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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장선우의 ‘화엄경’

종교의 중생구제 실천, 영화적으로 구현한 수작

고은 소설 ‘화엄경’ 모태로 제작
소설·영화 극명한 차이 드러내
원작 재해석 넘어 지향점 제시 
종교를 통한 구원 가능성 모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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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찾아 떠난 선재가 주인공
자막으로 행적 의미 부여했지만
직관적 사유 방해한다는 평가도
게송의 다른 표현으로 봐도 무방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실천적 노력을 종교가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유가 담긴 영화다. 사진은 영화 ‘화엄경’의 스틸컷. 

고은의 ‘화엄경’은 장선우의 ‘화엄경’으로 옮겨지면서 영화와 소설의 거리가 어느정도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승려 생활을 토대로 집필된 ‘화엄경’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실천적 노력을 종교가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영화적 관심을 지닌 장선우의 ‘화엄경’과 회수를 건너온 귤보다 더 큰 차이를 보인다. 장선우의 ‘화엄경’은 선재의 어머니 찾기라는 맥거핀을 표층에 드러내지만 이면의 심층에는 원작에 대한 재해석과 한국사회의 나아갈 방향 찾기, 종교를 통한 구원 가능성 모색 등이 층층이 쌓여있다. 영화평론가 유현미는 “‘화엄경’은 한국현실에서 출발한 알레고리이며 세상을 바꾼다는 소유의 관념이 세상이 된다는 존재의 관념으로 옮겨지는 시대정신을 담아냈다”고 적확하게 간파했다. 

‘화엄경’은 자막을 통해 선재의 행적에 의미를 부여하며 서사적으로 에피소드 구성을 만들어낸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진리의 큰 바다는 믿음으로 들어가고 지혜로서 건넌다”는 안상수체 자막이 제시된다. 이 자막은 선재의 어머니 찾기에 ‘화엄경’의 불교적 교리를 담아내게 되어 종교영화의 색채를 강하게 풍긴다. 하지만 유현미 평론가가 표한 아쉬움처럼 ‘활자의 개입은 사유에 대한 작가의 직접적 간섭이 텍스트의 의미체를 어느 순간 직관의 통일안으로 총괄하는 것을 방해하는 역기능’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자막은 에피소드에 교리적 의미를 환기시키지만 영화 이미지와 서사가 빚어내는 종교적이면서 예술적 세계를 제한하고 ‘화엄경’에서 보여주고 싶은 ‘있다 그러나 없다’와 ‘모든 것은 낮아서 바다가 되고 사람도 조개도 우주만큼 크다’는 대상과 정신, 관념론과 유물론의 경계 지우기를 통한 큰 하나 됨을 보여주는데 울타리 같은 제약을 마련하게 된다. 

선재는 이련에게 어머니를 찾아 나선다고 말하고 길을 떠난다. 서울에서 선재는 법운 스님을 만나서 욕쟁이 의사인 해운을 찾아가라는 말과 함께 피리를 선물로 받는다. 법운은 ‘만다라’의 법운과 이름이 같으며 그가 떠난 곳에 연꽃을 든 어머니의 환영이 지나간다. 해운은 선재에게 바다에 대한 설법을 한다. ‘모든 것은 낮아서 바다가 되고 하늘은 거기에 내려와 있다’는 자막의 의미를 전해준다. 사람은 바다만큼 크고 우주만큼 넓으며 바다는 평등하다. 사람도 조개껍질도 우주만큼 크고 바다만큼 크다. 평등한 바다는 아래도 위도 없다. 어리석은 자는 있고 없고와  많고 적음을 다투지만 바다는 모두 평등하게 바라보는 평등이자 화엄의 세계임을 암시한다. 
 

선재는 해운이 소개한 40년 장기수를 만나러 길을 나선다. 길을 걷다가 들에서 소를 훔쳐서 등을 탄다. 선재는 소를 타고 강을 건너고 안개 속을 헤쳐가면서 피리를 불며 환영 속으로 들어간다. 선재는 환영 속에서 여인을 만나고 그녀와 산을 걷다가 환영 속의 여인이 낙상을 하는 장면에서 꿈을 깨 소도둑으로 잡힌다. 선재는 감옥에서 혜강에게 평등에 대해 묻고 혜강은 ‘골고루 잘사는 것’이 평등이 아니며 ‘진정한 평등은 모든 존재는 실체도 없고 생긴 적도 없다는 것’으로 불교적 평등의 지혜를 전한다. 이어서 그는 몸과 마음은 물위에 비치는 그림과 같다고 전한다. 혜강은 선재에게 ‘허무만큼 큰 공간이 없다’는 자막의 의미를 다시 일깨워준다. 

선재는 법운을 다시 만나고 법운은 이련과 함께 길을 떠날 것을 권한다. 자막은 ‘애욕을 비웃지 마라 보살의 씨앗이다’를 통해 두 남녀의 애욕장면을 암시한다. 선재는 일련과 비바람 속에서 산길을 걷다가 이련의 요구로 운우지정을 나누게 된다. 선재는 천문대에 별을 보러 떠나고 박사의 아들은 250만년 전의 안드로메다 별자리를 보여준다. 소년은 선재에게 우주의 크기는 끝이 없으며 은하계는 먼지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과학적 사실을 전한다. 선재가 집으로 돌아오자 수많은 시간이 흘러 이미 이련은 집을 떠났다. 선재는 잠시 천문대에서 별을 보고 돌아왔지만 지상의 시간은 수년이 흐른 것이다. 

선재는 어머니 찾기에서 사람은 누구이고 평등은 무엇인가라는 세상에 대한 지혜를 깨닫고 배우기 시작한다. ‘세상은 자신을 잃어가면서 세상이 되는구나’의 에피소드에서 선재는 바다로 뛰어들고 노인에 의해 구출된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게 되며 피리와 꽃을 모두 버린다. 그리고 나서 선재는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선재의 어머니 찾기는 십우도의 소를 찾는 것으로 읽을 수 있으며 소와 어머니는 자신의 마음이자 진리의 다른 이름이며 어머니 찾기는 마음과 진리를 깨닫기 위한 수행으로 귀결된다. 
 

해주 스님의 ‘화엄 세계’에 의하면 화엄의 중심 사상은 여래출현(如來出現)이며 이는 ‘개개의 존재가 고유한 제가치를 평등하게 가지고 있으며 여래의 지혜인 여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또한 ‘화엄이란 꽃으로 장엄하는 것이니 보살행이라는 꽃으로 불세계를 장엄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이련은 선재에게 꽃을 팔려고 하고 강에 꽃을 뿌리고 꽃을 든 인물들이 현현하고 있다. 이련이 든 꽃과 보살이 든 꽃이 거듭 등장하지만 선재는 길 위에서 보살행(만행)을 통해 한 편의 꽃(예술)이 되고 화엄의 꽃이 된다. 

마지막 장면은 십우도의 입전수수(入廛垂手)다. 선재는 어머니 찾기와 진리를 구하는 것도 잊고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는 바닷물에 빠진 다음 거듭난 인간으로 세상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화엄경’에서 선재의 어머니 찾기는 십우도의 소를 찾는 것과 유사하며 큰 깨달음을 구하는 도정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자막은 게송의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문학산 영화평론가·부산대 교수

 

[1495호 / 2019년 7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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