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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㉕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④

선덕여왕에게 올린 ‘성조황고(聖祖皇姑)’ 칭호, 성골이라는 독존적 선민의식 의미

진평왕이 왕위를 계승한 이후
경쟁자 용수에게 둘째 딸 출가

중첩된 혼인 관계 등을 통해서
54년 동안 안정적인 왕권 유지

아들이 없이 딸만 있는 관계로
말년에 왕권을 둘러싸고 반란

딸들이 계속 왕위 계승하면서
여왕에 대한 불만 계속 이어져

​​​​​​​선덕왕 말년에 비담‧염종 반란
비담은 아비달마 준말로 불자
유교 편중 김춘추에 대한 반발

선덕여왕릉. 사적 제182호.
선덕여왕릉. 사적 제182호.

26대 진평왕(579~632)은 54년의 재위기간 중앙의 통치제도를 정비하고, 수·당과의 적극적 교류를 통해 고구려·백제의 침입을 방어하며 정치적 안정을 유지했다. 진평왕의 왕권 안정은 내적으로 6부체제에서 양대세력이었던 탁부와 사탁부의 제휴에 성공함으로써 가능했다. 우선 진평왕이 유력한 왕위계승자였던 25대 진지왕(576~579)의 아들 용수(춘)를 제치고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모후인 만호부인(萬呼夫人)이 사탁부의 수장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진평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자신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을 용수와 결혼시킴으로써 경쟁자와 제휴를 모색하였다.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두 딸이 있었는데, 만일 아들이 있었다면 인도의 석가족과 같이 싯다르다(悉達多, Śiddhārtha)로 이름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큰 딸은 뒤에 선덕여왕으로 즉위하였고, 작은 딸은 바로 용수의 부인이 된 천명부인이었다. (‘삼국유사’ 무왕조에서는 백제 무왕의 부인이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였다고 하였으나, 허구적인 설화상의 인물이었을 뿐이다.) 진평왕 44년(622) 탁부(양부)의 궁전인 양궁과 사탁부(사량부)의 궁전인 사량궁을 국왕의 궁전인 대궁에 통합시켜 그 관리자로 사신(私臣) 1인을 두고 용수를 임명함으로써 왕위 경쟁자와의 제휴와 협력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동륜태자가 입종갈문왕의 딸인 만호부인과 결혼하여 진평왕을 낳고, 진평왕은 둘째 딸인 천명부인과 용수를 결혼시키는 중첩된 인척관계를 통하여 진평왕은 54년이라는 긴 세월 왕권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평왕은 왕위를 이을 계승자로서 아들이 없고 딸만 2인이 있었다. 왕권이 강화되고 안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절대적인 지위까지는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아들이 없었다는 것은 진평왕 말년에 다시 정치적인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기 8개월 앞선 53년(631) 5월에 일어난 이찬 칠숙(柒宿)의 반란모의는 바로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불안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모의가 사전에 발각돼 칠숙은 동시(東市)에서 목을 베이고 9족(九族)이 멸망당하였으며, 모의에 가담하였던 아찬 석품(石品)도 백제 국경까지 도망하였다가 잡혀 처형되었다. 주모자인 칠숙의 정체와 반란 이유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 없으나, 이찬이라는 제2등의 관등을 소지했던 것으로 보아 진골귀족에 속하였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9족을 처형하였다는 것을 보아 개인적인 차원의 반란이 아니고 김씨왕족 가운데 한 가계(家系)의 친족 일원이 진평왕의 직계가족에 도전하였던 사건으로 보며, 아들이 없던 진평왕 사망 직전의 사건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왕위의 계승경쟁과 관련됐을 것이다. 뒷날 선덕여왕 말년의 비담(毗曇), 진덕여왕 말년의 알천(閼川)과 같은 성격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평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27대 선덕여왕(632~647)은 백정(白淨)이라는 이름을 가진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 사이에서 출생한 맏딸인데, ‘삼국사기’ 선덕왕조에서, “진평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國人)이 덕만(德曼)을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 성스러운 조상과 큰 할머니)의 칭호를 올렸다”고 기록한 것을 보아 김씨왕족 가운데서 진평왕의 직계가족이 특히 성골(聖骨)이라는 독존적인 왕족으로서의 선민의식을 내세우려고 시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선덕여왕은 즉위한 직후 먼저 종실의 대신 을제(乙祭)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는 것을 보아 김씨왕족의 원로가 섭정을 담당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년 뒤인 즉위 2년(633) 정월에는 관례에 따라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의 사면과 주군의 1년 조세를 면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어 3년(634)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고 분황사(芬皇寺)라는 이름의 사찰을 창건하였고, 이어 다음 해(635)에는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아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이라는 부왕의 봉작(封爵)을 계승함으로써 국제적인 승인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분황사에 이은 영묘사(靈廟寺)를 창건하여 이른바 전불시대의 가람터에 세운 7곳 사찰 가운데 2곳을 추가하였으며, 다음 해(636)에는 황룡사에 백고좌회를 개설하여 ‘인왕경’을 강설하고 100인을 출가케 하여 선덕여왕의 쾌유를 빌고, 불교를 통한 왕권의 신성성을 강화하였다. 한편 4년(635) 10월에는 이찬 수품(水品)과 용수를 파견하여 주군(州郡)을 돌며 위문케 하였는데, 특히 수품은 다음 해(636) 정월에 귀족을 대표하는 상대등이 되어 동왕 14년(645) 11월까지 그 직위에 있었다. 이로써 선덕여왕의 친정체제에 들어가면서 정치의 실권은 용수와 함께 수품이 장악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덕여왕의 즉위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에 대비하는 군사력의 중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대장군 알천(閼川)도 정치적 위상이 높아져 권력의 한축을 담당하는 실세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선덕여왕 10년(641) 백제의 의자왕이 즉위하고, 11년(642)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보장왕을 옹립하면서 대외관계가 급변하여 신라는 절박한 위기상황을 맞게 되었다. 그때까지 고구려와 백제의 간헐적인 침공이 별개로 이루어졌으나, 이제는 두 나라가 연합전선을 구축해 당항성(黨項城, 경기도 남양)을 공취하여 당나라로 통하는 길을 차단하는 한편 백제는 신라의 서쪽 국경지역의 요충인 대야성(大耶城, 합천)을 함락하여 낙동강 전선을 위협하게 되었다. 신라는 이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용수의 아들 김춘추의 대당외교활동과 본가야(금관가야) 왕실 계통 서현의 아들 김유신의 군사활동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중첩된 혼인관계, 즉 김유신의 누이 문명부인이 김춘추와 결혼하고, 김춘추의 딸 지소부인이 김유신과 결혼함으로써 굳건한 연합세력을 구축하여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선덕여왕 재위 중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계속되는 침공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심각한 정치혼란은 신라 내부 왕실세력의 분열에서 발생하였다.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어 선덕여왕이 여성으로서 신라 최초의 국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삼국사기’ 선덕왕조에서, “왕이 죽고 아들이 없어 나라 사람들(國人)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의 칭호를 올렸다”고 기록한 것을 보아 김씨왕족의 합의에 의해 즉위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진평왕의 사촌형제로 경쟁관계에 있던 용수(춘)의 협력을 받은 것이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용수가 진평왕의 둘째 딸과 결혼함으로써 진평왕의 사위이면서 선덕여왕의 제부가 된 것이 유력한 증거이다. 그러나 여왕의 즉위에 대해서 김씨왕족을 비롯한 귀족들 가운데서는 불만을 가진 인물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는 여왕에 대한 불만과 비판의식이 만만치 않는 분위기였음을 여러 곳에서 전해주고 있다. 먼저 ‘삼국유사’ 황룡사9층탑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자장이 중국 태화지(太和池) 가에서 만난 신인(神人)이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았기 때문에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가 침략을 도모하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본국에 돌아가서 구층탑을 세우고 팔관회를 개최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황룡사9층탑조에서 안홍(安弘)의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인용하여 “신라 제27대에 여왕이 임금이 되니 비록 도리는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9한이 침범하게 되었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의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같은 사실을 반복하여 전해주고 있다. 물론 설화적인 내용이어서 사실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여왕에 대한 불만, 여왕의 존재가 외적 침입의 한 원인으로 인식되던 당시의 분위기를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내용이다. 나아가 선덕왕14년(645) 자장의 건의로 황룡사에 9층탑을 건립한 동기를 설명하는 자료로서도 충분한 내용이다. 여왕에 대한 불만은 국내만이 아니고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다. 선덕왕 12년(643) 자장이 귀국하던 해에 당태종은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호소하고 구원을 요청하는 신라 사신에게 “그대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게 되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둑을 불러들이게 되어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이 반드시 여왕 때문이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당시인들의 불만의식을 반영한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일부 귀족들의 여왕에 대한 불만은 마침내 여왕의 임종에 임박하여 반란으로 폭발하였다. 선덕여왕16년(647) 정월초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이 “여자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며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위시키려고 하였다. 비담은 2개월 앞선 15년(646) 11월에 상대등에 올랐던 것으로 보아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염종은 이 반란 기록 이외에 일체 전하는 자료가 없어 그 정체를 알 수 없으나 고위 귀족이었을 것이다. 반란군의 진압과정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김유신전에서 자세하게 전해주는데, 비담 등의 반란군은 명활성(明活城)에 주둔하고 왕의 군대는 월성(月城)에 주둔하여 양측의 공격과 방어가 10일이 지나도 결말이 나지 않을 정도의 대규모의 반란사건이었고, 선덕여왕은 반란 중인 정월 8일에 사망하여 전투 중의 피살인가, 자연사망인가의 논란을 야기하였다. 정월 17일에 반란은 진압되어 반란자의 9족을 멸하였는데, 연좌되어 죽임을 당한 자가 30인이었다고 한다. 반란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왕세력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로 보는 견해와 혈족집단 사이의 대립으로 보는 견해로 나뉘어져 있는데, 왕위계승경쟁의 산물로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춘추와 김유신의 연합세력에 대한 다른 귀족세력의 반격이었던 것으로 본다. 비담이라는 말은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의 준말로서 3장 가운데 논장(論藏)의 총칭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불교신자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유교 편중의 정책을 추진하던 실권자 김춘추세력에 대한 불교측의 반발이 왕위계승경쟁과 맞물려 폭발한 것으로 본다. 공교롭게도 이 시점에서 마침 자장이 지방으로 밀려나서 불우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93호 / 2019년 6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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