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복천암과 신미 스님
9. 복천암과 신미 스님
  • 임은호 기자
  • 승인 2019.07.31 11:18
  • 호수 1499
  •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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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창제 깊숙히 개입하고 불경 우리글 배포에도 적극 나서

집현전 실무책임자 모를 정도로
비밀리 추진됐던 한글창제 과정
‘존자' ‘우국이세' 담긴 법호 통해
신미 스님, 편찬 주도적 역할 추정

세종 승하 후 세조와도 인연 이어
번역과 왕을 위한 법문 설하기도
억불 속 불사 잇다 복천암서 입적
신미 스님은 복천암에 머무르며 한글을 편찬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후 세조도 신미 스님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1446년(세종 28) 반포된 한글은 조선의 극심한 불교탄압 속에서 탄생됐다. 한글 창제는 세종(1397~1450)과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부터 한글이 불교와 매우 관련이 깊고 특히 스님들이 한글 창제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논문이 지속적으로 발표되면서 한글창제와 관련된 불교의 역할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한글이 범자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으며, 108이나 33 등 불교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숫자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는 점을 들어 한글과 불교의 관계를 조명했다. 또한 한글창제 이후 유독 불교경전이 많이 번역됐다는 점 등에서 당시 범어에 탁월했을 뿐 아니라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춘 누군가가 한글창제에 깊숙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그리고 파편처럼 흩어진 여러 기록을 취합해 보면 신미(1405?~1480?)라는 스님이 가려진 베일을 벗고 모습을 드러낸다.

기록에 따르면 스님은 범어에 탁월했을 뿐 아니라 세종과 깊은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세종이 승하 직전, 유언으로 스님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법호를 친히 남겼다. 이는 세종이 오랜 세월 신미 스님을 진심으로 공경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존자’는 큰 공헌이나 덕이 있는 스님에게 내리는 칭호다. 더구나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祐國利世)’는 문구를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신미 스님이 나라에 큰 공적을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세종이 이토록 추앙했던 당대의 고승이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남겨진 기록은 인색하기만 하다. 간혹 나오는 기록에는 ‘간사한 스님(姦僧)’으로 내몰리기 일쑤다. 문종실록 2권에는 사대부들이 스님에 내려진 법호가 부당하다는 상소를 꾸준히 올렸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 전기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증거다.

조선왕조실록과 복천암 사적기 등에 드러난 신미 스님은 이러한 억불숭유의 시대에도 백성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자신의 공덕은 한없이 낮추는 삶을 살았다. 신미 스님은 영동지방 양반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조부에게 한학을 배운 스님은 10대 후반 조선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하면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해 관직을 맡고 있던 부친 김훈이 충효(忠孝)를 다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는 사건이 벌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재산을 몰수당하는 상황에 이르자 신미 스님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아버지를 향한 성균관 유생들이 수군거림에 바깥출입도 자유롭지 않았고 관직에도 나갈 수 없게 되자 번민은 더욱 깊어졌다. 스님은 20살 무렵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해 출세간의 도를 닦는다. 그리고 20여년 후 경·율·론 삼학에 두루 능통한 최고의 학승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복천암 인근 산길에 조성된 신미대사부도탑(보물 제1416호).

당시 세종은 어려운 한자와 달리 백성들이 쓰고 읽기 쉬운 문자를 만들고자 오랫동안 노력했다. 하지만 실마리를 찾지 못해 난감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소리글자인 범어를 비롯한 범어와 티베트어에도 능통한 신미 스님을 알게 된다.

불교신자였던 세종은 산중에 머무르는 신미 스님을 궁궐로 불러 담소를 나눴다. 그리고 스님에 크게 감동했다. 스님의 말은 이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고 백성에 대한 애틋함은 어느 충신 못지않았다. 백성들이 누구나 글을 읽고 쓰기를 바랐던 세종은 “백성에게 널리 퍼진 불경을 우리글로 옮겨 배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며 신미 스님에게 한글 창제에 힘을 보태달라고 청한다.
신미 스님으로서도 반가운 청이었다. 불교가 전래된 지 1000년이 넘었지만 백성들은 미신과 기복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문을 익히지 못하면 부처님 가르침을 직접 읽는 일이 불가능했던 탓이다. 때문에 불경 언해는 불교를 신앙적인 측면뿐 아니라 사상적으로 민간에 깊이 뿌리내리는 일이었다. 신미 스님에게 번역은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이자 강력한 불교 대중화 운동이었다.

신미 스님은 속리산 복천암 등에 머무르며 4년에 걸쳐 모음·자음 소리글을 범어에서 참고해 28자를 기본으로 한글을 편찬하는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세종은 신하들과 자주 부딪혔다. 신하들은 세종의 숭불을 두고 끊임없이 간(諫) 하고 상소를 올렸다. 그럴 때면 세종은 “승려들도 나의 백성이다” “한·당 이래 역대 임금들이 부처를 섬기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나도 섬긴다”고 맞섰다.

사대부들의 견제 속에서 비밀리에 창제된 한글이 반포되자, 신미 스님은 본격적인 경전 한글화를 시작한다. 부처님 일대기를 다룬 우리나라 최초 한글 불서인 ‘석보상절’ 24권이 한글 반포 1년이 채 되지 않아 한문본과 언해본까지 완성됐다. 

세종실록 127권에 따르면 1450년(세종 32) 1월26일, 깊은 병세에서 기운을 회복한 세종은 내관을 시켜 복천암에 머무르는 신미 스님을 조용히 궁에 들게 했다. 삶의 마지막 회향을 앞두고 자신의 최대 과업이었던 한글창제에 헌신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신미 스님이 침전에 들자 세종은 큰 스승을 대하듯 스님을 극진히 모셨다. 감로수 같은 스님의 법문을 청해 들은 세종은 스님이 주석하던 속리산 복천암을 중창할 수 있도록 불사를 돕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승하 직전 유언으로 신미 스님에게 친히 법호를 남겼다.

세종이 승하한 뒤 신미 스님은 오랫동안 복천암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후학 지도에 전념했다. 신미 스님에게 복천암은 각별했다. 복천암이 비단 자신이 출가한 속리산 내 사찰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복천암은 한글이 시작된 곳, 세종과의 추억이 있는 곳이었다.
 

탁월한 불교지식과 언어능력, 그리고 고결한 인품을 바탕으로 기울어져가는 불교를 일으키고 백성들에게 희망을 전하려 애썼던 신미 스님의 진영.

세종이 내린 법호는 대신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문종은 대신들의 상소에 굴복해 법호에서 ‘존자’와 ‘우국이세’를 빼버렸다. 사실 신미 스님 본인에게 법호는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존자든 종사든 자신은 그저 신미일 따름이었다. 오히려 스님을 안타깝게 한 것은 선왕이 떠난 지 오래지 않았음에도 왕의 권위가 급격히 실추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스님은 옛 왕을 되새기며 복천암에서 세종의 위한 축원을 매일 올린 것으로 알려진다.

세종 승하 후 세간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이 되지 않아 승하하고 단종이 왕위를 이었다. 얼마 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1453년)을 일으켜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다. 한양에는 피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부터 신미 스님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자존심이 셌지만 신미 스님에게 깍듯했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신미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며 의지했다. 1457년(세조 3), 해인사 대장경 인출(印出) 책임을 맡아달라는 세조의 부탁을 받고 복천암에서 해인사에 내려간 스님은 대장경 50부를 성공적으로 인출한 뒤 불경 조성과 국역에도 적극 뛰어들었다. 스님은 세조 곁에서 경전과 선어록을 언해하는 틈틈이 왕을 위해 법문을 설했고 23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선종영가집’ ‘수심결’ ‘몽산’ 등 고승법어집을 번역하기도 했다.

스님이 복천암으로 돌아온 것은 ‘선종영가집’ 작업을 마친 1463년(세조 9) 11월이 다 되어서였다. 다음 해 세조는 피부병을 고친다는 이유로 복천암에 행차했다. 말은 피부병 때문이라지만, 사실 신미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신미 스님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세조는 이후 원각사를 중건하고 오대산 상원사 중창불사에도 힘을 쏟았다. 신미 스님은 세조가 승하하자 마지막까지 불사를 멈추지 않았던 세조를 위해 빈전에서 조용히 마지막 법석을 열었다고 전한다. 예종과 성종 대의 억불정책 속에서도 꾸준히 불사를 진행한 신미 스님은 1480년 무렵 복천암에서 적멸에 들었다.

한글 창제 후 15세기 말까지 간행된 현존 언해문헌은 모두 30여종으로, 이 가운데 불교 관련 언해서가 20여종에 이른다. 신미 스님이 없었다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상당수 한글문헌은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신미 스님은 쉬운 한글경전 간행과 사찰 불사 등으로 억불의 시대에도 불교가 민중 깊숙이 스며들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통해 백성들에게 희망을 전하려 애썼다.

세조가 신미 스님을 만나기 위해 복천암을 향해 걸었던 오솔길은 현재 ‘세조길’이 돼 국민 모두를 위한 산책길이 됐다. 소나무와 전나무가 우거진 속리산 숲길을 따라 4km 정도 경사길을 걸어 올라가면 복천암에 당도한다. 깎아지른 바위 위에 걸려 있는 듯한 복천암에는 신미 스님의 영정과 세종이 한글창제 보답으로 하사했다는 아미타 삼존불상 등이 남아있다.

뛰어난 어학 능력과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고결한 인품을 바탕으로 기울어져 가는 불교를 일으켜 백성들에게 희망을 전하려 애썼던 신미 스님. 스님은 한글 창제와 언해본 발간이 결코 자신의 공헌이 돼선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자신을 드러낼수록 한글에 대한 사대부들의 탄압과 저항이 커질 것이 분명했다.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신미 스님이 후세에 법어나 시, 글 한편 남기지 않고 적막한 생애를 마친 것도 이 때문이다. 

신미 스님은 제대로 된 기록하나 남기지 않고 조용히 세상을 하직했다. 복천암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500m 정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신미대사부도탑(보물 제1416호)만이 한글로 세상과 소통하려 했던 신미 스님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다.

보은=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499호 / 2019년 7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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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최고-- 2019-08-09 01:3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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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역사왜곡 가장 많이 하는 사람들 보시요 2019-08-08 22: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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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맹신 바보 종교인들 댓글이 한심합니다 2019-08-08 22:37:24
맹신 바보 종교인들 댓글이 한심합니다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신미대사가 일본 중들 요구를 물리치는데

무슨 친일파라고 댓글다는 타종교를 적으로 아는 한심한 개독들

천주교도 이단이라는 개독들

이순신장군도 사탄이라는 개독들 하는짓이 매국노같다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가 되었으면 개신교가 얼마나 될까

지금 일본 봐라 개신교 1프로도 안 된다 맹신 바보들이 알지도 못하고 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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