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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법성게’ 제27구: “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기자명 해주 스님

다라니는 모든 것을 다 지닌 총지이므로 곧 다함없는 보배 

다라니는 한량없는 의미 지녀 
모든 선법 지니고 악법 막아줘
다라니는 진실한 말의 뜻 
 
다라니는 일승의 연기법
보문다라니는 비로자나불 본행

다라니는 해탈로 인도하고 
또한 그 자체로 해탈경계

다라니의 보배 창고를 
육상의 도리로 열게 되면
바로 무진보배를 얻게 돼

‘법성게’ 의 마지막 네 구절은 수행자의 이익얻음[得利益]을 밝힌 부분이다. 그 처음은 “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이니 ‘법성게’ 제27구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로써”로 시작되고 있다. 

다함없는 보배[無盡寶]로 표현된 다라니(dharani)는 총지(總持), 능지(能持), 능차(能遮) 등으로 번역된다. 다라니는 한량없는 의미를 다 지니고 있어서, 모든 선법을 능히 지니고 악법을 능히 막아준다는 뜻이다. 또 이 다라니는 진실한 말이라는 의미에서 진언(眞言)으로 통용된다. 그런데 진언은 보통 다라니보다 좀 짧은 구절이며 신비스런 주(呪)로도 불린다. 

‘화엄경’에서 설하고 있는 다라니 법문을 보면, 먼저 비로자나불의 본행에 보문다라니(普門陀羅尼)가 있다. 대위광태자가 증득한 십종 법문 가운데 두 번째가 일체불법보문다라니이다.(비로자나품)

‘이세간품’에는 다음의 열 가지 다라니가 설해져 있다. ①문지(聞持) 다라니이니, 일체 법을 지니어 잊어버리지 않는 까닭이다. ②수행(修行) 다라니이니, 실답고 교묘하게 일체 법을 관하는 까닭이다. ③사유(思惟) 다라니이니, 일체 모든 법성(法性)을 요달해 아는 까닭이다. ④법광명(法光明) 다라니이니, 부사의한 모든 부처님 법을 비추는 까닭이다. ⑤삼매(三昧) 다라니이니, 널리 현재의 일체 부처님에게서 들은 정법에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 까닭이다. ⑥원음(圓音) 다라니이니, 부사의한 음성과 말[語言]을 아는 까닭이다. ⑦삼세(三世) 다라니이니, 삼세의 불가사의한 모든 불법을 연설하는 까닭이다. ⑧종종변재(種種辯才) 다라니이니, 가없는 모든 불법을 연설하는 까닭이다. ⑨출생무애이(出生無礙耳) 다라니이니, 말할 수 없는 부처님이 설하신 법을 다 들을 수 있는 까닭이다. ⑩일체불법(一切佛法) 다라니이니, 여래의 힘에 안주하여 두려움이 없는 까닭이다. 

이 열 가지 다라니는 수행·사유·법광명·일체불법 다라니와 나머지 여섯 다라니의 둘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는 일체 법을 관하고 법성을 요달하고 불법을 비추고 여래의 힘에 안주하여 두려움이 없는 경계이다. 후자는 설법과 청법에 모두 직접 연관되어 있다. 특히 원음다라니는 미가장자가 총지법을 깨달아 얻은 묘음(妙音)다라니 법문(文殊指南圖讚)을 연상시킨다. 

‘화엄경’에서는 또한 다라니가 해탈로 인도하고, 그 자체가 해탈경계임을 설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가애락보조(可愛樂普照) 대자재천왕은 보문다라니 바다에서 유출된 해탈문을 얻고, 총지대광명(總持大光明) 시분천왕은 다라니문(陀羅尼門)의 광명으로 일체 법을 기억해 지니어 잊어버림이 없는 해탈문을 얻었다.(세주묘엄품) 

자행동녀 선지식은 반야바라밀 보장엄법문(般若波羅蜜普莊嚴法門)에 들어갔을 때, 보문다라니 등 한량없는 다라니문을 얻었다. 말하자면 불찰(佛刹)다라니문·불(佛)다라니문·법다라니문·중생다라니문·과거다라니문·미래다라니문·현재다라니문 내지 자심청정(自心淸淨)다라니문의 118가지 다라니문 등이다.(입법계품) 

이처럼 다라니는 의보와 정보, 삼보와 중생, 시간과 공간 등, 일체를 다 지니고 있는 총지이며, 일체 불법을 지니게 하고 불세계를 장엄하고 있다. 

의상 스님도 ‘일승법계도’에서 ‘다라니’를 10여 차례 언급하고 있다. 이를 의미상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자.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국보 제67호.

첫째, 다라니는 일승의 연기법이다. 이 점은 연기다라니법(緣起陀羅尼法)· 대연기다라니법(大緣起陀羅尼法)·연기실상다라니법(緣起實相陀羅尼法)·일승다라니대연기법(一乘陀羅尼大緣起法) 등으로 다라니를 부르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둘째, 다라니법을 연기무분별의 육상 도리로 설명한다. 이 도리로써 다라니법이 주반상성(主伴相成)하고, 한 법 듦을 따라서 일체를 다 포섭함을 보이고 있다. 만약 모임(會)을 기준으로 설하면 모임·모임 가운데 일체를 다 거두고, 품(品)을 기준으로 설하면 품·품이 일체를 다 포섭하며, 내지 문장을 기준으로 설하면 문장·문장과 구절·구절이 일체를 다 포섭한다. 만약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다라니의 법이 으레 그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상 스님은 육상이 법성가에 들어가는 중요한 문이고, 다라니의 창고[陀羅尼藏]를 여는 좋은 열쇠라고 한다. 오직 일승다라니의 대연기법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셋째, 연기다라니법을 육문(六門)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 가운데 연기의 체를 곧 일승의 다라니법이라 하고, 상입과 상즉을 ‘다라니의 이용’으로 명명하고 있다.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인, 걸림 없는 법계의 법인 것이다. 또 사(事)에 즉하여 법을 포섭하는 문으로는 인다라니(因陁羅尼)와 미세다라니로 나타나고 있다.

넷째, 화엄행자가 돌아가 머무르는 법계를 법계다라니가라고 부른다. 깨달은 성자가 머무르고 교화를 펼 법성진공의 법계를 인다라가와 미세가 등으로 보이고도 있다. 십현연기문의 인드라망경계문과 미세상용안립문 등이 법계에 들어가는 요문이면서, 인드라와 미세 등이 곧 법계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끝으로 다섯째, “이다라니무진보”에서 다라니는 총지(總持)인 까닭이니 수십전법(數十錢法)의 설과 같다고 한다. 

의상 스님은 상입과 상즉인 중즉(中卽)의 연기법을 수십전유로 설명하고 있으니, 수십전유 역시 연기실상다라니법을 관찰하는 방편이다. “만약 연기실상다라니법을 관하고자 한다면 먼저 마땅히 수십전법을 깨달아야 한다”라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수십전유에서 일전 가운데 십전이고 일전이 곧 십전인 이유는 대연기다라니법이 연성(緣成)인 까닭이다. 만약 하나가 없으면 일체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하나는 자성의 하나가 아니고 연성인 까닭에 하나이며, 내지 열은 자성의 열이 아니고 연성인 까닭에 열이라서, 일중십(一中十)이고 일즉십(一卽十)이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의상 스님은 다라니를 일단 연기법으로 보았다. 법성가로 돌아가고 법계가에 들어가는 방편에 비중을 둔 것이다. 그래서 연담(蓮潭) 화상은 이 구절 역시 닦음[修]을 밝힌 것이고, 마지막 두 구절이 증득[證]을 밝힌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인(因) 가운데서 보리분의 자량을 닦기 때문이라 간주된다.(원통기)

그러나 다라니 무진보로써 법계를 장엄하는 것이 법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법계 밖에서 하는 일이 아니라, 법계 안에서 법계를 장엄하는 것이니, 이 구절을 ‘득이익’으로 분과한 것이라 하겠다. 

‘법융기’에서는 ‘다라니’란 법계 법이 다함없다는 뜻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법이기 때문에 다함없기도 하지만, 다만 하나의 법을 기준으로 해서도 다함없다고 한다. 하나 가운데 무진이고 하나가 곧 무진이기 때문이다. 법융 스님은 또 다음과 같이 법계의 집을 설명하고 있다.

택(宅)은 증분이고 사(舍)는 연기분이다. 법계다라니가는 이(理)이고 인다라니와 미세가 등은 사(事)이다. 말하자면 한 법이 법계를 온전히 거두어 옆이 없고[無側] 남김이 없는 것은 법계다라니이다. 낱낱 법과 법이 거듭거듭 서로 거두어 다함없고 다함없는 것은 인다라니이다. 한 법 가운데 일체 모든 법이 머리가 가지런하여 나란히 나타나는 것은 미세이다. 

그래서 ‘대기’에서는 행자가 집에 돌아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신심의 손으로 중즉(中卽)의 다라니끈을 잘 잡아 지녀서 잃어버리지 말고 자량을 삼도록 당부한다. 다라니끈의 다른 한끝인 진성이 법성보배 처소에 연결되어 있어서 부지런히 정진하면 반드시 바로 자기의 법성보배 처소에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다라니끈의 한끝은 수행방편의 연기분이고 다른 한끝이 연결되어 필경에 도달되는 법성가는 증분의 법계다라니가이다. 무주별교의 연기분 즉 교분으로는 인다라니가와 미세가 등이라 일컬어진다. 법성진공도 증분의 법성가이면서 연결되는 다라니의 측면에서 보면 교분에도 통한다. 연기분의 십현문 역시 스스로 증득하면 증분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이와 같이 다라니는 모든 것을 다 지니므로 곧 무진 보배가 된다. 그러면 다라니장인 이 보배 창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법계도주’에서는 이 보배 창고가 부처님 세계에도 있지 않고 중생 세계에도 있지 않으며, 청정한 세계에도 있지 않고 물든 세계에도 있지 않다고 역설한다. 그러면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인가? 설잠 스님은 이어서 보배창고가 낱낱이 두렷이 밝고 낱낱이 교섭하여 사무쳐 있다고 한다. 총지 법계의 다함없는 오묘한 보배는 십이시 24시간 동안 늘 볼 수 있다. 매일 소리를 듣고 색을 보고 역순 경계에 부딪히는 것이니, 다른 데서 얻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 

이처럼 다라니의 무진보배 창고를 육상의 도리로 열면, 늘상 보고 듣고 만나는 모든 것에서 바로 무진 보배를 얻을 수 있다. 또 보리심으로 대지혜의 눈을 뜨면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바로 안으로 증득한 법성가에 들어가 자기 집의 무진장한 보배를 수용하게 되니, “이다라니무진보”로 이를 말해준다고 하겠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98호 / 2019년 7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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