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바라밀다(波羅蜜多)
29. 바라밀다(波羅蜜多)
  • 현진 스님
  • 승인 2019.07.31 13:48
  • 호수 149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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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으로 건너가는 상태’ 의미의 산스끄리뜨어

인도 강가강 건너편 피안은
세속 극복하고 가야할 이상
부처님 유훈 ‘자등명 법등명’
남방불교‧중국불교 해석 달라

흔히 ‘파라미타’ 혹은 줄여서 ‘바라밀’이라고도 일컫는 ‘바라밀다’는 산스끄리뜨어 빠라미따(pāramitā)의 소리 옮김인데, ‘피안으로[pāraṁ] 건너가는[√i] 상태[tā]’를 의미한다. 이것은 대표적으로 ‘금강경’의 경명에도 나타난다. ‘금강경’은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能斷金剛般若波羅密多經, vajracchedi kāprajñāpāramitāsūtraṁ)’의 줄임말로서, 그 의미는 ‘금강석도 끊어버리는 지혜로써 피안으로 건너가는 상태를 서술해 놓은 경전’에 해당한다.

인도의 아리안족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인더스문명은 그 활동지역이 인더스강이라 알려진 인도북부의 강가(gaṅga)강 유역이다. 그들에겐 불교 이전의 브라만교부터 자신들의 고유한 이상향의 상태가 있었다. 그것을 브라만교에선 ‘절대존재 브라흐만과 하나 됨’이라 일컫고 있는데, 불교에서의 해탈(解脫)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눈앞에 놓인 강가강을 두고 자신들이 발을 딛고 서있는 이쪽을 세속이자 사바세계로 보고, 그 건너편 강의 저쪽 언덕인 피안(彼岸) 너머를 이상향으로서 반드시 가닿아야 할 곳으로 보았으며, 양쪽 언덕 사이에 흐르는 강가강의 거센 물줄기를 피안에 가닿기 위해 극복해야 할 험난한 세상살이로 여겼다.

‘대반열반경’은 세존의 열반 전후사정을 비교적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한 경전이다. 이 경에서 세존께선 당신의 입멸 후 교단의 의지처가 법(法, dharma)과 스스로[自]임을 밝히시고 교단이 법과 율을 중심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80세가 되시던 해, 열반에 들기 3개월 전에 ‘벨루와’라는 마을에 계시던 때였다. 한 차례 심각한 병고를 견뎌내셨지만 이미 쇠약해진 몸은 시자 아난다가 뵙기에도 곧 열반에 드실 것 같았기에, 향후 세존께서 계시지 않을 때 누구에 의해 이 승단이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지, 아난다는 눈물로써 여쭈어보았다.

“아난아! 나는 어떤 숨김도 없이 모든 진리를 일러주었다. 낡은 수레는 수리돼야 나아갈 수 있듯이 여래의 몸도 그러하다. 그러니 너희들은 이제 자신을 등불[燈]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 뿐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또한 내가 가르친 법을 등불[燈]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 뿐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여기서 우리에게 익숙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등불[燈]’의 빠알리어는 ‘dīpa’로서 등(燈)과 주(洲, 강 중앙의 모래섬)의 이중적인 의미이다. 남방경전 ‘니까야’에선 주(洲)로 이해되고 있으며, 한문경전엔 주로 등(燈)으로 번역되나 주(洲)로 번역된 곳도 없진 않다. 그래서 단지 ‘dīpa’의 이중적 의미를 알지 못해 등(燈)으로 옮겼을 것이란 추측은 옳지 않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유훈은 ‘자등(燈)명 법등명’으로 봐야 하는가? ‘자주(洲)명 법주명’으로 봐야 하는가? ‘자주명…’으로 본다면 ‘피안으로 건너감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쉬어가는 섬[洲]으로 여기고…’로 해석된다.

인도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강가강의 건너편 둔덕으로 건너가는 것이라 표현되는 해탈(解脫)에 대한 추구심이 유독 보편적이고도 강력하다. 아마도 아리안족이 이기적으로 설립한 계급제도와 더불어 인도의 넉넉지 않은 자연환경이 더해져 안락한 내생을 갈구하는 데서 생긴 현상일 것이다. 그에 반해 중국은 해탈보다 그저 뒷산 시원한 그늘숲에 앉은 신선(神仙)이 이상향으로 그려지는데, 이것은 비옥한 중원의 자연환경과 관계가 깊다.

인도인들은 ‘바라밀따’ 하는 것은 필연적이요, 그렇게 피안으로 건너가다 지치겠으면 강 중앙의 섬[洲]에 의지해 쉬었다 다시 건너가니 ‘자주명’이다. 그러나 중국에선 차안(此岸)도 제법 그럴 듯하여 꼭이 피안(彼岸)만을 갈구할 필요는 없으니, 그래서 그저 ‘살아가는 길에 등불…’이 현실적으로 더욱 요긴했으리라. 여기서도 또한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다’는 부처님의 무아법(無我法)이 적용되는 셈이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499호 / 2019년 7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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