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17·28대 총무원장 월주 스님-하
23. 17·28대 총무원장 월주 스님-하
  • 권오영 기자
  • 승인 2019.07.08 10:54
  • 호수 149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깨달음의 사회화’ 주창하며 한국불교 대사회 활동 견인

1954년 혜정스님 만나 출가 발원
20대에 금산사 주지로 사찰 정화
종회의원·총무원 부장 맡아 두각
법난 상처 딛고 사회운동에 착수
94년 선거로 28대 총무원장 당선
3선 추진으로 98년 종단사태 초래
월주 스님은 1994년 11월21일 개혁회의가 도입한 총무원장 선거법에 따라 진행된 28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월탄 스님을 제치고 당선됐다. 
월주 스님은 1994년 11월21일 개혁회의가 도입한 총무원장 선거법에 따라 진행된 28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월탄 스님을 제치고 당선됐다. 

1980년 10월27일 새벽, 전국 사찰을 기습한 신군부는 불교계를 유린했다. 법당 곳곳에 짙은 군홧발 자국을 새겼고, 무차별적으로 곤봉을 휘둘렀다. 스님들은 영문도 모른 채 연행됐으며 폭행과 가혹행위까지 받아야 했다. ‘10․27법난피해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 백서’(2016)에 따르면 해병대, 보안부대 등으로 연행된 스님들은 승복이 벗겨진 채 폭행과 협박 등을 당하며 장기간 구금됐다. 혜성, 정수, 윤월, 혜운, 삼보, 진경, 명선, 성해 스님 등은 전기고문과 물고문, 각목 구타, 잠 안 재우기 등 숱한 가혹행위에 시달려야 했다. 극심한 고문후유증은 이후에도 스님들을 괴롭혔고, 급기야 낙산사 주지 원철 스님은 고문후유증으로 1983년 9월경 입적했다.

10․27법난은 스님들에 대한 가혹행위와 폭행 이외에도 언론들이 쏟아낸 수많은 보도로 불교계에 큰 타격을 입혔다. 언론은 ‘낮에는 주지 밤에는 요정 경영인’(동아일보, 1980년 11월15일자), ‘무술승려-깡패규합…폭력행사, 여신도 농락, 연예인과 퇴폐행위’(조선일보, 1980년 11월15자) 등 계엄군의 일방적 수사결과를 자극적인 제목으로 연일 보도했다. 이로 인해 스님들은 ‘사이비승려’로, 불교계는 ‘비리집단’으로 내몰렸다. 불교계의 사회적 위상도 끝없이 추락했다.

신군부는 자신들에게 비우호적인 조계종 집행부도 개편했다. ‘10․27법난사건조사 결과보고서’(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2007)에 따르면 총무원장 월주 스님을 강제 연행한 신군부는 10월28일 영암(기종), 석주, 무진장 스님 등과 만나 현 총무원 집행부를 대신할 수습대책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신군부의 폭압 앞에서 원로스님들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원로의장 영암 스님을 비롯한 14명의 중진스님들은 11월2일 총무원장실에서 대책회의를 갖고, 신군부의 요구에 따라 비상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과도집행부 성격의 비상수습대책위원회 구성과 동시에 6대 중앙종회를 해산하기로 했다.

‘6대 중앙종회 회의록’에 따르면 11월3일 열린 63차 임시중앙종회는 예정된 수순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먼저 종회의원 17명의 사직서를 수리했다. 사직서를 낸 스님들의 상당수는 계엄군에 강제 연행돼 조사를 받고 있는 상태였지만 어떤 이유로 사직서를 냈다는 설명도 없었다. 중앙종회는 이어 총무원장 월주 스님의 사직서도 만장일치로 수리했다. 월주 스님은 회고록 ‘토끼뿔거북털(2016, 조계종출판사)’에서 11월8일 개운사 주지와 총무원장직을 인계하는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고 했지만, 월주 스님의 사직서는 그보다 앞서 중앙종회에 제출된 상태였다. 중앙종회는 이어 ‘정화중흥회의’로 명명된 과도집행부에 모든 권한을 인계하고 해산을 결의했다. 6대 중앙종회가 출범한 지 7개월여 만이었다.

월주 스님
월주 스님

월주 스님은 1980년 11월18일 보안사 서빙고실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월주 스님에게 신군부가 할퀴고 간 법난의 상처는 처참했다. 자주적인 종단을 만들어보겠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오히려 신군부에 의해 ‘비리 총무원장’이라는 굴레가 덧씌워졌다. ‘향후 2년간 모든 공직을 맡지 않겠다’는 족쇄도 채워진 상태였다. 월주 스님으로서는 감내하기 힘든 참담한 상황이었다. 출가 이후 ‘불교를 일으켜보겠다’는 원력으로 살아온 월주 스님이었기에 상실감은 더 컸을 수 있었다.

‘토끼뿔거북털’에 따르면 월주 스님은 1935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자수성가한 부친 덕에 큰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쳤다. 월주 스님이 불연을 맺은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어느 날, 서울 조계사에서 혜정 스님을 만나면서부터였다. 혜정 스님은 월주 스님보다 두 살이 많았지만, 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였다. 수년 만에 만난 옛 친구는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잿빛 장삼을 입고 있었다.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혜정 스님과의 대화는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이어졌다.

1954년 여름, 월주 스님은 혜정 스님이 있는 법주사로 향했다. 한 달 가량 쉴 생각으로 나선 길이었지만, 절에서의 생활은 곧 익숙해졌다. 스님이 되겠다고 발심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54년 법주사에서 금오 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고, 사미계를 받았다. 1956년 3월 화엄사에서 금오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도 수지했다. 월주 스님은 출가의 길에 들어서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55년 정읍농림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서울시립대의 전신인 서울농업초급대학에도 진학해 1학기를 수학했다. 스님이 20대에 금산사 주지를 맡고, 비교적 젊은 나이에 종단의 주요소임을 맡은 것도 남들보다 앞서 고등교육을 받은 영향이었을 수 있었다.

월주 스님이 출가했을 무렵, 불교계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불교정화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사찰마다 비구․대처승간의 대립과 갈등이 이어졌다. 월주 스님 역시 은사 금오 스님을 따라 불교정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여러 사찰에서 소임을 맡아 은사스님을 도왔다.

월주 스님이 금산사 주지로 임명된 1961년은 비구․대처의 갈등이 정점에 달할 때였다. 금산사는 130여 말사를 관할하는 교구본사였지만, 당시 대처승 측이 장악하고 있었다. 비구 측 총무원은 월주 스님에게 금산사를 정화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때 스님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고, 법정공방도 이어졌다. 금산사를 정화하기까지는 3개월이 소요됐다. 금산사를 비구승 사찰로 만든 스님은 이때부터 13년간 주지를 맡아 교구본사로서의 사격을 키워나갔다. 말사들도 정화해 하나둘 제 모습을 찾도록 했다.

월주 스님은 1966년 조계종 제2대 중앙종회원으로 피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종단의 전면에 나섰다. 행정에 밝은 데다 뛰어난 언변으로 은사뻘 되는 스님들이 즐비한 중앙종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이런 능력은 30대의 나이에 총무원 교무부장과 총무부장에 발탁되는 배경이 됐다.

1970년대 중반 서옹 스님이 종정중심제를 고집하면서 개운사․조계사 총무원으로 갈리자 월주 스님은 1978년 5대 중앙종회의장을 맡아 개운사 측의 중심에 섰다. 스님은 ‘종정은 상징적 위치에 있어야 하며, 종단의 실질적 운영은 총무원장이 맡아야 한다’는 게 확고한 입장이었다. 비록 자신의 출가를 이끌었던 옛 친구 혜정 스님과 문중의 맏사형 월산 스님이 조계사 측 총무원장을 잇따라 맡아 설득에 나섰지만, 스님은 소신을 꺾지 않았다. 대중들은 이런 스님을 신뢰했고, 1980년 4월26일 스님을 제17대 총무원장으로 선출했다.

10․27법난으로 종단 일선에서 물러난 월주 스님은 1982년 10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상황에서 스님으로서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난 길은 3년 넘게 이어졌다. 유럽을 거쳐 인도, 스리랑카, 대만 등 불교성지도 순례했다. 해외에서의 삶은 스님이 한국불교의 현실을 직시하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불교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수행전통은 계승하되, 산중에 머무르지 않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아픔을 나눠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는 스님이 28대 총무원장에 당선돼 ‘깨달음의 사회화운동’을 추진하게 된 배경이 됐다.

미국에서 돌아온 스님은 대사회활동에 집중했다. 1988년 지역감정해소국민운동협의회 공동의장,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1990년 공명선거실천시민연합 상임공동대표, 1992년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장 등을 맡았다. 왕성한 사회활동은 월주 스님에 대한 사회적 인지도를 높였으며, 불교계의 사회참여가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월주 스님이 종단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 것은 1994년이었다. 이 무렵 조계종은 의현 총무원장의 3선 연임문제로 큰 논란이 일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를 비롯한 8개 승가단체가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원회(범종추)’를 구성해 의현 총무원장의 퇴진을 요구했다. 여기에 종단 원로스님들을 비롯해 재가단체들까지 가세하면서 의현 스님은 4월13일 총무원장에서 물러났다.

월주 스님은 회고록에서 “지금 와서 돌아보면 의현 스님의 공과를 함께 평가해야 한다”면서 “의현 스님이 8년간 총무원장으로 재직하면서 했던 모든 일을 잘못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밝혔다. 다만 “무소불위로 권력을 행사하고, 과욕을 부려 3선을 강행하기 위해 정권의 비호를 받고 폭력배를 동원한 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의현 총무원장이 물러나면서 조계종은 개혁회의가 출범했다. 월주 스님도 총무원과 중앙종회 기능을 대신한 개혁회의위원으로 참여했다. 개혁회의는 종헌종법을 제개정하면서 종단의 제도를 대대적으로 손질했다. 총무원장도 중앙종회의원과 24개 교구본사에서 선출된 선거인단을 합쳐 총 321명의 투표를 통해 선출하도록 했다.

개정된 선거법에 따라 월주 스님은 1994년 11월21일 총무원장 선거에서 168표를 획득해 146표를 얻는 데 그친 월탄 스님을 제치고 제28대 총무원장에 선출됐다. 1980년 10․27법난으로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지 14년만이었다.

월주 스님은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28대 총무원 집행부의 중점과제로 삼았다. 산중불교에서 탈피해 불교의 현대화와 사회화를 추진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종단 예산 20억원을 조성해 노동, 인권, 복지, 환경, 통일 사업에 적극 뛰어들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나눔의 집’을 설립했고, 사회복지재단을 만들어 복지사업에도 앞장섰다. 임기 4년간 월주 스님을 중심으로 한 조계종의 대사회적 행보는 불교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토대가 됐다.

그러나 1998년 월주 스님의 임기만료를 앞두고 다시 종단 안팎에서 파열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종정 월하 스님과의 갈등이 대표적이었다. ‘토끼뿔거북털’에 따르면 월하 스님 측은 종정중심제로의 회귀와 멸빈자 사면 등을 꾸준히 요구했다. 이는 종단개혁으로 총무원장에 오른 월주 스님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월하 스님은 종정사임서를 제출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이런 가운데 월주 스님이 다시 총무원장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논란이 커졌다. 1994년 조계종 개혁회의는 의현 총무원장 때 불거진 3선 논란을 막기 위해 “총무원장은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다”고 종헌에 명시했다.

종단 일각에서는 이 규정에 따라 월주 스님이 총무원장에 출마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비록 10․27법난으로 강제 퇴임됐다고 하더라도 1번의 총무원장을 역임했고, 1994년 제28대 총무원장에 취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주 스님 측은 “앞선 17대 총무원장은 10․27법난으로 강제로 물러난 데다, 1994년 이전 상황이기 때문에 개정된 종헌을 소급해 적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1998년 9월 월주 스님이 출마를 공식화하면서 큰 파장이 일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 등 승가단체가 월주 스님의 출마반대를 위한 범불교도연대회의를 발족했고, 때를 같이해 종정 월하 스님이 교시를 발표해 월주 스님의 3선을 반대했다.

‘종정교시봉대’를 이유로 정화개혁회의가 출범하면서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98년 종단사태’는 조계종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의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98년 종단사태는 특정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월주 총무원장의 3선 논란이 빌미가 됐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1994년 3선을 추진하던 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무너뜨리고 사부대중의 큰 기대를 받으며 총무원장에 오른 월주 스님이, 자신 또한 3선 논란으로 또다시 종단이 파행으로 치닫게 한 것은 스님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갖게 하는 배경이 됐다.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월주 스님은 이후에도 대사회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눔의 집 이사장을 맡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아픔을 달랬으며, 2003년 해외구호 단체인 지구촌공생회를 설립해 동남아 극빈층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이런 공로로 200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고, 2005년 조계종 포교대상, 2010년 캄보디아 국왕 훈장, 201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12년 만해대상 등을 수상했다. 2017년 조계종 원로의원에도 추대됐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96호 / 2019년 7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