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산 탑사 주지 진성 스님
마이산 탑사 주지 진성 스님
  •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19.07.08 14:39
  • 호수 14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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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돌탑 사이 흐른 법수(法水)서 건져낸 ‘나눔 공덕’ 세상에 전하다

클라리넷 연주가 꿈
사라지며 출가 단행

서울·경기서 6년 부전
동방대·동국대 대학원 수학

탑사 대웅전 지하서 6년 
관음정진 후 ‘구제 원력’

1994년 설립 ‘갑룡장학회’
사찰·주민 봉사문화 새지평

교정활동만도 11년 7개월
‘나누우리’ 통해 국제구호

“꼿꼿이 서 있는 돌탑서
바른언행 실천 다지길”
“우리가 귀중히 보아야 할 건 무슨 종교냐가 아니라 생명”이라는 진성 스님은 “나눔 속에서 자란 생명이 가득해야 정토가 구현된다”고 강조했다.

진안과 마령 경계선에 희유한 모양의 두 봉우리가 마주한 산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신라시대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 용출산(聳出山)을 거쳐 조선 초에는 속금산(束金山)으로 불렸다. 계절에 따라 봉우리 이름도 다르다. 안개 자욱한 봄날에 솟은 두 봉우리가 쌍돛대를 닮아 돛대봉, 녹음 짙은 여름 수목 사이에 드러난 봉우리가 용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용각봉, 가을 단풍 때 말의 귀처럼 생긴 봉우리가 유독 두각을 나타내 마이봉, 화선지(설산)에 묵화를 치는 붓(봉우리)과 같다 하여 겨울에는 문필봉이라 한다. 지금은 말의 귀를 닮았다고 하여 마이산(馬耳山)으로 불리고, 동쪽 봉우리(680m)를 숫마이봉(父峰), 서쪽 봉우리(686m)를 암마이봉(母峰)이라 한다. 그 명산 아래 탑 80여기가 서있는 ‘탑사(塔寺)’가 있다. 

군락을 이룬 탑 사이를 거닐다보면 자연스레 38개의 탑에 눈길이 쏠린다. 압권은 대웅전 위에 나란히 서 있는 천·지탑(天·地塔)이다. 인간세계의 염원을 하늘에 잇고,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해 주려는 듯하다. 천지탑 아래로는 33대천세계를 상징하는 33개의 탑이 줄지어 있는데 주탑인 천지탑과 대웅전 불보살님을 엄호하는 신장(神將)처럼 일렬종대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그 앞으로 세상의 모든 고통 외면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한 일광·월광·약사탑이 참배객들을 맞이한다. 탑사를 품은 마이산은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2호로 지정됐고, 세계 최고 권위의 여행 안내서인 ‘미슐랭 그린가이드 한국편’(2011)에서 별 3개(만점)를 받기도 했다.

‘억조창생(億兆蒼生·수많은 백성) 구제’ 원력을 세운 이갑룡(李甲用 1860∼1957·효령대군 16대손) 거사가 30여년(1885∼1915 추정) 동안 조성한 탑이다. 시멘트 한 점 섞지 않고 큰 돌, 작은 돌만을 켜켜이 쌓아올린 육중한 탑들은 100년이 흐른 지금도 삼매에 든 듯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서 있다. 이갑용 거사의 2대손 도생 거사, 3대손 혜명 스님에 이어 4대손인 진성 스님이 탑사를 수호하고 있다. 

‘억조창생(億兆蒼生·수많은 백성) 구제’ 원력을 세운 이갑룡 거사는 약 120여기의 탑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고등학교 재학 때 “클라리넷 한 번 불어보라”는 음악선생님의 권유로 난생 처음 리드(reed)에 공기를 불어 넣었다. 소리가 좋았더랬다. 고음이 선사하는 청량함과 저음에서 울리는 애절함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를 알아가며 ‘관악기의 바이올린’이라는 클라리넷에 흠뻑 빠져들었다. 먼 훗날 지휘자의 손끝을 따라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자신을 그리며 음대입시 실기까지 치렀다. 안타깝게도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었지만 손을 크게 다쳤는데 “왼손 새끼손가락을 쓸 수 없다”는 진단이 떨어졌다. 목관악기라 해도 음의 높고 낮음을 결정짓는 것은 운지(運指)다. 푸른 꿈은 한 순간에 사라졌다.

방황하는 청년을 다독여 정읍 다천사(茶泉寺)로 보낸 건 혜명 스님이다. 순순히 길을 나선 이유가 있다. 클라리넷 연주가의 꿈이 물거품될 때 혜명 스님도 생의 마지막을 향해 걷고 있었다. 암 판정과 함께 3개월 시한부를 선고받았던 것이다. 혜명 스님의 ‘마지막 부탁’을 헤아린 청년은 삭발염의하고 ‘진성(眞聖)’이라는 법명으로 사문의 길로 들어섰다.(1985)

출가 직후 희유한 일이 일어났다. 크게 다친 새끼손가락이 금세 나아져 생활에 별 지장을 받지 않을 정도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건 혜명 스님의 몸속 암 덩어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혜명 스님은 현재 탑사 회주로 주석하고 있다.

탑사 주지(2011)를 맡았지만 절 울타리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어르신 생신상 차려 드리기, 백미·연탄나눔, 홍삼고추장·김장축제를 매년 열어 지역주민 곁에서 호흡했다. 클라리넷 대신 색소폰을 잡은 스님은 탑사 음악봉사단 ‘탑밴드(Top Band)’도 창단했다.(2013)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신도들에게 치유방편으로 난타와 색소폰을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됐다. 소규모 공연을 기획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탑밴드는 전북지역 군부대·양로원에서 위문공연을 하고 산사음악회에도 출연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구호단체 (사)나누우리 설립(2010)을 주도한 스님은 봉사단장을 맡아 해외 아이티 지진피해 복구, 라오스 초등학교 교사 건립, 캄보디아 우물관정, 베트남 식수대 설치, 사할린 영구귀국 동포돕기 등의 국제구호사업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주지 소임 전부터 사형수 옥바라지(2003)도 마다하지 않았던 스님은 전주교도소 교정위원과 귀휴심사위원, 법무부 교정중앙협의회 불교분과위원장을 맡으며 교정교화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전주교도소 교정협의회에서 교정활동을 시작(2007)한 후 지난 11년 7개월 동안 헌신적인 교정교화활동을 펼쳐왔다. 연인원 1만7000여명에 이르는 재소자들의 수형생활에 도움을 주는 한편 일대일 멘토링과 자매결연을 통해 500여명에 이르는 재소자들이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다. 사회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인식의 폭을 넓힌 진성 스님은 사유(思惟)의 숲을 거닐다 진안의 대 변혁을 이끌어내는 결론 하나를 도출해 냈다. 

‘봉사가 세상을 바꾼다!’ 

1994년부터 운용해온 ‘갑룡장학회’는 성적우수 학생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는데, 2014년 진안군 자원봉사센터와 업무협약을 맺은 후부터 봉사 잘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한다. 시너지 효과는 엄청났다. 봉사우수 장학금 전환 후 성수면봉사단, 주천면봉사단, 마령면봉사단, 재난자원봉사단, 사랑의열매봉사단 등이 진안 전역에서 새로이 결성 또는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연간 자원봉사 참여자가 1만5000명을 훌쩍 넘더니 급기야 2만7000명을 넘어섰다.(2018) 진안군 인구 2만6000명을 상회하는 수치다. 진안군자원봉사센터가 행정안전부 주관 자원봉사대상 대통령표창을 2017·2018년 연이어 수상하며 ‘한국의 자원봉사 성지는 진안’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사찰과 주민단체가 연대해 이룬 쾌거는 지역사회 봉사활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진성 스님의 여정 속에 흐르는 건 ‘나눔의 강’이다. 그 강의 시원(始原)이 궁금했다. 다관에 찻잎을 넣어 두고는 한 마디 툭 던진다. 

“탑사 대웅전 지하에서 만 6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진성 스님은 ‘나누우리’ 봉사단장을 맡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의 동남아 국가에서 구호활동을 펼치고 있다. 

천지탑 아래 임시법당 하나 있었다. 그 공간에서 먹고 잤다. 그 시절 세상 사람들은 이 절을 탑사(塔寺)가 아닌 탑사(塔舍)로 인식했다. 도량이 아니라 관광지로 본 셈이다. 낮에는 나무그늘 아래 앉아 술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저녁에는 무당들이 들어와 탑 아래 촛불 켜 놓고 징을 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증조부인 이갑룡 거사가 “돌탑 보기를 황금처럼 보라” 했다지만 이런 번잡한 상황에서 소년의 눈에 비친 돌탑은 ‘탑 무더기’에 지나지 않았을 터다.

불서를 탐독하기 시작한 건 출가 직후 보낸 병영에서다. 이상하리만치 부처님 말씀이 뇌리에 착착 박혀왔다. 작은 교리 책자 하나도 보물처럼 다뤄가며 책장을 넘겼다. 교학 열정으로 뜨거웠던 진성 스님의 발길은 자연스레 동방불교대학과 동국대 대학원(불교학과)으로 향했고, 서울·경기 사찰에서 부전을 보며 6년(1987∼1992)의 서울 유학을 마쳤다. 탑사로 돌아 왔을 때 다행히 임시법당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대웅전(1987 신축)이 서 있었다. 그러나 새로 지은 그 당시의 요사채 공간이 협소해 부득이 대웅전 지하에 몸 뉘일 곳을 마련해야 했다. 지금의 요사채가 신축(1998)될 때까지 스님은 ‘일어서면 천장까지 한 뼘 남는’ 방에서 6년(1992∼1998)을 보냈다. 

유년시절을 임시법당에서 보냈는데 출가해서도 법당 지하에서 머물러야 하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임제 스님이 일찍이 ‘머무는 곳에서 주인이 되라(수처작주·隨處作主)’고 하셨습니다. 지하 공간도 부처님을 품은 도량이니 신앙·수행공간입니다. 크게 문제될 건 없었습니다.”

‘으뜸가는 수행은 홀로 있는 것이니 홀로 있는 일을 배우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에 옮긴 진성 스님이다. 

“불서를 내려놓고 108염주를 들고 관세음보살 정근에 매진했습니다. 다만, 정진 중에도 떠나지 않은 화두 하나가 있었습니다. ‘수행승으로 살아갈 것인가? 보살의 길을 걸을 것인가?’”
얼마나 지났을까? 결단을 내렸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동산에 나무를 심어 시원한 그늘 만들어주고, 다리나 배로써 물을 건네어 주고, 복 되고 덕 되는 집을 짓고, 우물을 파서 목마름 풀어주고, 객사를 지어 나그네 쉬게 하면 그 공덕은 밤낮으로 자란다.’(‘잡아함’) ‘나누자! 호주머니 들어온 것만큼만 나누자! 평생 이것 하나만 지키고 살면 세상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속이 후련해지더군요!”

중생의 고난·고통을 대자대비심으로 구제한다는 관세음보살의 원력을 올곧이 체득한 듯하다. 그리고 그 원력은 증조부 이갑룡 거사의 바람과도 맥이 닿는다. 그러고 보면 ‘갑룡장학회’ ‘나누우리’ 설립 또한 수행과 사유가 빚어낸 지혜의 발현이었음이다. ‘나눔의 강’ 시원은 대웅전 지하에서의 관세음보살 정진이었음이 확실하다.

진성 스님의 도량석(道場釋) 목탁 소리에 맞춰 나한전(현 영신각)이 들어섰고, 종각이 세워지며 돌탑들 사이로 법음이 흐르기 시작했다. 산사로서의 격을 모두 갖춘 듯한데 진성 스님은 미소를 보이며 벽에 걸린 족자를 가리켰다. ‘愚公移山(우공이산)’. 산을 옮겨야 한다는 건 녹록치 않은 불사 하나가 남아 있다는 뜻일터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와 동양은 물론 전 세계의 유명한 탑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탑 박물관’을 세우려 합니다. 박물관 건물에 명상할 수 있는 공간도 확보할 예정입니다. 다도, 요가 등의 프로그램 진행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산(山)은 상가(商家)였다. 현재 탑사 입구의 상가 자리에 건축할 예정이라고 한다. 녹록치 않은 일이지만 박물관이 들어서면 탑사는 도량으로서의 품격을 더 한층 높게 갖출 게 확실하다. 

“박물관에서 탑의 의미를 이해하고, 수행관에 앉아 전면에 보이는 108탑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후, 탑 사이를 지나 대웅전에서 참배하는 상상의 나래를 펴봅니다. 일주문 밖에서 가져온 번뇌는 차츰 가라앉고 품었던 신심이 점점 배가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신심이 도(道)의 으뜸이요, 공덕의 어머니로서 모든 선법(善法)을 증장시킨다’ 했습니다.(‘화엄경’) 깨달음은 아니더라도 신심을 고양시킬 수만 있다면 탑사의 역할은 다한 것이라 봅니다.”

이갑룡 거사가 실현시키려 했던 ‘억조창생 구제’를 불법(佛法)의 힘으로 성취시키겠다는 의지가 또렷이 읽힌다. 그럼에도 한 가지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갑룡장학금’은 종교유무에 관계없이 봉사한 학생에게 주어진다. 불교봉사에 한정된 것도 아니다. 어르신 돌보고, 연탄 나누는 데 적극 나선 학생들이다. 만면에 미소를 지은 진성 스님이 이른다.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살고 있는 것이나,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나, 모든 것들은 다 행복하라!’ 우리가 귀중히 보아야 할 건 ‘무슨 종교인가?’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그 생명, 다 행복해야지요! 나눔 속에서 자란 생명이 이 땅에 가득해야 정토세계가 구현됩니다.”

무주상보시와 대자대비심을 말하고 있음이다. 평소 지침으로 삼고 있는 경·선구를 부탁드리자 ‘숫타니파타’의 일구를 전했다. 

‘거친 말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을 하며, 다른 이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는 사람이 진정한 수행자다.’ 

“저는 탑사를 참배하시는 분들이 반듯이 서 있는 저 돌탑을 보시며 팔정도(八正道)를 기억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바르게 알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면 세상도 바르게 설 것입니다. 정토는 그 땅 위에 실현된다고 확신합니다.”

정념(正念)음 품고 마이산으로 걸음해 탑과 탑사이를 거닐어 보시라! 100년 동안 침묵 속에 서 있는 돌탑이 전하는 일성(一聲)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진성 스님은

- 1985년 다천사에서 벽산 스님을 계사로, 혜명 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89년 동방불교대학교 졸업.
- 1992년∼탑사 갑룡장학회 이사장.
- 1997년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수료.
- 2001년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 보상추진위원장 역임.
- 2011년∼마이산 탑사 주지.
- 2015년∼나누우리 봉사단장.
- 2017년∼태고종 전북교구 종무원장.
- 2018년∼진안군 자원봉사센터 이사.
- 2018년∼전북 영산문화축제 조직위원장.
- 전주교도소장·광주교정청장 표창(2008), 전북도지사 표창(2010), 법무부장관 표창(2011), 교정대상 수상(2018).

 

[1496호 / 2019년 7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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