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샨티데바의 보리심
14. 샨티데바의 보리심
  • 고명석
  • 승인 2019.07.23 09:38
  • 호수 149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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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자의 물, 굶주린 자의 밥으로 살겠습니다”

용수보살 잇는 중관파 적천 스님
‘고요하고 평화롭다’는 뜻의 한자
날란다대학서 ‘입보리행론’ 노래
남의 고통 껴안는 마음·실천 강조
라다크 라마유루곰파의 초르덴 아래서 라다키 여인이 탑돌이하며 마니차를 돌리고 있다.법보신문 자료사진
라다크 라마유루곰파의 초르덴 아래서 라다키 여인이 탑돌이하며 마니차를 돌리고 있다.법보신문 자료사진

티베트 사람들은 비록 삶이 궁핍할지라도 자비롭고 친절하며 평화롭다. 어느 토론회에서 한 발표자의 말을 들었다. 다람살라에 2년 정도 머물 때 티베트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는 한 번도 싸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인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많은 티베트 수행자들이 미국과 유럽사회에서 존경을 받으며 그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보리심을 일상생활에서 발원하고 실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보리심을 불교의 전면에 내세워 그 실천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티베트불교에 큰 영향을 끼치기까지는 샨티데바(Śāntideva)와 그의 원력이 작용한다.

샨티데바는 용수보살을 잇는 8세기경의 후기 중관파 계열 스님이다. 한문으로는 적천(寂天)이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신이라는 의미다. 그는 오늘날 구자라트 주에 해당하는 인도 남중부 해변 사우라스트라국의 왕자로 태어난다. 문수보살의 인연으로 출가수행의 길을 가며 나란다대학에 머문다. 거기서 그는 표면적으로 게으르고 무위도식하는 삶을 살지만, 내면세계는 웅장하고 종교적이었다. 어느 날 송경법회 때 그는 보리심과 공성, 그 종교적 영성을 새롭게, 비장하게, 감동적으로 노래한다. 그것이 그의 유명한 저서 중 하나로 꼽히는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이다.

이 논서는 티베트불교와 달라이라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주요 내용은 보리심을 발하고 행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보살의 길인 육바라밀을 보리심으로 꿰어내 감동어린 시어로 노래한다. 그 보리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요 타자의 고통과 슬픔에 깨어 있는 마음이다. 모든 존재들과 함께 고통에서 해탈의 세계로 나가는 푸르고 따뜻한 마음이다. 그래서 보리심이란 허공과 같고, 대지와 바람, 바다와 같으며, 감로수, 줄지 않는 재산, 마음의 달, 푸른 나무라 했다. 그것은 행복의 원천이고, 무서운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모든 죄를 소멸시킨다. 

“세상의 다른 선업은 파초와 같이/ 열매를 맺고 나면 시들지만// 보리심의 나무는 항상 푸르러/ 끊임없이 열매 맺고 시들지 않으며 잘 커나갑니다.(청전 스님 번역, ‘입보리행론’)”

보리심은 크게 ‘원(願) 보리심’과 ‘행(行) 보리심’ 두 가지로 나뉜다. 보리심을 발하는 ‘원 보리심’은 매일 삼보에 대한 예경, 그리고 모든 존재를 고통에서 구제 하겠다는 대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극진한 마음으로 매일 예경하고 발원하면, 보리심이 깨어 나오기 마련이다. ‘자애경’이나 사무량심, 사홍서원 그 밖에 자비심을 일깨우는 여러 경전 구절들 중에서 하나를 택해서 독송하며 발원을 올리면 된다. 

보리심을 실천하는 ‘행 보리심’은 육바라밀이나 십바라밀, 사섭법 등 보살행을 삶에서 구현해내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자신을 비워내는 수행 과정이기도 하다. 보리심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나와 타자를, 나와 모든 존재를 둘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로 무아와 공성의 체득이다. 이와 관련하여 ‘입보리행론’에서는 나와 남이 같음을 수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몸에) 손발 등 여러 부분이 있지만/온전히 보호해야 할 하나의 몸인 것처럼// 세상의 고락 안에 다른 중생이 있지만/모두가 나와 같이 행복을 원하는 것은 똑같다.”(위의 책)

내 몸 안에 있는 100조개의 세포 하나하나에도 마음이 있다. 이들이 서로 협력하고 나누며 조화를 이룰 때 몸이 건강하다. 세포 속에 있는 유전자 역시 협력하는 유전자 풀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그 개체는 훌륭하게 살아남는다. 리처드 도킨스의 말이다. 우리 몸에는 이렇게 서로 다른 유전자와 세포가 어우러져 한 몸을 형성한다. 나 자체가 이미 생명의 공동체인 것이다. 모든 존재의 진화과정은 이기적 유전자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산물이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초이기적 유전자, 자기만 아는 유전자, 그리고 이기적인 세포는 결국 스스로를 궤멸시키고 만다. 이는 도킨스를 비롯한 현대 생물학자들이 한결 같이 강조하는 내용이다. 자크 데리다 역시 자기 보호적 담론과 체계, 자신만의 이익으로 폐쇄된 사회, 패권주의 사회는 자신을 파괴하는, 자기 공격적인 자가 면역성에 떨어지고 만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이기적 욕망은 결국 자기 파멸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한 식구라는 인식, 나와 타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 너로 인해 내가 존재한다는 상호성,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종이자 주인이라고 여겨야 한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은 목적 그 자체로 실존하고 있으며 결코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목적의 왕국을 강조했다. 그의 말대로 인간의 존엄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다. 인간의 생명과 권리는 수단이나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타자도 자기 목적을 가진 숭고한 존재로 받아들여야 한다. 타자의 인격 또한 거룩하다. 나와 타자의 상호성에 입각한 인격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시타니 게이지는 인격으로서의 자기 목적에서 벗어나 다른 모든 것의 수단이라는 입장으로 완전히 전환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타자 속에서 자기 목적을 보며, 스스로를 모든 것의 수단으로 여긴다. 이것이 진정한 자기 사랑이요 타자에 대한 사랑이다. 자신의 절대 부정 속에서 타자를 사랑하는 것, 그 자체가 자기 사랑이다. 진정한 평등도 불평등의 교환으로서 평등이다. 진정한 평등에서는 자타는 서로 절대적인 주인이면서 종의 위치에 동시에 선다. 이와 관련해 샨티데바는 서원한다.

“이 세상의 중생에게 병이 있는 한/ 병에서 완전히 나을 때까지// 저는 약과 의사와/ 그들의 간병자로 남기를 바라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의 비가 되어/ 굶주리고 목마른 자의 고통을 없애주며// 길고 긴 기근의 시절에도/ 제가 중생의 먹고 마실 것이 되게 하소서// 절망하고 가난한 중생에게/제가 다함없는 제물이 되고// 그들에게 필요한 도구가 되어/ 그들 곁에 항상 머물게 하소서 (입보리행론)”

진화심리학자 로버트 라이트는 인류가 현재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화의 원동력인 자연선택, 나만 특별하다는, 내가 중심이라는 자아 중심적 이기성을 버리고 명상의 힘으로 이기적 욕망을 다스리고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의에서 “나만 특별하다고 여기는 자연선택의 가치와 싸워서 이기고”, 다른 한편 자연선택이 시여해준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가치는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기에 이제부터라도 매일 아침 삼보님께 예경하고 나와 타자를 위해 보리심을 발하며 명상하는 삶을 기쁜 마음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의 불자들, 아니 모든 사람에게 남겨준 샨티데바의 발원이리라.

고명석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 kmss60@naver.com

 

[1498호 / 2019년 7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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