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8. 일합상자

이 세상 모든 것 모아놓은 ‘일합상자’는 없다

철학자 프레게 집합론에 심혈
러셀의 ‘모순’ 질문 받고 입원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일부분
금강경도 ‘일합상자’는 부정

수학에는 집합이라는 개념이 있다. 집합은 대상들의 모임이다. 현대 논리학과 분석철학의 창시자 프레게(Gottlob Frege 1848~1925)는 수학 기초론에 천착하여 집합론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어느 날 러셀이 물었다.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것들을 다 모아놓은 것을 S라 하면, S는 자신의 원소인가 아닌가? 만약 그렇다고 하면 (즉 S가 자신의 원소라고 하면은) S는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므로 ‘S는 S의 원소가 되지 않아’ 모순이 생기고,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즉 S가 S의 원소가 아니라고 하면은) S는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므로 ‘S는 S의 원소가 되어’ 모순이 생긴다. 이처럼, S는 자신을 원소로 갖는다 해도 모순이고, 자신을 원소로 안 갖는다 해도 모순이다.” 

프레게는 러셀로부터 이 질문을 편지로 받고 놀라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그로서는 이 역설(逆說)을 해결할 길이 없었다. S의 원소의 예로서는 거북이가 아닌 것들의 집합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분명히 거북이가 아니므로 S에 속한다. (쉽게 말해서 책가방은 책이 아니라는 소리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모아놓은 것을 T라 하자. T는 물질이건 비(非)물질이건, 개념이건 단어이건, 모두 모아놓은 것이다. 이런 T는 존재할까? 이게 존재한다면 T 중에서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것들을 모아 S라 하자. 그럼 S는 S의 원소일까?, 아닐까? 어느 경우나 위와 같은 모순이 생긴다.

그러므로 일합상자(一合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걸 ‘금강경’은 ‘世尊 如來所說 三千大千世界 卽非世界 是名世界. 何以故 若世界 實有者 卽是一合相. 如來說一合相 卽非一合相 是名一合相. 須菩提 一合相者 卽是不可說 但凡夫之人 貪着其事’라고 노래 부른다.

우리의 언어와 개념은 불완전하다. 개념은 무얼 가리키는지 엄밀한 의미에서는 불명확하다. 어떤 걸 가리키려면 그것의 모든 성질을 다 알아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하다. 사과와 모든 게 같은데 한 가지 성질만 다른 과일이 있다고 하자. 이것은 사과일까? 아닐까? 정해진 몇 가지 성질만 같으면 우린 그걸 사과라고 친다. 하지만 그 몇 만 일치하고 다른 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심지어 외관만 일치하고 중요한 성질은 다를 수 있다. 

태즈메이니안 늑대는 생긴 것은 늑대이지만 사실은 캥거루이다. 육아낭(育兒囊)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전적으로 캥거루에 더 가깝다. 이는 물론 고대인들처럼 유전자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이다(수렴진화[收斂進化]의 예이다. 수렴진화란 서로 다른 유전자를 가진 생물들이 비슷한 외관으로 진화하는 걸 말한다). 오리너구리는 오리인가? 너구리인가? 우리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을 만날 때, 우리 옛 언어·개념·사고가 무너진다. 우리의 언어·개념·사고는 진화한다.

우리가 A라고 하는 것은, A의 ‘모든’ 성질을 알고 그 모든 성질을 만족시키는 걸 A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 또는 ‘몇 개’의 성질만 만족시키는 걸 A라고 할 뿐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A라는 사람이 A인지는 알 길이 없다. 외관 목소리 성격이 같아 보여도 (우리 감각으로는 구분할 수 없이 미세하게 다른) 아주 비슷한 사람인지 어떻게 알까? 고등 외계인이 그리 창조하면 둘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둘이 같은 사람이라는 증명은 불가능하다. 동물들은 암내를 풍기는 마네킹을 보면 암컷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교미를 시도한다. 모양만 비슷해도 그런다. 말과 돼지는 기계체조 도마같이 생긴 물건에 올라탄다.

심지어 자기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자기도 자기가 아닐 수 있다. 자기가 자기를 인식할 때도 유한개의 기준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자기 몸을 자기 몸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고(자기 몸을 자른다), 자기 마음이 자기 마음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다(자살한다).

이 세상의 유형무형 모든 걸 모아 놓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합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합상자가 이 세상의 유형무형, 물질, 정신 등 모든 걸 모아 놓은 것이라면,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98호 / 2019년 7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