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달라이라마의 전법 ⑤
117. 달라이라마의 전법 ⑤
  • 김정빈
  • 승인 2019.06.18 10:13
  • 호수 149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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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들, 티베트 탄트라 요가수행에 주목하다

미국 허버트 벤슨 박사, 1979년
탄트라요가의 실질적 효과 연구 
생리학적 이완반응 네이처 발표
극한의 추위에도 체온 변함없어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1979년, ‘이완반응’을 분석하고 있던 미국 학자 허버트 벤슨이 달라이라마에게 자신의 연구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달라이라마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티베트 명상인들에 대한 생리학적 조사가 시행된 뒤 ‘네이처’를 비롯한 학술지에 발표되었다.

벤슨 박사는 정교한 장비를 갖고 티베트 승려들이 탄트라 요가를 수련하는 상태를 측정했는데, 그 결과는 놀라웠다. 실험 대상자인 승려가 깊은 명상상태에 들어갔을 때, 직장온도계로 측정한 내부 온도와 피부온도계로 측정한 외부 온도가 섭씨 10도가량 상승하였고, 따라서 그들은 온도가 영하로 내려간 상태에서도 눈 덮인 곳에 장시간 앉아 있을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그때 명상인들의 몸에 젖은 종이를 두었더니 종이가 말랐으며, 외부 온도와 상관없이 그들의 체온은 추운 밤을 지새우는 동안에도 전혀 내려가지 않았다.

벤슨 박사 이외에도 많은 과학자들이 명상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탐구를 계속했고, 이로써 명상이 심리적으로 효과를 일으킬 뿐 아니라 뇌를 비롯한 신경계 및 신체계까지도 변화시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서구의 과학자들 내지 기독교를 비롯한 타종교인들 중에는 불교명상이 플라시보 효과이거나 최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었다.

이 실험 결과가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인간 이해에 대한 중대한 문제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질과 비물질(마음, 정신)로 된 존재이며, 불교는 전자를 색(色), 후자를 명(名)이라고 하고, 명을 상(想), 행(行), 식(識)으로 분별하기도 하며, 더 복잡하게 분별하기도 한다. 

문제는 색과 명 중 어느 편이 ‘먼저’이고 ‘기초’인가이다. 불교는 명이 먼저이고 기초라고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연과학자들은 그 반대 입장에서 물질(색)이 먼저이자 기초이고, 명은 그것의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 주장이 일단은 이해가 되는 것이, 마음은 뇌의 신경세포에서 일어나는 화학물질의 분비작용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뇌의 신경세포는 ‘어머니’이고, 마음은 ‘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어렸을 때는 어머니의 보호를 받고,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존재이지만, 성년이 되면 어머니로부터 독립하여 자기의 의지, 의사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가 된다.

마치 그와도 같이, 물질인 신경세포의 결과물인 아들-마음은 명상수행을 통해 어른이 되고, 그때 아들-마음은 어머니-신경세포를 변화시킨다. 이는 아들이 잘 커서 훌륭하게 된 다음 어머니를 감동, 감화시키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아들-마음이 어머니-물질(몸)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 인간은 운명적인 존재인가, 자율적인 존재인가. 지금 필자가 ‘운명’이라 부른 것을 어떤 종교는 ‘신’이라 부르고, 자연과학은 ‘법칙(원리, 정리)’이라 부르며, 어떤 철학은 우연, 다른 어떤 철학은 ‘명(命)이라고 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운(運)’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운명성과 자율성에 대해 불교는 인(因)과 연(緣)을 말한다. ‘나’라고 불리는 존재가 주인(主因)이 되고, 나를 둘러싼 환경이 보조인(補助因)이 되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때 주인으로서의 입장에서 볼 때 나는 자율적인 존재이고, 연으로서의 환경에 영향받는 면에서 나는 타율적인 존재, 즉 운명적인 존재(신의 피조물)이다.

나는 안계(眼界) 내지 의식계(意識界)라는 여섯 가지 환경 속에서 살며, 환경은 나를 제한한다. 환경은 나를 여자가 아닌 남자로,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19세기가 아닌 21세기에 살도록 제한하였다. 그러나 또한 나는 자율적인 존재로서 나만의 생각을 하고, 나만의 행동을 한다. 이렇게 나는 한편으로는 타율적인 존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율적인 존재이다.

자연과학은 그중 후자를 부정한다. 인간의 자율성은 뇌에서 나오는데 뇌는 물질인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세포들에서 발생되는 화학적인 물질들이 곧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의 자율성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물질적인 법칙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간 이해는 인간을 하나의 기계로 보는 것이지만 우리의 직관은 그 이해를 거부한다. 자연과학자들은 그 거부를, 자신의 ‘욕망’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보려는 심리로 치부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요구는 저급한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심오한 ‘직관’에서 나온다. 

직관은 감각과 함께 일어나는 가장 원초적인 인식이며, 따라서 그때 욕망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 직관으로써 나는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의자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안다. 이는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는 자명(自明, 스스로 명백한)한 진실이다.

세계가 거대한 기계라면 세계에는,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물질적인 연속만이 있을 뿐인 물리세계에는 그 어떤 의미도 없지만, 우리의 마음에는 의미를 추구하는 힘이 있으며, 그 추구는 물질-어머니로부터 태어났지만 마침내 성년에 이른, 마음-아들에게만 있는 고귀한 무엇이다.

그리고, 아들에게 그것이 있다면 어머니에게 그것이 선재(先在)해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물질로 구성된 세계 속에는 비물질적인 생명체를 낳는 가능성이 선재해 있었으며, 생명체는, 그리고 인간은 그 선재한 가능성의 구체화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물질과 마음은 하나로 버무려진다. 흰 소와 검은 소가 하나의 줄에 매여 있을 때 흰 소가 검은 소에 매여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검 은소가 흰 소에 매여 있다고 말할 수도 있듯이, 인간은 물질에 매여 있다고도 할 수 있고, 마음에 매여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사람은 분명 물질 면에서는 하나의 기계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물질적인 기계 이상의 그 무언가가 있다. 불교가 명(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가치의 극치로서의 열반에 이를 때 삶은 물질을 초극하는 차원에 이른다는 것을 느끼고 알게 하는 심오한 인식 내지 감각이 있다.

유물론적인 세계관에는 삶의 의미도, 가치도, 사랑도, 우정도, 예술도, 꿈도 설 땅이 없다. 달라이라마의 삶으로부터 우리는 삶의 의미, 가치, 사랑, 우정, 예술, 꿈을 일으켜 세우는 심오하고도 중대한 불교의 역할을 넌지시 헤아려본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93호 / 2019년 6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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