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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유숙의 ‘오수삼매(午睡三昧)’

기자명 김영욱

일체 집착 끊으면 모든 차별 사라진다

고주박잠 빠져든 스님의 모습
거침없고 대담한 필획 인상적
모든 것 사라진 적막한 경지
적정은 부처님께서 말한 삼매

유숙 作 ‘오수삼매’, 40.4×28.0㎝, 종이에 먹, 19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유숙 作 ‘오수삼매’, 40.4×28.0㎝, 종이에 먹, 19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古木千章五月涼(고목천장오월량)
小樓八尺一爐香(소루팔척일로향)
讀殘數紙還抛却(독산수지환포각)
瞌睡居然是坐忘(갑수거연시좌망)

‘일천 고목은 오월에도 서늘 여덟 자 작은 누각에는 하나의 향로. 읽다 남은 몇 장 다시 던져버리니 앉아서 잠든 이것이 좌망이로구나.’ 이숭인(李崇仁, 1349~1392)의 ‘현성사에서 글을 읽다가(玄聖寺讀書)’.

화가 유숙(劉淑, 1827~1873)이 발을 멈췄다. 작은 종이 한 장과 붓 한 자루, 그리고 담아놓은 먹물을 꺼냈다. 그저 적은 양의 먹만 있으면 충분했다. 다시 앞을 바라봤다. 한 스님이 등을 구부리고 앉아서 고주박잠에 빠져있다. 힘든 여정에 지친 것인지, 고단한 절집 수행 중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을 잊은 듯 잠에 빠진 승려는 깨어날 줄 몰랐다. 반복되는 들숨과 날숨의 미세한 박자에 따라 납의(衲衣)가 미묘하게 흔들거리기만 했다.

진한 먹물을 듬뿍 묻혔다. 이내 붓에 스며든 진한 먹은 승려의 몸을 작은 종이 안으로 온전히 옮겨놓았다. 붓을 물에 적신 뒤 붓을 이리 눕히고 저리 눕혀 흔들거리는 납의의 주름을 이어나갔다. 결이 매끄럽지 않고 윤기 없는 거친 필선은 지친 승려의 몸을 그려내기에 좋았다. 쉼 없이 이어지는 필획은 거침없이 대담했다. 잠시 숨을 고른다. 아주 작은 붓을 꺼낸 유숙은 승려의 까칠까칠한 머리와 뜰 기색 없는 눈매, 그리고 가사를 비집고 나와 무릎 위에 얹은 손을 그려냈다. 거칠고 대담한 필선으로 그려진 유숙의 그림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장자’ 내편의 대종사를 보면 공자(孔子)와 제자 안회(顔回)의 짧은 일화가 실려 있다. 둘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망(忘)’, 즉 잊는다는 것이었다. 하루는 안회가 인(仁)과 의(義)를 잊게 되었다고 하자, 공자가 아직 부족하다고 답했다. 며칠 뒤 안회는 이제 예(禮)와 악(樂)을 잊게 되었다고 말했다. 공자는 아직 부족하다고 말했다. 훗날, 다시 공자를 찾은 안회가 말했다. “제가 ‘좌망(坐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놀란 공자가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안회가 답했다. “모든 차별을 잊어버리고 큰 도에 동화되는 것이 바로 좌망입니다.” 그의 대답에 공자가 탄복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와 하나가 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차별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변화에 그대로 따르면 일정한 것만을 추구하는 마음도 사라진다.” 곧 좌망이란 모든 물아(物我)를 다 잊고 도와 하나가 된 경지를 말한다. 이는 불가에서 말하는 삼매(三昧)의 의미와 같다.

어떠한 욕망에도 따르지 않고 일체의 집착을 끊어내면 모든 물아의 차별이 사라진다. 차별이 사라지니 마음의 번뇌도 사라진다. 번뇌가 소멸하면 편한 잠이 따른다. 모든 것이 사라진 고요하고 적막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이 적정(寂靜)의 경지, 삼매(三昧)라고 부처는 말했다.

고주박잠을 청하는 승려는 깨어날 줄 모른다. 오직 납의만이 그의 숨결에 따라 아주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그는 좌망하고 삼매의 잠에 빠진 것이다. 그를 깨워서 무엇하겠는가. 붓을 멈춘 유숙은 조용히 제자리를 떠난다.

김영욱 한국전통문화대 강사 zodiacknight@hanmail.net

 

[1494호 / 2019년 6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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