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 피해 사찰·승려 더 있다
제주 4·3사건 피해 사찰·승려 더 있다
  • 법보
  • 승인 2019.07.08 16:03
  • 호수 1496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산사기행집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로 불자들에게도 친숙한 이산하 시인은 ‘녹두서평’ 1집에 1300행의 미완의 장편 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한 바 있다.(1987)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한라산 서문)에서 보이듯 미국과 역대 한국정권에 의해 은폐된 4·3사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이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필화를 겪었다. 개천절 특사로 석방(1989) 된 시인은 이듬해 제주도로 떠난다. 시 ‘한라산’을 완성하기 위함이었다. 진실에 좀 더 다가가려 한 시인은 현장을 목격했거나, 유가족을 찾아 당시의 상황을 취재하며 살육의 현장을 면밀히 파헤쳤다. 제주도에서 2년이나 머무른 시인은 결국 절필을 선언한다. ‘나는 시를 쓸 수가 없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마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다 보니 너무나 참혹하고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산하 시인이 다시 원고지를 마주해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1999)를 내기까지는 10년이 걸렸다. 

‘제주도 4·3’은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禁足地域)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과 토벌대의 무력 충돌·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제주도민 3만여명이 희생됐는데 80%가 군정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불교계에도 그 파급이 엄청나게 미쳤는데 학계에 따르면 1948년 11월에 피해가 가장 컸다고 한다. 현재까지 파악된 현황만 보아도 36곳의 사찰이 전소됐거나 폐허가 됐고 16명의 스님들이 희생됐다. 일제강점기 전후로 침체된 제주불교를 다시 일으킨 관음사와 법화사도 그때 불태워졌다. 그러나 실제 피해는 이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1948년 10월17일 당시 제9연대장(송요찬)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해발 100∼300미터의 고지대) 지역을 적성지역(敵性地域)으로 선포했다. 이곳에 남아 있거나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모두 ‘폭도’로 인정해 총살형에 처한다는 포교령도 떨어졌다. 산간 지역에는 산사들이 있었다. 절을 지키겠다며 떠나지 않은 사부대중들은 곤욕을 치르거나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섬이라는 제주지역 특성상 모든 스님들이 삭발염의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따라서 일반인 사상자에 스님이 상당 수 포함됐을 것이다. 

당시 제주 전 지역에서 피해를 입지 않은 사찰은 많아야 10곳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4·3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제주도에는 100여개의 사찰이 있었다. 피해가 확인된 36개 사찰과 법난을 비껴간 10개 사찰을 제외한 50개의 사찰은 지금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인명 사상과 피해 사찰이 더 있을 건 명약관화하다.

불교계가 이토록 처참하게 당한 이유에 대해 학계에서는 진보성향이 짙은 불교계 인사들이 제주도 민중과 뜻을 같이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설득력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법정사 주지 김연일과 강창규, 방동화 등 스님들은 700여명의 주민들과 함께 법정사에서 주권회복을 요구하는 시위를 펼쳤다.(1918)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명명된 이 사건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의 한 페이지다. 항일운동 중심에 선 스님들은 야학·농촌계몽 운동을 이끌었고 당시 신임·중진 스님들에게도 정신적 영향을 미쳤다. 관음사 주지 오이화 스님은 고문 후유증으로 죽음에 이르렀고, 1920년대 야학운동을 선도했던 원문상 스님도 체포돼 희생됐다. 당시의 제주 불교계를 곱게 보았을 리 없는 이승만 정권이 종교인의 인권마저 외면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제주 관음사가 ‘제주불교 4·3희생자 추모사업회’를 발족한다고 한다. 진상규명과 희생자 추모, 명예회복에 무게를 둔 추모사업회다. 

4·3 불교 유적유물에 대한 현황파악에 나설 것으로 보이는데 가능한 불교피해에 대한 학술적 검토도 심도 있게 전개해 주기 바란다. 앞서 살폈듯이 1940년대 후반까지 남았던 사찰의 행방이 갑자기 묘연해졌다. 사찰 피해에 따라 인명 피해를 추산하는 실정에서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희생당한 스님들의 행적도 추적해 어떤 이유로,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지 규명해 주기 바란다. 아울러 추모사업회가 추진 예정인 ‘인권·평화 운동’전개에도 기대하는 바가 크다. 4·3사건의 비참함은 인권과 평화를 외면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1496호 / 2019년 7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대행 2019-07-15 17:34:34
5,6년전 제주도 여행하며 빌린 차로 한바퀴 돌때 눈에 보이지 않으나 찻길에서 느껴지던 수많은 영혼들,,,,,소리없었지만 수많은 소리가 느껴졌었다,,,,왜 그런지 ...이런 슬픈 과거가 하나도 밝혀지지 않고 사라져갔던 시간들이 너무 많았다,,,이름없이 가신 분들이여 모두 극락왕생, 아미타불,미륵불 세계로 왕생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