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교와 예술의 경계 : 버림과 주움의 그 사이
1. 종교와 예술의 경계 : 버림과 주움의 그 사이
  • 주수완
  • 승인 2019.07.15 17:00
  • 호수 149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삶의 고민 반영해 인간적 면모 자유롭게 표현

종교미술이란 엄격한 규칙있다 믿지만
시작은 일반미술 차용 이미지 대부분
​​​​​​​
불교미술은 불교인만의 영역될 수 없어
신성한 미술은 속세와 소통하면서 탄생
정종여, 괘불도, 1938년. 진주 의곡사. 652×355㎝.

덕수궁의 현대미술관 분관에서는 “절필시대”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근대미술가를 재조명하는 전시가 9월 15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 전시의 상징처럼 단연 먼저 눈앞에 펼쳐진 작품은 진주 의곡사 소장의 괘불로서, 화가 정종여(1914~1984)의 작품이다. 이번 전시의 소개 기사에 실린 이 괘불의 사진을 처음 접했을 때는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괘불에 비해 너무 서툴러 보이고, 심심해보이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불화의 도상이나 색채의 사용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을 것이고, 단지 동양화 기법으로 필요에 따라 커다란 괘불을 한 점 그려준 것이려니 생각했다. 불심(佛心) 같은 것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어 보였다.

더구나 정종여는 월북화가다. 현재 우리 사회는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했던 약산 김원봉(1898~?)의 훈장서훈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 와중에 월북화가에 대한 재평가 역시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사실상 같은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다. 그나마 김원봉은 북한에서 숙청되었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북한 측 인사로도 볼 수 없다는 근거나마 제시되고 있지만, 정종여는 작고하기 불과 2년 전에도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받는 등 높은 평가를 받아온 것 같다. 예술과 정치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을까?

잠시 시선을 돌려보자. 우리가 사찰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불교문화재는 대부분 조선시대의 작품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불교문화재는 대부분 승려 화가나 조각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이전 시대에는 세속의 작가들도 적극적으로 불교미술 제작에 참여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걸작의 기독교 미술을 제작한 작가들이 가톨릭 신부들이 아니었던 것처럼, 오히려 뛰어난 기량을 지닌 작가라면 누구나 불교미술의 판에 들어와 자신들의 기량을 뽐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가 되면 억불숭유 정책이 펼쳐지면서 사찰에서의 대규모 불상이나 불화, 혹은 청동제 범종 제작이 통제되기 시작했다. 더 이상 화가나 조각가에게 불교미술은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 교단은 자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승려들 중에 실력있는 분들이 직접 나서 적극적으로 불사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불교미술의 거장 양지 스님 같은 승려 미술가의 선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불교미술 생산은 더더욱 승려 중심으로 변화해 갔다.

이러한 변화는 한편으로는 일종의 ‘엄격주의’ 미술의 경향을 만들었다. 단순히 작업의 결과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있어서도 경건함과 청정함이 필요했고, 이를 위한 의례가 뒤따랐다. 또한 일정한 표현의 규칙과 법식이 창작의 틀로 작용했다. 그러나 현대는 다르다. 불화계의 거장으로 평가받았던 만봉 스님(1910~2006)처럼 화승(畵僧)의 맥을 잇고 계셨던 분들이 한분 두분 입적하시고, 이제는 오히려 세속의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불화가 제작되고 있다. 전통적인 도상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불화도 제작된다. 그러나 아직 과도기일까. 이러한 파격적인 불교미술이 법당에 정식 예불용으로 봉안된 사례는 아직 보지 못했다. 아마도 그 과도기의 시작 즈음에 정종여 화백의 괘불이 위치할 것이다.
 

아이네아스를 치료하는 의사 이아픽스를 묘사한 폼페이의 벽화(기원후 1세기, 나폴리 국립박물관)사진 왼쪽. 시비왕 본생담을 묘사한 간다라의 부조(2~3세기경, 브리티쉬 박물관) 사진 오른쪽.
아이네아스를 치료하는 의사 이아픽스를 묘사한 폼페이의 벽화(기원후 1세기, 나폴리 국립박물관)사진 왼쪽. 시비왕 본생담을 묘사한 간다라의 부조(2~3세기경, 브리티쉬 박물관) 사진 오른쪽.

불교미술사학자들은 조선시대 불교미술을 이끌어온 화승, 조각승과 같은 승장들에 대해 연구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회화를 이끌었던 화가나 선비들을 연구하는 것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일반적인 화가들은 아무래도 사회적, 정치적으로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창작을 했기 때문에 여러 사건들에 연관되어 있지만, 승려 작가들은 작품에 법명은 남아있어도 이분들이 어떤 분들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사실상 남아있는 바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분들을 오롯이 작품을 통해서만, 작가로서만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정종여와 같은 작가들은 스님이 아닌 이상에야 어떻게 그 격동의 시대에 정치에서, 사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념의 좌우를 떠나 세속에 살았던 작가들이니만큼 삶의 고민과 갈등이 더 많이 반영되어 있을 것 같다. 나아가 그들은 법식에 구애받지 않고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작품 속에 더 자유롭게 집어 넣었을 것 같다. 이번 연재는 이렇게 속세에 머물면서 불교미술의 창작에 뛰어들었던 작가들의 세계를 통해 불교미술 속에 담긴 인간적 면모를 살펴보려고 한다. 정종여의 의곡사 괘불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다만 독자 제위께서는 전시회가 끝나기 전에 직접 이 괘불을 보시고, 언뜻 사진을 통해서는 허술해 보이는 이 작품이 막상 그 앞에 선 우리에게 전하는 강렬한 감동을 경험해보시기를 권하기 위해 서두에서 소개해드렸다.

우리는 종교미술이란 경전에 의해 매우 엄격한 규칙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그 시작은 일반 미술에서 차용해온 이미지인 경우도 많다. 부처님 전생에 비둘기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살을 대신 독수리에게 내어 준 ‘시비왕 본생담’을 묘사한 간다라의 도상은 이후 중국 돈황 벽화에서도 유사한 구도로 나타나 종교미술이 엄격한 전통을 지닌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도상의 기원은 폼페이의 한 벽화에 보이는 것처럼 로마 시대의 서사시를 묘사한 장면에서 차용된 이미지로 보인다. 이 벽화는 트로이 전쟁에서 빠져나온 아이네아스가 아들 아스카니우스의 부축을 받으며 의사 이아픽스의 치료를 받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옆에는 그의 어머니인 여신 비너스가 서있는데, 폼페이에 이런 벽화가 그려진 것은 아이네아스가 로마를 건국한 인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비왕 본생의 이야기는 물론 인도에서의 창작이겠지만, 그것을 묘사한 결과물은 폼페이 벽화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본생담에는 시비왕을 부축하는 사람의 묘사가 없지만, 실제 간다라 미술에서 시비왕을 부축한 인물은 폼페이 벽화 속 비너스를 변용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원래부터 불교미술은 불교미술가로 정해진 사람들만의 영역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렇게 속세의 미술과 소통하는 사이에 신성한 미술이 탄생했던 것일지 모른다. 이번 연재에서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런 것이다.

주수완 고려대 초빙교수 indijoo@hanmail.net

 

[1497호 / 2019년 7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