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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미르 티무르

지중해부터 중국 신장까지 대제국 건설했던 우즈벡 영웅

우즈베키스탄 제2도시 사마르칸트
12세기 몽골 군대에 완전히 파괴
현재 도시는 티무르왕조 때 재건

티무르, 왕좌 오르자 대외정복 착수
공략한 도시는 가차 없이 폐허로
30년 정복전쟁 결과 대제국 건설

사마르칸트, 돔 건축·청색으로 장식
멈춰선 실크로드 오아시스 육로 복원
몽골 침략에 무너진 이슬람 재건도

구소련 역사 지우고 티무르로 대체
주요도시 동상 세워 영웅으로 대접
티무르 고향 샤흐리샵스는 성지로

샤흐리샵스 중심 광장에는 티무르의 거대한 청동 동상과 함께 티무르 당시 건립된 ‘악 사라이’라는 궁전의 일부가 남아 있다. 티무르에 대한 현재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대변하듯 이곳은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사마르칸트는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로 공업과 문화의 중심지다. 자랍샨강의 계곡과 구릉에 걸쳐 조성된 이 도시를 옛 문헌은 ‘동방의 낙원’ ‘황금의 도시’ ‘중앙아시아의 로마’로 기록하고 있다. 자랍샨강은 ‘황금을 뿌리는 강’이라는 뜻으로 일 년 내내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사막 지역에서 이곳이 얼마나 중요했었는지를 말해준다.

실크로드 중심도시 사마르칸트는 고대 호레즘 시대부터 ‘마라칸타’로 널리 알려졌고, 중국에서는 ‘강국(康國)’이라고 불렀다. 629년 당나라 수도 장안을 출발해 인도로 향했던 현장 스님도 기록을 통해 사마르칸트를 소개했다. 스님은 이 도시국가의 영역이 600~700km에 달하고, 견고한 도성의 성벽 둘레가 8km가 넘는다고 전했다. 또한 주민의 숫자가 많고 물품을 만드는 기교가 뛰어나며 여러 나라의 진귀한 보물이 가득한 곳이라고 했다. 특히 땅이 기름져 곡식이 잘 자라고, 좋은 말(馬)이 난다고 했다.

현재의 수도 타슈켄트의 티무르 기마상.
과거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의 티무르 좌상. 

현장 스님에 이어 8세기 이곳을 지난 혜초 스님은 ‘왕오천축국전’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나라에는 왕은 있으나 대식(아랍)의 관할 아래 있다. 나라가 협소하고 군사도 적어 능히 스스로 나라를 지키지 못한다. 천교(조로아스터교)를 섬기며 불법은 알지 못한다. 강국에는 유독 절이 하나 있고 스님도 한 명 있는데, 그 또한 불법을 이해하지 못하며 공경하지도 않는다.’ 현장 스님이 이곳을 지날 당시는 이미 불교는 쇠락한지 오래고 종교의 중심이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옮겨가던 때였다. 그러나 강국 출신의 스님들이 중국에 와 역경에 참여한 역사적 사실로 보아 분명 혜초 스님 이전에는 이 지역에도 불교가 크게 융성했을 것이다.

어찌됐든 사마르칸트는 1220년 칭기즈칸 군대에 의해 도시 전체가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실크로드의 교역기지로 크게 번창했다. 현재의 도시는 티무르왕조 이후 옛 도시가 위치했던 아프라시압 언덕 아래 재건한 것이다. 14세기 전반에 걸쳐 중앙아시아를 지배한 아미르 티무르(1336~1405)는 파괴된 사마르칸트를 다시 일으켜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사마르칸트를 이야기하면서 티무르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사실 티무르는 우즈베키스탄 역사 속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다양한 민족이 패권을 다툰 우즈베키스탄은 앞선 왕조의 역사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91년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티무르는 우즈베키스탄의 영웅으로 다시 깨어나게 된다. 그는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30년간의 정복전쟁을 벌여 지금의 지중해 지역부터 서아시아, 인도, 중국, 러시아 일부를 포함한 대제국을 건설했다. 또한 몽골의 침략으로 무너진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을 복원한 인물이다. 신생 독립국 우즈베키스탄으로서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티무르만한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우즈베키스탄은 과거 소련의 역사를 지우고 그 자리에 티무르를 새겨 넣었으며, 우즈베키스탄 국민들 역시 티무르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그를 국부로 대접하고 있다.

티무르는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진 샤흐리샵스의 한 몽골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녹색의 도시라는 뜻의 이 자그마한 도시는 원래 ‘케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지금의 샤흐리샵스는 깨끗하고 반듯한 전형적인 계획도시의 모습이다. 이곳의 중심 광장에는 티무르의 거대한 청동 동상과 함께 티무르 당시 건립된 ‘악 사라이’라는 궁전의 일부가 남아 있다. 티무르에 대한 현재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대변하듯 이곳은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결혼이나 축하할 일이 있으면 멀리서도 찾아와 축복을 기원하는 등 티무르의 고향 샤흐리샵스는 그들의 성지로 정착됐다.

어린 시절 티무르는 유목민과 목축민이 함께하는 사회에서 이슬람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당시 케슈는 티무르의 삼촌 호자 바를라스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도시는 활기로 가득했다. 티무르는 삼촌을 비롯한 봉건영주들의 지원 속에 전사로 성장했고, 여러 세력들 사이를 줄타기하며 자신의 기반을 구축해 갔다. 기록에 따르면 티무르는 상전에 대한 모반을 다반사로 꾀하고 결맹한 의형제를 모살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그는 33살 되던 1369년 제국의 대권을 거머쥐게 된다.

티무르는 왕좌에 올랐지만 스스로 ‘칸’이라 칭하지 못했다. 당시는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이 아니면 칸이라는 칭호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미르 티무르의 ‘아미르’는 사령관, 총독을 의미한다. 티무르는 훗날 칭기즈칸의 후손으로 남편을 잃은 영주의 부인을 아내로 맞이해 칸의 후계자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티무르의 궁전 ‘악 사라이’. 아치 모양의 이 정문은 원래 높이가 50m 이상이었으나 지금은 38m만 남았다.

사마르칸트에 제국의 기반을 마련한 티무르는 강력한 친위부대를 꾸려 대외정복에 나섰다. 그는 정복전쟁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1380년 호레즘 병합을 시작으로 1393년 자라일 왕조의 군주 아마드를 바그다드에서 몰아냈다. 1395년에는 킵차크 칸국(오늘날의 카스피해와 흑해 및 유럽 동북부)의 토크타미시를 크게 격파해 모스크바 인근까지 진군했다. 1397년 인도를 공격해 델리를 점령했으며, 곧바로 신장 위그루 지역의 차가타이 칸국도 함락시켰다. 1402년 터키와의 전쟁에서는 술탄 바야제드와를 앙카라 인근에서 포로로 잡기도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티무르의 정복 이후 터키가 동유럽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됐다는 점이다. 티무르는 30여년의 정복전쟁 결과 서쪽으로 소아시아와 시리아의 지중해 동안에서부터 동쪽으로 차가타이 칸국과 북인도, 북쪽으로 카프카즈와 킵차크 칸국을 아우르는 새로운 대제국의 주인이 된다.

정복전쟁에 나설 즈음, 티무르의 고향 샤흐리샵스에서는 ‘악 사라이’ 건립이 시작됐다. 티무르가 세상을 정복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고자 만든 크고 화려한 궁전이었다. 악은 ‘백색’, 사라이는 ‘숙소’의 의미로 직역하면 ‘백색의 숙소’가 된다. 하지만 티무르가 머물 공간이었으니 ‘백색의 궁전’으로 보면 될 듯하다. 백색의 궁전이라는 명칭과 달리 악 사라이는 푸른색과 황금색 타일로 지어졌다.

안타깝게도 악 사라이는 현재 궁전의 일부만 남아 있다. 아치 모양의 정문은 원래 그 높이가 50m가 넘었다지만 지금은 38m만 남았다. 기둥에는 “누가 내 힘을 의심하면 내가 지은 이 궁전을 보여주라”는 티무르의 호기어린 한 마디가 아랍어로 새겨져 있다. 이 화려한 유적에는 끔찍했던 역사의 단면도 전해진다. 아치문의 동쪽 원주에는 아랍어로 ‘술탄은 알라의 그림자다’라고 쓰인 반면, 서쪽 원주에는 ‘술탄은 그림자다’라고 새겨져 있다. 건축가의 실수였을까. 이로 인해 건축가는 산채로 포대에 담겨 정문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던지는 극형에 처해졌다.

티무르 원정 과정은 살육과 파괴 그 자체였다. 페르시아 타크리트 성채를 공격할 때는 적병을 모조리 살해 후 머리를 잘라 피라미드처럼 쌓아올렸고, 호라산 점령 때는 연와와 석회 속에 사람을 생매장해 성벽을 쌓았다.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등 일단 공략한 도시는 가차 없이 폐허로 만들었다. 1405년 2월, 그는 70세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 목표인 중국 명나라 정벌을 위해 출병한다. 그러나 얼마 후 시르다리야 강변 오트라르에서 갑작스레 사망해 티무르제국의 정복전쟁도 막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티무르가 사망한 해 샤흐리샵스의 악 사라이가 완공됐다.

티무르의 고향 샤흐리샵스는 현재 전형적인 계획도시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살육과 파괴가 티무르를 설명하는 전부는 아니다. 티무르 지배 시기 중앙아시아는 내분과 내란이 사라지고 하나의 통합된 정치체제가 정착했다. 특히 실크로드에 큰 관심을 가진 티무르는 대상들을 위한 숙소와 보호소를 곳곳에 설치했고 무역 활동도 장려했다. 티무르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지중해에서 이란, 사마르칸트, 탈라스를 경유해 몽골에 이르는 동서 대상로가 원활히 소통될 수 있도록 적극 보호했다. 몽골의 멸망으로 멈춰 섰던 실크로드 오아시스 육로가 그 기능을 회복한 것은 티무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다른 문화를 수용하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정복지의 우수한 건축가나 기술자, 장인들을 우대했고, 수도 사마르칸트로 불러들여 당시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 중 하나로 건설했다. 특히 시리아 등지서 유행했던 돔 건축양식을 받아들여 자신이 좋아했던 청색으로 장엄토록 했다. 그로 인해 사마르칸트는 ‘푸른 도시’ ‘이슬람 세계의 보석’ ‘동방의 진주’라는 찬사를 받게 됐다.

칭기즈칸의 어린 시절 이름인 ‘테무친’은 강철을 의미한다. 제2의 칭기즈칸을 꿈꾸었던 ‘티무르’란 이름도 이슬람어로 강철을 뜻한다. 우즈베키스탄은 3개 지역에 거대한 청동 동상으로 14세기 세계를 호령했던 사령관 티무르를 기리고 있다. 고향 샤흐리샵스의 입상,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의 좌상, 현재의 수도 타슈켄트의 기마상은 과거 티무르제국의 영광이 지금 이곳에서 재현되기를 바라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간절함이 담긴 또 다른 표현이다.

meopit@beopbo.com

 

 

 

 

[1498호 / 2019년 7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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