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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고대불교-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㉗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⑥

4국의 치열한 쟁투 속 국가위기 극복 위해 황룡사 9층목탑 건립

‘찰주본기’와 ‘삼국유사’에
9층목탑 조성 의미 담겨

고구려와 수당의 국제전
백제와 신라 치열한 혈전

전쟁과 귀족들의 반발 등
대내외적 혼란 극복 의미

선덕여왕 14년 조성 착수
2년 만에 완공…20층 높이

9층목탑 3차로 중수하면서  
사리내함에 찰주본기 남겨

​​​​​​​현재 900여자 판독 가능해
‘삼국유사’ 내용과 대동소이

보물 1870호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
보물 1870호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

신라 ‘중고’기 국가불교의 최대 상징물인 황룡사의 9층목탑이 조성된 때는 선덕여왕 14년(645)이었다. ‘황룡사구층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塔刹柱本記)’와 ‘삼국유사’ 황룡사9층탑조에 의하면 선덕여왕 14년(645) 3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4월에 찰주를 세웠으며, 다음해에 준공하였다. 9층탑은 오늘날의 건축물로는 20여 층의 높이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내부에 계단이 있어서 탑신부의 정상부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고려시대 김극기(金克己)가 읊은 시구에 의하면 탑에서 내려다본 경주는 벌집이나 개미집처럼 작게 보였다고 한다. 고층 건물이 없던 신라 당대에는 9층탑은 왕경 전체를 발아래 내려다볼 수 있는 독보적인 고층 건축물로서 호국불교를 대변하고 국가의식을 고취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위용을 자랑하였을 것에 틀림없다.       
그런데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황룡사의 9층목탑이 조성되던 때는 국가적 존망이 걸린 절체절명 위기의 시기였다. 4년 앞서 백제에서 호전적인 의자왕이 즉위하고, 이어 다음해에는 고구려에서 독단적인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신라에 대한 정치적 압력과 군사적 침략은 일층 강화되었다. 드디어 백제 의자왕은 선덕여왕 11년(642) 7월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서쪽 선후성(獮猴城) 등 40여성을 빼앗았고, 이어 8월에는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이끌고 낙동강 서쪽의 요충지인 대야성(大耶城)을 공략하였다. 신라는 대야성의 상실로 서쪽 변경의 방어선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신라 정계의 실력자인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충격이 컸다. 이에 김춘추는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오히려 연개소문에게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 달라는 협박과 함께 억류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성과 없이 귀국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는 함께 모의하여 당항성(党項城)을 빼앗아 신라의 대당교통로를 끊으려고 하였다. 이에 절박한 위기의식을 느낀 신라는 당 태종에게 위급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선덕여왕 12년(643)에도 거듭 당에 사신을 보내어 여・제 두 나라의 침공을 호소하고 구원을 요청하였다. 당에 유학 중이던 자장(慈藏)의 급한 귀국을 요청한 것도 이때였다. 그런데 위급을 고하는 신라의 사신에 대하여 당 태종은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웃 나라의 업신 여김을 받게 되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둑을 불러들이는 것”이라고 하면서 왕족 한 사람을 신라의 왕으로 삼고 군사를 보내 호위하겠다는 의사를 표하였다. 당에서 귀국한 신라 사신의 보고는 신라 조정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여왕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귀족세력들을 표면에 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급기야 선덕여왕 16년(647) 정월에는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던 상대등 비담(毘曇) 등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고, 선덕여왕 자신도 반란 중에 사망하는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한편 신라로부터 거듭 구원 요청을 받은 당 태종은 선덕여왕 13년(644)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가 백제와 함께 신라를 침공하지 말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오히려 옛날 수 양제의 침입 때 빼앗아간 고구려의 500리 땅과 성읍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강경한 대응으로 임하였다. 그해 11월 당 태종은 이를 명분으로 삼아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하는 친정(親征)을 단행하였다. 물론 신라의 구원 요청에 부응하여 고구려를 정벌한다는 것은 사실 구실일 뿐이었고, 실제적인 이유는 동북아시아의 패자였던 고구려의 존재 자체가 당제국의 통일세력 유지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7세기 전반기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수・당과 고구려가 양대 세력의 대표자로 나서서 사생결단의 자웅을 겨루는 구도였고, 그 기간 한반도 안에서는 신라와 백제 사이에 생존을 건 싸움이 반복되던 정세였다. 당 태종은 11월 옛날 수 양제가 일으켰던 고구려 원정의 경험을 답습하여 수륙(水陸) 두 길로 국력을 기울인 군사를 일으켜서 침략해 왔다. 그리하여 다음 해 4월에는 고구려의 개모성(蓋牟城)을 항복받고, 5월에는 요동(遼東)・백암(白巖) 2성을 함락하였다. 그런데 6월에는 안시성(安市城)을 포위하고 치열한 공성전을 전개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9월에는 마침내 성과 없이 철군하였다. 한편 신라는 계속하여 당에 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백제와 혈전을 전개하여 선덕여왕 13년(644)에는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7개성을 빼앗았고, 14년(645)에도 김유신은 연이어 출전하여 백제군과 혈전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당 태종의 고구려 친정에 호응하여 3만 명의 원군을 보내었는데, 그 틈을 노린 백제에게 7개성을 다시 뺏기었다. 

황룡사 9층탑의 건축 작업은 선덕여왕 14년(645)부터 15년(646)까지 2년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이 기간은 실로 대내적・대외적으로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국가적인 위기에 봉착한 때였다. 9층탑의 건립이 바로 현실적인 문제로서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추진된 것임을 의미한다. 즉 약화된 여왕의 위상을 높이고, 외적을 퇴치하기 위해서 왕권을 신성화하고 국가의식을 드높일 수 있는 상징적인 조형물로 선택된 것이 바로 9층탑이었다는 것이다. 9층탑의 창건연기와 규모에 대해서는 신라 48대 경문왕 12년(872)에 조성된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와 ‘삼국유사’황룡사9층탑조에 전하는데, 이 두 자료 가운데 ‘찰주본기’가 새겨져 있는 사리함(舍利函)은 9층목탑을 제3차로 중수하면서 9층목탑의 심초석(心礎石)에 시설된 사리공(舍利孔) 안에서 출토된 것인데, 1964년 도굴꾼에 의해 도굴되었다가 1966년 회수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찰주본기’는 금동 방형의 사리내함의 4면 가운데 전면의 문비(門扉) 내외를 제외한 3면판의 내면과 외면 모두 6개면에 쌍구체(雙鉤體)로 음각된 것으로 현재 해독할 수 있는 글자는 900여자이다. 이 자료의 발굴로 인해서 ‘삼국유사’ 기록의 신뢰도가 재삼 확인되었다. 먼저 ‘찰주본기’의 해당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자장은) 선덕대왕이 즉위한지 7년째 되는 당 정관(貞觀) 12년 우리나라 인평(仁平) 5년 무술년에 우리나라의 사신 신통(神通)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 선덕여왕 12년 계묘년에 신라에 돌아오려고 하여 종남산(終南山)의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 머리 조아려 사직하니, 선사가 ‘내가 관심(觀心)으로 그대의 나라를 보매, 황룡사에 9층의 탑을 세우면 해동의 여러 나라가 모두 그대의 나라에 항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신라에) 돌아와서 나라에 알렸다. 이에 감군(監君)인 이간(伊干, 伊湌의 다른 이름) 용수(龍樹)와 대장(大匠)인 백제의 아비(阿非) 등에게 명하여 소장(小匠) 200인을 거느리고 이 탑을 만들게 하였다. 선덕여왕 14년 을묘에 처음 건립하기 시작하여 4월에 (2자 결락) 찰주를 세우고 이듬해에 모두 마치었다. (탑의) 철반(鐵盤) 이상은 높이가 7보(步)이고, 그 이하는 높이가 30보 3척이다. 과연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한 국가로 만들고) 군신이 안락한 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에 힘입은 것이다.”

이상 인용한 ‘찰주본기’의 내용은 9층목탑의 조성과정을 간명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전해주고 있어서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믿을 수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장은 선덕여왕 7년(638) 당에 유학을 갔으며, 종남산의 원향선사가 자장에게 신라에 돌아가서 9층탑을 조성하면 해동의 여러 나라가 항복할 것이라고 권유하였다. 그리고 12년(643) 자장은 귀국한 뒤에 원향선사의 말로써 9층탑 조성을 건의하였다. 그에 따라 공사의 감독으로는 용수, 대장은 아비, 그리고 그들의 인솔하에 소장 200인이 참여하여 선덕여왕 14년(645)에 공사를 시작하여 다음해에 마쳤다. 그리고 9층탑의 규모는 완성된 탑의 높이가 탑신부는 183척(또는 30步3척), 상륜부는 42척(또는 7步)으로 합계 225척이었다. 이것을 현재 사용하는 미터 단위로 환산하면 신라가 어떤 척을 사용하였는지에 따라 높이 계산에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준다. 후한척(약 23.7cm)과 당대척(약 29.7cm)으로 환산하면 각각 53.32m나 66.82m가 된다. 그런데 9층탑을 조성한 장인 아비가 백제인이었으므로 당시 백제에서 사용한 당대척이 기준이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황룡사9층탑조에서도 대체적으로 같은 사실을 전하고 있으나, 약간의 다른 내용이 없지 않다. 또한 설화적인 형태의 내용 부분은 다른 각도에서 의미를 해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황룡사9층탑조는 ‘찰주본기’의 내용과 9층탑 조성의 의의을 상당히 보완하게 될 것이다. 황룡사9층탑조의 내용을 문단으로 나누어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신라 제27대 선덕왕 즉위 5년인 정관 10년 병신(636) 자장법사가 서쪽으로 유학가서 오대산(五臺山)에서 문수보살에게 감화되어 불법을 전수받았는데, 문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 나라 왕은 천축(天竺, 인도)의 찰리종(刹利種, 인도의 왕족인 kṣatriya)의 왕인데, 이미 부처님의 수기(佛記)를 받았기 때문에 특별한 인연이 있어 동이(東夷) 공공(共工)의 종족과는 다르다. (그러나) 산천이 험준한 탓에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사나워서 사견(邪見)을 많이 믿어 때때로 천신(天神)이 재앙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법문(法文)을 많이 들어 알고 있는 비구(多聞比丘)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君臣)이 편안하고 모든 백성이 화평하다’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문수보살은 이내 보이지 않았다. 자장법사는 이것이 대성의 변화임을 알고 슬피 울면서 물러났다.” 

이 문단에서 우선 주목되는 사실은 자장이 당에 유학을 떠났던 시기의 차이이다. 앞에 인용한 ‘찰주본기’에서는 선덕여왕 7년(638) 당에 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속고승전(續高僧傳)’ 권24 자장전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런데 ‘삼국유사’황룡사9층탑조에서는 그 2년 앞선 선덕여왕 5년(636)으로 기록되었으며, 그밖에 같은 ‘삼국유사’의 5만진신조와 자장정률조, 그리고 ‘삼국사기’선덕왕조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런데 ‘찰주본기’는 신라 당대의 자료이고, ‘속고승전’자장전은 중국에서의 자장의 행적을 가장 정확하게 전해주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선덕여왕 7년(638)의 유학설이 더 정확한 것으로 본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97호 / 2019년 7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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