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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 대한 의심 다 끊어지면 부처님 친견하리”

[중국 정공 스님의 '무량수경청화' 법문(58)] 어떻게 닦아야 여법한가

상을 여의어서 집착하지 말고
분별에도 집착 말아야  하나니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알음알이를 지혜로 바꾸는 것

그렇지 않다면 복보에 불과해
결코 윤회에서 벗어날수 없어

중국 불자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성지 중의 성지인 보타낙가산의 도량들. 
중국 불자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성지 중의 성지인 보타낙가산의 도량들. 

“만약 상에 집착하지 않는 지혜로써 온갖 덕의 근본을 심어 몸과 마음이 청정하고 분별 집착을 멀리 여의다(若以無相智慧 植衆德本 身心清淨 遠離分別).”

이 단락에서는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닦아야 여법한지 가르쳐 주십니다. 즉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을 여의고 집착하지 말며 분별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분별하지 않으려면 제6식을 쓰지 않아야 하고 집착하지 않으려면 제7식인 말나식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이는 곧 “식을 바꾸어 지혜를 이루는 것(轉識成智)”을 말합니다. 

제6식을 쓰지 않음은 바로 묘관찰지(妙觀察智)이고 제7식을 쓰지 않음은 바로 평등성지(平等性智)입니다. 6, 7식을 바꾸는 것은 즉 인지(因地)에서 바꾸는 수행이고 5, 8식은 과위 상에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6, 7식을 먼저 바꾸기만 하면 5, 8식은 저절로 이어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식(識)을 바꾸어 지혜를 이루는 것에 있습니다. 식(識)을 바꾸어서 지혜를 이룰 수 없다면 당신이 닦은 것은 복보일 뿐입니다. 결코 생사를 깨달아 삼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몸에 익숙하도록 실천하여야 합니다. 일상생활 중에서 일을 처리하고 사람을 상대하고 사물을 접할 때 분별하지 않도록 배워야 하고, 집착하지 않도록 배워야 합니다. 만약 분별 집착이 해가 갈수록 가벼워지고 적어지면 공부가 득력하였고 진보하였음을 뜻합니다. 만약 분별 집착이 과거와 다르지 않고 여전히 많으며, 심지어 이전보다 더 많아지면, 또한 불법을 공부하여도 번뇌가 갈수록 많아진다면 당신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고, 반드시 방법에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배워서 얻은 결과가 불법에서 말한 것과 완전히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부처님을 따라 여법하게 배우면 반드시 해가 갈수록 마음이 청정해지고, 해가 갈수록 망상 번뇌가 줄어들 것입니다. 또한 해가 갈수록 즐거워지고, 해가 갈수록 지혜가 있을 것입니다.

지혜가 있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일을 처리하고, 사람을 상대하며, 사물을 접할 때 또렷하고 명백하게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종전에는 사람을 보고 일을 볼 때 또렷하게 잘 보지 못하고 잘못 보았지만, 현재는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본다면 지혜가 현전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따라 배우면서 얻는 즐거움과 이익을 생활에서 검증할 수 있어야 불법을 제대로 받아쓰는 것입니다. ‘식중덕본(植衆德本)’은 일심으로 아미타불에 전념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위없는 공덕의 근본입니다. ‘덕’은 당신이 얻는 것이고 ‘본’은 진여본성을 말합니다. 따라서 바로 구경원만한 부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오직 정토법문만이 이번 일생에 결정코 헛되이 세월을 보내지 않고 구경의 과위를 얻을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청정하면 현세에서 바로 얻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청정해지면 당신은 이미 왕생할 가능성이 생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매월 매주 나아지고 하루하루 청정해지면 당신은 가는 때를 미리 알아 괴로움 없이 자재왕생 할 수 있습니다. 몇 년 더 살고 싶어도 아무런 장애가 없고 언제든지 갈 수 있으니 곧 생사에 자재합니다. 

분별과 집착을 멀리 여의라는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내가 아무것도 분별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면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이것이 무엇인가? 묻는데 나는 모르겠다, 분별해서는 안 된다 말한다면, 도대체 이런 법을 어떻게 닦으란 말입니까?”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분별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마음의 차원에서 말씀하신 가르침입니다. 마음의 차원에서 분별 집착하지 말라 하신 것이지 현실의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분별 집착하여 수건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것을 수건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수건입니까? 저는 그것을 수건이라고 집착하지 않습니다. 저는 분별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분별 집착합니다. 보살은 중생에게 수순하고 공덕을 따라 기뻐합니다. 당신이 분별하여 이렇게 말하면 저도 당신을 따라서 말하지만 저는 마음속으로 절대 그것이 수건이라고 집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응용할 때는 권지(權智)로 선교방편을 사용하여 중생에게 항상 수순합니다. 자신이 받아쓰는 것은 실지(實智)로 진실한 지혜입니다. 진실한 지혜는 분별 집착이 없고 몸과 마음이 청정합니다. 요컨대 현실의 차원에서는 중생을 따르고 마음의 차원에서는 청정하다면 이를 ‘진정한 닦음’이라 합니다.

“청정 찰토에 왕생하기를 구하여 부처님의 무상보리를 향해 나아가면 이번 생에 불찰토에 태어나 영원히 윤회를 벗어나느니라(求生淨刹 趣佛菩提 當生佛刹 永脫輪回).”

청정찰토는 바로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를 말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강렬한 원망을 일으켜 서방정토에 태어나길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 우리의 방향은 부처님의 무상보리이어야 합니다. 서방극락세계에 가서 우리는 무상보리를 성취하고, 구경원만한 불과를 증득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은 “이번 생에 불찰토에 태어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반드시 서방극락세계에 태어나 영원히 해탈을 얻습니다. ‘무량수경’의 말미에 세존께서는 우리에게 정확한 수행강령을 가르쳐 주십니다.

끝으로 부처님께서는 ‘무량수경’ 제41품 ‘의심이 다 끊어져야 부처님을 친견한다’에서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은 결코 정토에 태어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부류는 세간에서 누리는 것에 탐착하여 인천의 복보를 구하고 세간의 것을 탐냅니다. 이 같은 사람은 정토에 태어날 수 없습니다.
둘째 부류는 세간의 지혜총명과 변재를 가지고 삿된 견해가 매우 깊은 사람입니다. 이 같은 사람은 상당한 지혜가 있고 매우 냉정한 두뇌가 있어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때때로 그를 정법을 지닌 진정한 선지식으로 여기는데 이는 큰 잘못입니다.
셋째 부류는 상에 집착하고 분별하여 정집(情執)이 매우 무겁습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왕생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가 닦는 것은 전부 인천에서 누리는 복보일 뿐입니다.

허만항 번역가 mhdv@naver.com

 

[1500호 / 2019년 8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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