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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청허휴정 진영(淸虛休精 眞影)

기자명 손태호

임진왜란 절체절명 위기 속 민초 구한 영웅

한반도 전래 후 민중 함께한 불교
수많은 스님 나라·백성 위해 헌신
승병 이끈 청허 휴정 스님 대표적

통도사 등에 진영 10여점 전해져
승장보다는 덕 높은 고승 이미지

작자미상 ‘청허당 휴정 진영’, 81.5×124.3cm, 비단채색, 통도사성보박물관.
작자미상 ‘청허당 휴정 진영’, 81.5×124.3cm, 비단채색, 통도사성보박물관.

얼마 전 속리산 법주사를 방문했을 때 일입니다. 절 마당에 우뚝 서 있는 금동미륵대불의 안내문을 읽던 어떤 방문객이 “어머, 통일을 위해 건립했다네”라는 놀란 혼잣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사찰에서 나라를 위해 이렇게 커다란 불상을 세웠다는 것이 신기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한반도에 불교가 전해진 4세기 삼국시대부터 대한민국의 현재까지 언제나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함께 한 호국불교의 전통을 잘 알지 못했나 봅니다. 

주변을 살펴봐도 우리 불교가 얼마나 이 땅의 민중들의 아픔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었는지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랑스러운 호국불교의 전통에 대해 좀 더 많은 홍보와 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호국불교의 상징과 같은 스님들이 여러분 계시지만 그중에서도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승병을 조직하고 이끈 청허당 휴정 스님은 꺼져가는 나라와 민초를 구한 위대한 스님입니다. 당시 스님의 모습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후대에 그려진 진영(眞影)으로 그 풍모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고승 진영은 덕 높은 스님의 초상화입니다. 초상화는 대상 인물의 추모와 존경의 마음으로 그려지는 기록화로 겉모습뿐 아니라 내면의 정신세계까지 담아야 하는 수준 높은 작품입니다. 그러나 고승 진영은 조사에 대한 예배의 의미까지 더해진 불화로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청허당 휴정 스님(1520~1604)은 서산인 묘향산에 오래 머물러 서산대사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평안도 안주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스님은 9살에 어머니, 10살에 아버지를 여의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열두살 되던 해 안주 목사 이사증이 그의 시 짓는 탁월한 능력을 아껴 양자로 받아들여 당시 최고 명문 관학인 성균관에 보내 본격적인 유학공부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렇지만 스님은 지리산 고승과의 인연으로 출가하여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을 스승으로 모시고 10여년 동안 공부했고, 영관 스님의 법을 이어받아 금강산과 묘향산에서 수행했습니다. 승과에 합격한 후 36세 때 선교양종판사가 되었으나 이런 직책은 참다운 승려의 길이 아니라 생각하여 2년 후에 모든 직책을 버립니다. 묘향산으로 들어간 스님은 수행에 전념했고 제자가 1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평안도 의주로 피난한 선조는 휴정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에 임명하니 휴정은 묘향산에서 나와 전국 승려들에게 총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보내 승군(僧軍)을 모집합니다. 그때 스님의 세수는 73세였습니다. 

휴정 스님의 격문에 호응한 승려들과 제자 유정이 이끌고 온 승군을 합쳐 2500명의 승군을 조직해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전투에 크게 공을 세웁니다. 2년 후 승군의 지휘를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맡기고 묘향산으로 돌아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85세가 되는 1604년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자신의 영정 뒤에 “80년 전에는 그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그이구나”라는 찬을 남기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습니다. 

그 후 조선의 불교는 모두 서산대사의 제자와 법손들이 이끌어갔으며 전쟁의 공로로 불교계가 다시금 숨통이 트이며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어록에 ‘살생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것과 같다’고 남길 만큼 불살생을 강조했던 휴정 스님이 전쟁에 참여할 승군을 조직하는데 왜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나라와 백성의 고통을 줄이고 더 큰 살생의 과보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승군을 조직하였을 것입니다. 

청허당 휴정 진영은 지금까지 10점 정도 남아있는데 그 중 위 그림은 찬문이 적혀있어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먼저 향우측 상단에 직사각형의 제목란을 마련하여 ‘사선호등계자가사부종수교청허당대선사지진(賜禪號登階紫袈裟扶宗樹敎淸虛堂大禪師之真)’이라 쓰여 휴정 스님의 진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돗자리를 배경으로 2단 구도에 몸은 왼쪽을 보이고 있으나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보통 의자에 앉은 좌안의 초상화는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후반까지 자주 사용된 구도입니다. 흰색의 소삼(小衫)과 옅은 푸른색의 장삼, 붉은색 가사(袈裟)를 입었는데 가사에는 금박 장식이 있습니다. 얼굴은 온화하면서도 진중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전체적으로 용맹스러운 승장의 이미지보다는 법력 높은 고승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좌측 상단에는 영조 때 문신인 조명겸(趙明謙, 1687~?)의 영찬이 적혀있습니다. 

‘松雲於師 留侯黃石 顯績陰敎 一體千億想像 一燈長明之下 講授徒弟 無乃是君臣大義  不然  宗國危亂之秋 紛釋難 何能使成就如彼(사명 송운의 스승으로 장량과 황석공의 관계이다. 드러난 업적과 숨은 가르침은 일체의 모든 기억을 생각하게 한다. 한 등불의 밝음 아래 강의를 받은 제자가 군신의 대의만 못하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나라 위기가 가을낙엽 같을 때 어지러운 것을 풀고 어려운 것을 이해하게 함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조명겸이 휴정 스님을 위해 찬문을 지은 시기는 그가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지냈던 1739년경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 경주와 인접한 밀양 표충사에는 사명대사 추모 불사가 한창이었으며, 이 중 가장 중요한 활동이 바로 당대 명사들로부터 스님의 업적을 기리는 시문을 받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영찬도 그 시기이고 진영도 그 시기일 것이라 추측되고 있습니다. 불교가 가장 홀대받던 조선시대에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노력한 스님들에 대해 이렇게 존경과 예를 표했던 것입니다.   

6월입니다. 6월은 누가 뭐라 해도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위치상 늘 외세의 시달림 속에 전쟁과 침략이 끝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난의 시기에 언제나 영웅들이 나타나 고난에 찬 민중들에 희망이 되었고 수많은 백성을 구했으며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므로 6월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많은 영웅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활동과 고난을 기억해야 합니다. 휴정 스님의 진영을 보면서 위대한 스님의 가르침을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정진이 석가모니요, 곧은 마음이 아미타불이다. 밝은 마음이 문수보살이요, 원만한 실천행이 바로 보현보살이다. 자비로운 마음이 관세음보살이요,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주는 희사(喜捨)가 대세지보살이다. 성내는 마음이 지옥이요, 탐욕스런 마음이 바로 아귀니라.” ‘청허당집’ 中

손태호 동양미술작가, 인더스투어 대표 thson68@hanmail.net

 

[1494호 / 2019년 6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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