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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고대불교-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㉘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⑦

자장 의해 창안된 진종설화, 진골 위에 성골이라는 관념적 신분 부여

진흥왕부터 선덕여왕때까지
중요 불사 계기로 연호 변경

황룡사 9층목탑의 조성은
국가불교 상징 최대 건축

‘삼국유사’ 자장 기록에서
진종설화‧불국토설화 등장

신라 왕족은 석가종족 주장
진평왕 직계 성골로 신성시

진종설화와 불국토설화는
여왕의 권위 높이려는 의지

​​​​​​​태종무열왕 진골 택하면서
성골 별개신분 잘못 알려져

‘삼국유사’ 황룡사 9층목탑조 목판본.
‘삼국유사’ 황룡사 9층목탑조 목판본.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은 즉위 3년(634) 정월에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고, 분황사(芬皇寺)를 준공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영묘사(靈廟寺)를 준공함으로써 이른바 전불시대의 7가람터 가운데 2곳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돌이켜 보면 제24대 진흥왕 즉위 33년(572) 정월에 연호를 홍제(鴻濟)로 바꾸고, 2년 뒤인 즉위 35년(574) 3월에 황룡사의 장육존상을 조성하였다. 홍제라는 연호는 12년간 사용되다가 제26대 진평왕 즉위 6년(584) 2월에 건복(建福)으로 바꾸면서 장육존상을 봉안하는 금당(金堂)의 건물을 준공하였다. 그런데 건복이라는 연호는 50년 만인 선덕왕 즉위 3년(634)에 비로소 인평으로 바뀌면서 분황사가 창건된 것이다. 이로써 진흥왕대부터 선덕여왕대까지 연호의 변경은 중요한 불사(佛事)를 계기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신라 ‘중고’ 시기 정치적 변화의 단계마다 불교가 직접 관련되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선덕여왕(632〜647)대에 추진된 최대 불사 중 주목되는 것은 분황사 창건보다 황룡사의 9층목탑 건립이었다. 9층목탑의 조성은 선덕여왕대뿐만 아니라 ‘중고’시기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불사였다고 할 수 있으며, 신라 국가불교를 상징하는 최대의 건축물이었다고 평가된다. 신라 ‘중고’시기 국가불교의 최대 상징물인 황룡사의 9층목탑이 조성된 때는 선덕여왕 14년(645)이었다. ‘황룡사구층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塔刹柱本記)’와 ‘삼국유사’ 황룡사9층탑조에 의하면, 선덕여왕 14년(645) 3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4월에 찰주를 세웠으며, 다음해에 준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내우외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시책의 하나로서 추진된 국가적인 불사에는 3인의 주역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9층탑의 조성을 발의하고 기획한 인물은 승려인 자장(慈藏)이었고, 실제 조성공사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총책임을 맡은 인물은 정계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용수(龍樹, 일명 龍春)였다. 그리고 건축공사의 기술을 책임지는 대장(大匠)은 백제에서 초빙된 아비지(阿非知, 知는 존칭의 어미)였다. 그밖에 공사에 동원된 건축 기술자인 소장(小匠)이 200인이었다는 것을 보아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는 국력을 기울인 대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먼저 9층탑 조성을 발의한 자장은 신라 ‘중고’시기 국가불교, 또는 호국불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로서 그에 관한 자료는 다양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출생과 입적의 연대는 전연 알 수 없으며, 구체적인 행적도 자료에 따라 차이를 보여주고 있고, 저술 또한 몇 종의 제목만이 확인될 뿐 책 한권 전해지는 것이 없다. 자장의 불교 업적으로 평가되는 계율의 정리와 교단체제의 정비 문제는 별도의 항목에서 검토할 예정이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9층탑의 조성에 관한 문제로 한정해서 검토하려고 한다. 자장은 신라 최고 신분인 진골 귀족 가문의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무림(武林, 茂林 또는 虎林으로 표기된 것은 고려 제2대 혜종(惠宗)의 이름인 ‘무(武)’를 피휘(避諱)한 것임)은 진덕여왕때까지 정계 실력자의 한 사람으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자장은 일찍이 출가하여 당에 유학갈 때는 이미 장년의 나이로서 승실(僧實) 등 10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당에 유학간 연대는 자료에 따라 2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자장이 당에 간 연대가 앞에서 들은 바 있는 ‘황룡사구층탑찰주본기’와 ‘속고승전(續高僧傳)’권24 자장전에서는 선덕여왕 7년(638)인 반면 ‘삼국사기’ 권5 선덕왕조와 ‘삼국유사’ 권3 황룡사9층탑조・대산오만진신조와 권4 자장정율조 등 국내의 문헌자료에는 선덕여왕 5년(636)으로 전해지고 있다. 자장의 당에서의 행적에 관한 자료로는 국내의 문헌자료보다는 당의 문헌이 좀 더 신빙성이 높다고 보며, 특히 9층탑의 조성에 관련된 자료로서는 ‘9층탑찰주본기’와 같은 신라시대의 금석문이 가장 신빙성이 높은 자료로서 평가되기 때문에 자장이 당에 간 것은 선덕여왕 7년(638)에 입당, 12년(643) 3월에 귀국한 것이 사실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또한 자장의 당에서의 행적에 관해서도 ‘속고승전’에서는 주로 장안 소재의 승광별원(勝光別院)과 흥복사(興福寺) 등의 사찰, 그리고 장안 교외의 종남산(終南山)에 머문 사실들만을 전해주고 있다. 반면 ‘삼국유사’의 여러 항목에서는 장안과 종남산에서의 행적보다 산서성(山西省) 오대산(五臺山)에서의 행적이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자장의 오대산의 행적에 관한 사실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자장은 실제 오대산에 간 적이 없으며, 뒷날 8세기 이후 당의 오대산 신앙이 전래, 신라에서도 문수보살의 주처로서의 오대산신앙이 유포된 이후 부회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이다. 따라서 자장에게 9층탑 건립을 권유한 주체도 오대산 인근의 태화지(太和池)가에서 만났다는 신인(神人)이 아니고, 종남산의 원향선사(圓香禪師)로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이라고 본다. 9층탑 건립의 인유(因由)를 원향선사로부터 깨우침 받았다는 사실은 황룡사의 기록(寺中記)에서도 별도로 전승되고 있었음을 ‘삼국유사’ 황룡사9층탑조에서는 주석 형태로나마 밝혀주고 있다.

이상과 같은 자료 검토를 통해 우리는 자장의 오대산 관련 사실은 역사적 사실과는 일단 구분하여 설화로서 접근하여 다른 각도에서 그 의미를 추구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삼국유사’ 황룡사9층탑조에 의하면 자장이 서방으로 유학하여 먼저 오대산에 가서 현신으로 감응한 문수보살을 만났는데, 문수보살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 왕은 천축(天竺)의 찰제리(刹帝利, Kṣatrya)의 종족인데, 이미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은 특별한 인연이 있으므로 동이(東夷) 공공(共工)의 종족과는 다르다. 그러나 산천이 험준하기 때문에 사람의 성품이 추하고 삐뚤어져 사견을 많이 믿어 간혹 천신(天神)이 화를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다문비구(多聞比丘)가 나라 안에 있으므로 군신이 편안하고 만민이 화평하다고 하였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삼국유사’ 황룡사장육조에서는 문수보살의 감응설화이면서도 다른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문수보살이 현신으로 감응하여 비결을 주면서 당부하기를, “너희 나라 황룡사는 바로 석가불과 가섭불이 강연했던 땅이므로 연좌석(宴坐石)이 아직도 있다. 그러므로 무우왕(無憂王, Aśoka)이 황철 약간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1천3백여 년이나 지난 뒤에 너희 나라에 이르러 (불상이) 이루어지고 그 절에 모셨던 것이니, 대개 위덕이 그렇게 시킨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두 설화는 모두 부처와의 인연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면서도 다소 다른 내용을 전해주는 점이 주목된다. 전자가 신라의 왕족을 부처님의 종족과 같다고 보는 진종설화(眞宗說話)인데 비하여 후자는 신라라는 국토가 과거부처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주장하는 불국토설화(佛國土說話)라는 점이다. 이 두 종류의 설화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신라 왕족이 부처와 같은 석가종족이라는 주장이다.

필자는 앞서 진흥왕의 두 아들 이름이 동륜(銅輪)과 사륜(舍輪, 곧 鐵輪이나 金輪)이었고, 동륜의 세 아들의 이름이 백정(白淨)・백반(伯飯)・국반(國飯)으로서 전륜성왕과 부처님의 가족의 이름에서 그대로 따온 것임을 살펴본 바 있었는데, 그러한 사실에 기초하여 자장은 아예 신라의 왕족이 곧 인도의 부처님과 같은 종족이라는 진종설화(眞宗說話)로 발전시키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을 중심으로 하는 좁은 범위의 직계가족의 신분을 성골(聖骨)이라고 하여 특별히 신성시하려고 하였는데, 성골이라는 말이 곧 신성한 뼈(유골)라는 의미이고, 이 신성한 뼈는 바로 부처님의 뼈(舍利)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성골이라는 개념은 진종설화에서 나온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뒤에 성골은 부처님의 뼈만이 아니고, 일반 고승의 뼈를 칭하기도 하였다. 즉 ‘삼국유사’ 권4 관동풍악발연수석기조(1199년 瑩岑 찬술)에 의하면 진표(眞表)의 유골을 그 제자들이 ‘성골(聖骨)’로 받들어 모시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삼국유사’ 황룡사9층탑조에서는 자장이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현신에 감응하고 물러나서 태화지(太和池) 가를 지나다가 신인(神人)을 만나서 북쪽의 말갈(靺鞨)과 남쪽의 왜인(倭人)과 이웃하고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빈번히 받고 있는 신라의 국가적 어려움을 설명하고, 그 신인으로부터 그 해결책으로 9층탑의 건립을 권유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았기 때문에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가 침략을 도모하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오. (중략) 황룡사 호법룡(護法龍)은 나의 맏아들이오. 범왕(梵王, 梵天)의 명을 받고 이 절에 와서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절 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는 항복하고 9한(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편안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이 침해하지 못할 것이요. 다시 나를 위하여 경기 남쪽 언덕에 정사(精舍)를 지어서 나의 복을 빌어주면 나 역시 그 은덕을 갚겠소”

자장이 오대산에 갔었다는 사실은 물론 문수보살에 감응하고 신인과 만났다는 이야기는 허구에 불과한 설화이다. 그러나 이들 설화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진종설화와 불국토설을 통해 신라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하는 자장의 염원을 읽을 수 있고, 나아가 가시적으로 상징적인 건축물의 조성을 통해 추락한 여왕의 권위를 드높이고 신라인의 국가의식을 고양시키려는 의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장의 활약은 황룡사9층탑이라는 신라 최대의 기념비적 건축물을 남기는 한편, 자장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에 의해 창안된 진종설화는 진평왕과 그 형제, 직계가족으로 이루어진 좁은 범위의 신라왕실로 하여금 진골(眞骨) 위에 성골(聖骨)이라는 관념상의 신분을 부여받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성골 신분은 자장과 함께 9층탑 조성의 주역이었던 용수(龍樹)의 아들 김춘추(金春秋)가 뒷날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여 진골 신분으로 만족하는 길을 택함으로써 진골과 분리되어 독립된 별개의 신분이었던 것처럼 잘못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99호 / 2019년 7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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