐다. 칼란 미나레트 오른쪽이 ‘칼란 모스크’, 왼쪽이 ‘미르 아랍 마드라사’다.

‘다른 곳은 빛이 하늘에서 내리 비치지만, 부하라는 빛이 땅에서 하늘로 비친다.’

우즈베키스탄의 속담이다. 오랜 고대도시 부하라의 신비함과 매력을 뜻하는 말이다. 황톳빛 사막도시의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부하라의 지표 아래에는 수천 년의 역사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그 역사가 뿜어내는 찬란함이 하늘에 닿을 정도라니 부하라에 대한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사랑과 자부심이 담겨있는 속담이다. 실제 부하라는 도시 전체가 20m에 달하는 문화층을 가진 중층적 유적군을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 지역의 주인이 바뀌면 옛 것을 부수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반면, 부하라는 옛 도시 위에 새로운 역사를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그 모습을 바꿨다. 유적군의 가장 아랫부분은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의 고대문화층이, 상층은 7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중세문화층이 형성돼 있다. 

지금 보이는 부하라의 유적들은 지층 가까이 묻혀 있던 유적군을 발굴해 찾아낸 것들이다. 해서 도시의 건축물은 조성된 시기에 따라 기단의 높이를 달리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발 딛는 곳곳이 고대 유적이고, 현지인들의 일상은 그 위에 녹아있다.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이 부하라를 일컫는 별칭들 가운데 하나인 이유다.

중앙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이슬람 사원  ‘칼란 모스크’.

세계사에 기록된 위대한 인물들도 여러 명 배출됐다. ‘부하라 학맥의 삼총사’로 불리는 성훈(聖訓)학자 이맘 부하리(801~870), 의학자 아부알리 이븐 시노(980~1037), 수학자 알 쾨리즈미(780~850)가 대표적이다. 이슬람의 성훈이란 교조 무함마드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언행록이다. 이맘 부하리는 무함마드의 언행을 곁에서 지켜본 제자들과 그 제자, 또 그 제자를 통해 구두나 기록으로 전승돼 온 것들을 정리해 ‘성훈집록’을 펴냈다. 그는 16년간 1000여명의 전승자들을 만나 60만 조항의 성훈을 수집해 정리했으며, 그의 ‘성훈집록’은 이슬람이 공인한 첫 성훈 진본으로 후대에 제작된 모든 성훈집의 표준본이 되고 있다.

이슬람 학문 중 유럽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분야는 단연 의학이다. 특히 이븐 시노는 유럽 현대의학의 기반을 제공한 인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는 평생 242권의 의학서를 저술했는데 그 가운데 ‘의학전범’은 병리현상에 심리현상을 결합시켜 늑막염과 폐렴, 간염을 정확하게 구분해 냈고, 폐결핵, 전염병, 피부병, 성병, 상사병 등에 대한 구체적 치료법을 제시했다. 특히 알코올을 소독제로 추천한 최초의 의사이기도 하다.

수학자 알 쾨리즈미는 대수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인도의 숫자 서법을 아랍어 서법에 맞게 변형시켜 대중화했고, ‘0’을 수(數)의 개념이 아닌 상호관계적인 개념으로 전환해 대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켰다. 유럽인들은 아랍인들에게 전수받은 이 수의 체계를 ‘아라비아 숫자’라 불렀으며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전통적으로 써오던 로마 숫자를 아라비아 숫자로 대체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절차나 방법을 뜻하는 ‘알고리즘’이라는 말도 ‘알 쾨리즈미’의 이름에서 연유된 것이다.

아무튼 역사박물관 도시 부하라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유적은 이슬람 사원이다. 이슬람 사원은 기도의 장소인 ‘모스크’와 예배시간을 알리는 소리 아잔을 위한 첨탑 ‘미나레트’, 이슬람 성직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 ‘마드라사’로 구분된다. 부하라를 상징하는 이슬람 건축물은 바로 ‘칼란 미나레트’다. 칼란 미나레트는 ‘커다란(칼란)’이라는 말처럼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이슬람 첨탑(미나레트)이다.

칼란 모스크 회랑. 모스크 중심의 예배 소리가 건물 곳곳에 전달될 수 있도록 중정의 바깥쪽에 288개의 아치형 지붕으로 이뤄진 회랑을 조성했다.

땅속 10m 깊이에 뿌리를 박은 이 첨탑은 기단부 지름 9m, 높이는 47m에 이른다. 원통형의 탑신은 14층으로 나누어 여러 벽돌을 다르게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장식돼 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탑신 내부에는 105개의 나선형계단이 정상까지 이어진다. 꼭대기에는 16개의 아치형 등화창이 빙 둘러 조성돼 있다. 칼란 미나레트는 소리를 이용해 하루 다섯 번의 예배시간을 알리는 공간인 동시에 밤에는 불을 지펴 사막의 등대로도 활용됐다. 실크로드 대상들은 이 불빛을 보고 오아시스 도시 부하라를 찾을 수 있었다. 하루 30~40㎞씩 수개월을 걸어온 대상들이 그 고단한 여정의 한밤중에 칼란 미나레트 꼭대기에서 타오르는 등불을 본 순간 어떤 기분이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그러나 칼란 미나레트가 이곳의 랜드마크가 된 결정적 이유는 몽골의 침입으로 도시 전체가 붕괴된 뒤에도 굳건히 서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12세기 부하라를 점령한 칭기즈칸은 칼란 미나레트 바로 옆 칼란 모스크에서 승리의 축배를 들었다. 술기운이 오른 칭기즈칸은 말에 올라 칼란 미나레트 앞에 서 고개를 젖혀 탑머리를 응시했다. 그때 한줄기 바람이 불었고 쓰고 있던 투구가 땅에 떨어졌다. 말에서 내려 투구를 집어 들기 위해 허리를 숙인 칭기즈칸 머릿속으로 불현듯 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칭기즈칸이다. 여러 나라를 정복했고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나는 누구 앞에서도 투구를 벗지 않았고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첨탑은 나의 투구를 벗기고 머리를 숙이게 했다. 영험하고 비범한 이 탑을 그대로 두어야겠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이스마일 샤마니 영묘’.

그럴듯한 핑계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든 칭기즈칸도 손대지 않은 칼란 미나레트는 이후 발생한 몇 차례 대지진에서도 그 모습을 잃지 않았다. 18세기에는 공개 처형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꼭대기에서 자루에 넣어진 사형수를 던졌다. 하여 ‘죽음의 탑’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렇게 칼란 미나레트는 부하라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상징으로 지금까지도 추앙받고 있다.

칼란 미나레트 바로 옆 짧은 다리로 연결된 ‘칼란 모스크’는 중앙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이슬람 사원이다. 가로 178m, 세로 78m의 중정에는 1만2000명이 한꺼번에 모여 예배를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대비해 출입문도 7개나 두었다. 칭기즈칸에게 점령당하기 전에는 목조 사원이었고, 두 개의 푸른 돔을 가진 지금의 모습은 1541년 완성됐다. 모스크 중심의 예배 소리가 건물 곳곳에 전달될 수 있도록 중정의 바깥쪽에 288개의 아치형 지붕으로 이뤄진 회랑을 조성했다. 왼쪽 회랑에 위치한 우물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13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칼란 모스크 맞은편 사원은 ‘미르 아랍 마드라사’다. 청색과 백색의 타일로 장식된 이곳은 칭기즈칸에 이은 15세기의 정복자 아미르 티무르 시대에 지어진 신학대학이다. 시험으로 선발된 학생들이 7년간 아라비아어, 코란, 이슬람법 등을 공부한다. 내부는 1층 공부방과 2층 기숙사로 이뤄졌으며 지금도 수업이 이뤄져 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내 운영 중인 마드라사는 이곳을 포함해 9곳인데, 구소련 시절에는 중앙아시아를 통틀어 이곳뿐이어서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칭기즈칸 기병대의 말발굽에 짓밟히지 않은 유적이 하나 더 존재한다. 바로 ‘이스마일 샤마니 영묘’다. 조금은 어색하게 놀이공원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 있는 이스마일 샤마니 영묘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9~10세기 부하라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스마일 샤마니가 선친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건물인데 그와 그의 아들까지 묻혔으니 일종의 가족 묘당인 셈이다. 사방 9m 직육면체의 이 건물은 외벽 두께가 1.8m에 달하고 낙타 젖으로 반죽한 구운 벽돌만을 사용해 조성됐다. 칭기즈칸 침입 당시 땅속에 묻혀있어 화를 면할 수 있었는데, 1925년 소련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나지르 지반 베기 마드라사’에는 파격적으로 커다란 새 두 마리가 사람 얼굴 모양의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 새겨져있다.

벽돌을 엇갈려쌓아 만든 기하학적인 무늬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4개의 격자무늬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만으로 내부의 색조가 황금빛 또는 갈색으로 변한다. 이러한 독창적인 미의식에 반한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어려움에 처한 소련에 대가를 치르고 이 영묘를 미국으로 옮겨가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이스마일 샤마니 영묘는 본래 자리에 발굴 당시의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현지인들 사이에는 숨을 참고 건물을 두 바퀴 돈 후 소원을 빌면 원하는 바가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부하라에는 다양한 설화와 역사를 지닌 이슬람 유적이 수없이 존재한다. 하지만 유독 눈길을 끈 것은 ‘나지르 지반 베기 마드라사’였다. 부하라 대표 명소 라비하우즈를 만든 나지르 지반 베기가 1622년 건립한 이 마드라사가 주목받는 이유는 건물 정면의 모자이크 타일 그림 때문이다. 타일 그림에는 커다란 새 두 마리가 사람 얼굴 모양의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우상숭배를 금한다며 사람 또는 동물의 모습을 새기거나 조성하는 것조차 엄격히 금지하는 것은 물론 파괴도 서슴지 않는 이슬람에서, 그것도 성직자를 양성하는 신학교 정문에 이 같은 그림을 새겨 넣은 것 자체가 그야말로 파격이고 반전이다. 그림 속 새는 조로아스터교의 길조 ‘후모’, 가운데 태양은 주신인 ‘아후라 마즈다’이다. 이곳의 파격과 반전은 나지르 지반 베기가 마드라사 정문 양쪽에 남겨놓은 문구를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친구다. 널리 교류하자.’

부하라는 중앙아시아 불교의 중심지였고, 한때는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였으며, 대규모의 유대인이 정착했던 곳이었다. 동서 문명이 교류한 오아시스 도시는 다양한 민족이 부대끼며 함께 살던 기회의 땅이었다. 새로 그 땅의 주인이 된 무슬림들은 부하라의 번영을 위해 기존의 종교와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상생하고자 했다. 19세기에는 이슬람 이전 부하라의 종교였던 불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와 이슬람의 평화로운 공존의 의미를 담아 네 개의 미나레트로 구성된 ‘초르 미노르’를 세웠다. 번영은 평화와 공존에서 비롯되며 이는 상대를 존중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됨을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지혜가 있었기에 부하라는 하늘에 닿을 듯 찬란히 빛나는 역사를 써올 수 있었다. ‘빛이 땅에서 하늘로 비친다’는 후대인들의 속담은 흙 속에 묻힌 유적이 아닌 그 위에 서린 눈부신 지혜에 바쳐진 찬사다. 아직도 공존과 존중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의 폭력과 파괴가 난무한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과연 그들보다 지혜롭고 그때보다 발전했을까. 테르메즈에서 보았던 상처 입은 불상들이 떠오르며 안타까움을 더한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493호 / 2019년 6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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