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 이름이 뭐였더라….”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 비사라(36)씨가 두 눈을 껌벅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극심한 두통이 시작된 한 달 전부터 자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했다. 비사라씨는 스리랑카로 영상통화를 건 후에야 “다노시”라고 딸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실제 얼굴을 본 적도, 한번 꼭 안아본 적도 없는 생후 6개월의 다노시를 영상통화로 만나자 비사라씨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다노시는 비자 연장 차 지난해 5년 만에 고향에 잠시 갔을 때 생긴 딸아이다. 2008년 결혼 후 3명의 아이를 질병으로 하늘로 보내고 낳은 딸이기에 더욱 애틋하다.
비사라씨는 한 달 전 극심한 두통으로 병원에 들렀다가 바로 중환자실로 입원했다. 입원 당시 열과 두통이 심했고 말까지 제대로 하지 못했다. 비사라씨에게 지난 한 달 동안 하루가 다르게 병명이 계속 추가됐다. 뇌경색과 안구내염증, 세균감염, 패혈증, 당뇨…. 특히 뇌경색 부위는 고름이 가득 차 혈관이 막혔다고 했다.
비사라씨는 집중치료실에서 3주를 보내며 각종 약을 투약 받았다. 의료진은 몸 안 곰팡이로 인해 혈관도 부어올랐다고 했다. 당뇨가 심해지면서 약해진 면역력 탓에패혈증 등에도 감염됐다. 급작스러운 세균성 안구내염으로 유리체절제술도 받았다. 유리체절제술 이후 비사라씨는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감염에 의한 안구내염은 예후가 좋지 않다는 수술 전 안내에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한 달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별다른 차도가 없자 마음이 쓰릴 뿐이다. 아직 딸아이를 실제 보지도 못했는데 눈을 잃게 될까봐 두렵다. 비사라씨를 더욱 답답하게 것은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비사라씨의 몸은 하나둘씩 서서히 나타나는 증상들로 뒤덮이고 있을 뿐이다.
스리랑카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비사라씨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2012년 한국에 왔다. 고등학교 졸업 후 호텔 식당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한 달 봉급 15만원으로는 가정을 꾸리기 힘겨웠다. 특히 첫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후 질병으로 눈을 감았고, 두 번째 아이도 그렇게 세상을 떠나자 돈이 없어 아이들을 살릴 수 없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셋째까지 하늘로 가고 연이어 잃은 아이들로 큰 슬픔에 빠져있는 아내를 부모님께 부탁하고 한국에 왔다.
양산의 한 도금공장에 짐을 풀었다. 비사라씨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고약한 화학제품으로 인해 피부병이 끊이지 않았지만 잔업과 특근을 꼭 했다. 한 달을 열심히 일하면 200만원 가까이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한 달에 100만원 이상을 집으로 보내면서 행복이란 걸 느꼈다.
하지만 한 달 전부터 비사라씨는 하루하루가 고통스럽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도 그렇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질병이 가족의 불행으로까지 이어질까 두렵다. 무엇 하나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그의 몸은 점점 야위어 갔고 정신도 혼미해져가는 상태다. 병원 입원 후 비사라씨 옆을 지키고 있는 틴다크씨도 성한 몸이 아니다. 틴다크씨는 10년 전 기계에 오른쪽 손을 잃었다. 하지만 당장 보살핌이 필요한 친구가 그는 눈에는 더 안쓰럽다.
고통 속에서도 어서 건강을 되찾아 다시 일을 시작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비사라씨는 “병마를 이겨내 딸아이에게만큼은 강한 아빠가 될 것”이라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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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496호 / 2019년 7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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